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덕진(加德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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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도 웅천에 설치된 첨사진(僉使鎭).

개설

가덕도는 안골포(安骨浦)와 염포(鹽浦)의 안쪽에 위치하고, 안골포 바깥 먼 바다에는 연화도·욕지도가 있다. 16세기 일본 대마도 사람들이 가덕도 해역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소금을 채취하였다. 조선정부는 이들을 방어하기 위해 가덕도에 수군 진영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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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경위 및 목적

가덕도는 웅천에서 뱃길로 한 식경, 안골포에서는 반 식경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그 서쪽에 거제도, 남쪽에 부산포가 있고, 중간에 가덕도가 있다(『중종실록』 6년 12월 21일).

1512년(중종 7) 가덕도 인근 해역에 왜인들이 정박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270여 명에 달하였다(『중종실록』 7년 3월 14일). 그리하여 1544년(중종 39) 5월에 날로 증가하는 왜인을 통제하기 위해 가덕도에 수군진을 설치하고, 같은 해 9월에 수군진성을 축조하였다(『중종실록』 39년 5월 22일).

16세기 가덕도는 경상좌도의 중요한 길목에 입지한 까닭에 안골포·웅천·제포가 자물쇠 구실을 하였다. 또한 지세포·옥포·조라포·천성 등지가 서로 조응하고, 김해·창원이 배후에 포진하여 방어망을 구축하였다(『중종실록』 39년 9월 26일).

조직 및 역할

16세기 가덕도에는 말 198필을 방목하였다. 또 선박을 건조하는 데 쓰이는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었고, 바다에서 어염이 생산되었다. 이런 까닭에 조선 중종 때 왜인들이 우리나라 해역에 자주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자, 조선 정부가 크게 긴장하였다. 더욱이 조선 명종 때 일본에서 은(銀)이 많이 생산되었는데, 이것을 싣고 대마도 사람들이 중국을 오가면서 무역하였다. 이 과정에서 풍랑으로 인해 대마도 사람들이 조선 해역에 표착하여 우리나라 주민들을 침어하였다(『명종실록』 8년 7월 27일). 이에 가덕진에 주둔하고 있던 수군들이 왜인을 방어하는 데 동원되었다.

변천

1509년(중종 4) 감찰 박전(朴佺)이 가덕도에 거진(巨鎭)을 설치하여 왜구를 방어하자고 제안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 1544년(중종 39)에 수군진이 설치되었다. 16세기 일본이 무역을 내세워 가덕도 해역으로 모여들자 점차 왜선의 물품과 재화가 다양해지면서 사회문제가 발생하였다.

18세기에 왕실세력이 가덕도 어장을 장악하였다. 또 외국 배들이 가덕도 해역으로 표착해왔다(『영조실록』 7년 1월 10일). 조선정부는 무역을 핑계로 출몰하는 외국인과 귀화한 야인들을 수군을 동원하여 방비하고 감시하였다.

참고문헌

  • 「가덕진도(加德鎭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