가분(加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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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년이 심한 경우와 같이 특별한 상황에서 각 지방에서 가지고 있는 환곡의 원래 정해져 있는 창고 보유 곡물의 비율을 줄이고 나누어 주는 곡물의 비율을 늘리는 것.

개설

환곡을 규정된 비율 이상으로 나누어 주는 가분은 흔히 19세기 환곡 운영과 관련하여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 등의 저술에서 불법적인 행위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가분은 관찰사가 요청하면 왕조 정부에서 상황을 헤아려 허락하는 합법적인 환곡 운영이었다. 19세기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지방관이 마음대로 규정된 비율 이상의 수량을 나누어 주고 모곡을 거두어들이는 천분(擅分), 사분(私分) 등을 가분으로 이해한 것이 이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본래 가분은 환곡을 분급한 뒤에도 종자곡과 식량이 부족하면 관찰사가 보고하여 실시하는 것이었다. 환곡의 총량이 많지 않았던 18세기 전반까지의 환곡 운영은 대체로 곡식의 절반을 창고에 남겨 두고 나머지 절반을 나누어 주는 반류반분(半留半分) 규정이 적용되었다. 그런데 환곡의 양이 많지 않고 환곡을 원하는 민인이 많을 경우, 조정의 승인을 얻어 추가로 지급하는 가분은 농민 보호라는 환곡 본래의 목적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이후의 가분은 이상과 상황이 달랐다. 무엇보다 환곡의 총액이 크게 증가했음에도 각 관아는 여전히 가분을 요청하였다. 이는 가분을 통해 추가로 거두어들인 모곡을 지방관아의 비용으로 사용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경비를 보충하기 위해 매년 동일한 액수를 가분하고 있었는데, 이 경우를 응가분(應加分)이라고 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 항상적으로 시행되던 가분은 초기에는 농민 진휼이라는 본래의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가분의 주목적은 농민 진휼보다는 지방아문의 경비를 보충하기 위한 목적으로 변질되었다. 하지만 환곡 포흠으로 인한 장부상에만 존재하는 환곡의 증가로 인해 결국 가분은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내용 및 특징

가분은 환곡 원곡이 부족할 경우나 흉년으로 식량과 종자가 부족할 때 시행되었다. 가분은 규정된 환곡의 분급을 끝내고 추가로 분급하는 것이므로 그 액수가 많지 않지만 가분제를 통하여 환곡의 진휼 기능을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환곡의 급증 속에서도 지역 간의 편차로 인하여 환곡이 적은 지역에서는 환곡의 증대를 요청하고 있었다. 특히 환곡이 적은 경기도의 경우는 환곡의 부족으로 인하여 빈번히 가분을 요청하고 있었다. 충청도의 경우에도 원곡이 부족한 8~9 고을에서는 가분을 요청하였으며, 전국에서 가장 많은 환곡은 보유한 경상도에서도 환곡이 적은 지역은 가분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수는 8만 석에 이르렀다. 이처럼 곡식이 증가하면서도 지역 간의 곡식 비축분의 불균형으로 가분을 시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지역 간의 곡식 이전이었지만 이 역시 운반상의 폐단과 환곡 모곡의 용도로 인해 적극적으로 시행될 수 없었다.

18세기 전반까지는 가분·천분에 대한 처벌규정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환곡의 증가와 지방관의 임의 분급이 증가하여 폐단이 늘자 창고 보유곡을 전부 분급한 자는 정배(定配)하고, 절반을 분급한 자는 3년 도배(徒配)하고, 그 외는 탈고신(奪告身) 하는 규정이 확립되었다. 물론 이 규정이 모든 가분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조정의 허가 없이 수령 자의로 분급한 천분·사분의 경우만 처벌 대상이 되었다.

정부에서 가분을 시행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환곡 본래의 기능인 농민재생산보호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조정의 허락을 얻지 않고 가분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농민을 위한 것이라면 처벌을 하지 않았다. 특히 6월 이후에 시행한 가분은 모곡을 면제해 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6월에 가분을 하는 이유는 보리가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에게 식량을 지급하기 위해서이거나, 이앙을 못했을 때 다른 곡물을 심도록 하기 위해 종자를 분급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가분은 농사에 기일을 다투는 시기에 시행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흉년이 들면 곧바로 가분을 허가하도록 지시하고 있으며, 모곡을 면제하기도 하였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환총이 급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흉년과 지역 간의 곡식 비축량의 불균형으로 인하여 가분은 빈번히 시행되었다. 18세기 후반 정조 연간에는 가분을 요청하는 방식이 일정하지 않았다. 창고 보유 곡물을 비율을 달리하여 가분하는 경우도 있고, 한편으로는 액수를 지정해 가분을 요청하고 있었다. 대체로는 창고 보유 곡물의 일정 비율로 가분을 요청하였다.

변천

법전 상에 규정된 가분 조항에는 민간에 종자와 식량이 부족한 때로 한정하고 있지만 19세기에 들어서 가분은 늘 시행되고 있었다. 종자와 식량 이외에도 지방아문이 부족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가분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분 시행 목적의 변화는 19세기 환곡제도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서 가분제의 변화는 구체적인 액수를 정하여 가분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감사의 가분 요청에 대해 대부분 그 액수 모두를 허가했다. 가분은 당장의 꼭 필요한 액수만을 요청했기 때문에 한 번 가분을 한 후에 부족한 경우가 발생하면 다시 가분을 요청하여 허가를 얻었다.

19세기에 가분의 목적은 크게 농민 진휼을 목적으로 한 가분과 비용충당을 목적으로 한 가분으로 구분되었다. 농민 진휼을 목적으로 한 가분은 대체로 식량과 종자의 분급 부족을 이유로 들었다. 특히 극심한 기근이 발생하였을 경우 그 여파는 바로 그해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몇 년간 지속되었다. 자연재해로 인해 징수하지 못한 환곡의 증가는 환곡 총량의 감축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고 있으며 기근이 발생하는 해일수록 가분의 수가 증가하는 악순환은 계속되었다. 계속되는 미징수곡으로 인한 환곡의 감소와 이에 따른 가분곡의 증가는 결국 환곡 분류법(分留法)을 유지하지 못하고 보유 환곡의 전량을 분급하는 진분화(盡分化)의 과정을 촉진하였다.

한편 부족한 비용을 메우기 위해 가분을 요청한 사례는 1810년대 기록에서는 드물게 나타났지만 1820년대 이후에는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가분 모곡의 사용처를 살펴보면 각 지방아문이 관리하는 환곡의 모곡은 대체로 해당 아문의 경비로 사용되고 있었다.

황해도의 경우 1817년(순조 17) 이후 대략 1만 4,000석을 매년 가분하고 있었고, 전라도는 1819년(순조 19) 이후에 가분 액수가 1만 석으로 고정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경기도는 1817년부터 2,000~3,000석으로, 충청도는 1820년(순조 20)부터 3,000~4,000석으로 가분의 액수가 고정되어 나타나고 있다. 1817년부터 1820년 사이에 가분의 기록이 나타나지 않은 경상도와 함경도,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의 지역의 가분 액수가 고정되어 나타나는 기록을 통해서 가분제의 성격이 비용충당을 위한 목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가분제는 1833년(순조 33) 이후 일부 지역에서만 시행되는 변화를 보인다. 충청도, 황해도, 수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환곡 가분이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이처럼 가분이 일부 지역에서만 시행되었던 것은 환곡 총량의 감소와 관련이 있다. 각종 정퇴, 탕감과 진휼정책의 시행 등으로 인한 곡총의 감소는 환곡 분급액을 축소시켜 가분을 항상 시행하게 하였다. 환곡 원수의 감소와 이로 인한 가분의 증가 현상은 환곡의 모곡을 경비에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근본적인 문제를 찾을 수 있다. 지방아문의 경비는 매년 일정하게 지출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원곡 감축으로 인한 수입 감소는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부족액을 메워야 하므로 환곡을 둘러싼 각종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다.

19세기에 들어 전국적, 연례적으로 시행되던 가분은 환곡 총액의 감소와 허곡화 현상 그리고 온갖 폐단으로 인해 1853년에 가분을 중지하기로 조치하였다. 즉, 곡총의 점진적인 감소는 가분을 시행할 여분의 곡식조차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의의

가분은 초기에는 농민 진휼이라는 환곡 본래의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환곡 총액의 감소추세 속에서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가분의 주목적은 농민 진휼보다는 지방아문의 경비를 보충할 목적으로 변화되었다. 그런데 가분의 변화는 환곡 포흠으로 인한 허곡화 현상의 증대로 결국에는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환곡의 본래 목적인 농민 진휼의 기능이 변질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참고문헌

  • 『전률통보(典律通補)』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목민심서(牧民心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사정고(四政考)』
  • 문용식, 『조선후기 진정과 환곡운영』, 경인문화사, 2001.
  • 문용식, 「19세기 전반 환곡 진휼기능의 변화과정」, 『부산사학』 19, 1990.
  • 양진석, 「18·19세기 환곡에 관한 연구」, 『한국사론』 21,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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