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 태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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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태실(景宗 胎室)
충북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의 경종 태실 전경
식별자 PC014
분류 국왕 태실
한글명 경종 태실
한자명 景宗 胎室
영문명 Placenta Chamber of King Gyeongjong
피안자 명칭 경종(景宗)
피안자 이칭 이윤(李昀)·자(字) 휘서(輝瑞)·선효대왕(宣孝大王)·의릉(懿陵)
피안자 부 숙종(肅宗)
피안자 모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 장씨(張氏)
피안자 생년월일 1688.11.20
피안자 몰년월일 1724.10.11
안태 연월일 1689.02.22 『경종 태지석』
안태지 기록 충주(忠州) 『영조실록』
안태지 기록1 충주(忠州) 엄정립비(嚴政立碑)의 북쪽 이삼리 쯤 『정조실록』
안태지 좌표(위도) 37°10'89.60"N
안태지 좌표(경도) 127°92'72.42"E
안태지 주소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산34-1
문화재 지정여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호
이안 연월일 1929 추정
이안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안지 좌표(위도) 37°66'45.61"N,
이안지 좌표(경도) 126°86'06.29"E
지문 서삼릉 태실 도굴로 인한 태지석 현황 파악불가
지문 찬자 서삼릉 태실 도굴로 인한 태지석 현황 파악불가
석물 경종 가봉태실 초안지 복원
태항아리 서삼릉 태실 도굴로 인한 태항아리 현황 파악불가



목차

내용[편집]

조선 제20대 국왕 경종의 태실이다.

경종이 태어난 다음해 충주에 안태하였으나 가봉은 1726년(영조 2)에 이루어졌다. 1724년(경종 4)에 가봉 시도가 있었으나 흉년을 이유로 미루어졌으며, 경종의 재위 기간이 짧은 것 역시 경종연간에 가봉이 이루어지지 못한 원인의 하나로 보인다. 영조 때 경종 태실을 가봉하면서 영조 태실도 함께 가봉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영조는 본인의 태실은 때를 기다려 가봉하라고 계하하였다.

경종 태실을 가봉하는데 필요한 석재는 10여리 떨어진 곳에서 조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석재를 끌어다 운반하며 인근 논과 받이 상하였는데 조정에서는 그 피해를 조사하여 대가를 지불하게 하였다. 또한 태실 인근은 금표의 영역으로 삼는 것이 관례였다. 경종 태실을 조성하며 금표 영역 안에 있는 백성들의 밭은 대가를 주어 사들이고 태실 인근의 백성으로 수직군을 삼고 그 집은 허물지 않고 그대로 거주하게 하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훼손되었던 경종 태실은 1976년에 원래 위치에 복원되었으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제 제6호로 지정되었다.

관련 기록[편집]

조선왕조실록[편집]

『경종실록』15권, 경종 4년(1724) 7월 23일 갑자(甲子)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종묘의 전알을 쾌차한 후로 물리고 선왕의 행장을 별도로 짓게 하다》

… (전략) … 이광좌가 또 말하기를,

"송상기(宋相琦)가 지은 선왕(先王)의 시장(諡狀)은 너무 소루하고 간략합니다. 청컨대 사신(詞臣)을 시켜 별도로 행장(行狀)을 짓도록 하소서. 그리고 임금이 즉위한 뒤에는 의례적으로 태봉(胎峯)의 석물(石物)을 더 배설(排設)하는 조치가 있는 법인데, 선조(先朝)께서 즉위하신 후에 해마다 흉년이 들어서 정지시키고 물려오다가 계해년에서야 처음으로 거행하였습니다. 지금 수환(水患)이 극도로 심하고 또 한재(旱災)가 있으니, 청컨대 우선 명년 가을 농사의 흉풍(凶豐)을 보아서 다시 품지(稟旨)하도록 하소서."

光佐又言: "宋相琦所撰, 先王諡狀, 太踈略。 請令詞臣, 別撰行狀。 上卽位後, 例有胎峰石物加排之擧, 而先朝卽位後, 以年凶停退, 癸亥始擧行。 今水患極備, 又有旱災, 請姑觀明秋年事更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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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종실록』15권, 경종 4년(1724) 7월 23일 갑자(甲子) 1번째 기사



『영조실록』10권, 영조 2년(1726) 9월 4일 계사(癸巳)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선공감 제조 김택현 등에게 경종의 태실에 석물을 더 봉하도록 하다》

충주(忠州)에 있는 경종 대왕(景宗大王)의 태실(胎室)에,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 김택현(金宅賢),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 정형익(鄭亨益)에게 명하여 석물(石物)을 더 봉(封)하도록 하였다.

景宗大王胎室, 在忠州。 命繕工監提調沈宅賢、觀象監提調鄭亨益, 加封石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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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10권, 영조 2년(1726) 9월 4일 계사(癸巳) 1번째 기사



승정원일기[편집]

『승정원일기』 332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11월 10일 기묘(己卯) 17/19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胎峰에 합당한 세 곳을 備望하여 들이며, 落點한 뒤 擇日하여 王子阿只氏의 藏胎를 거행할 것을 청하는 觀象監의 계》

徐文裕, 以觀象監官員, 以領事提調意啓曰, 次知內官, 招致地官韓必雄, 以王子阿只氏藏胎事, 傳敎矣。藏胎之法, 方書則以爲, 男胎則五月而藏云, 而考見前後謄錄, 則不拘五月之限, 皆用吉朔, 故令地官推擇, 則今十一月·十二月爲吉云, 胎峰可合處, 就癸□年審定所錄, 擇其三處, 備望以入, 落點後, 擇日擧行, 何如?

傳曰, 依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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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332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11월 10일 기묘(己卯) 17/19 기사



『승정원일기』 332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11월 12일 신사(辛巳) 20/26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王子阿只氏의 藏胎를 내년 2월 解凍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擇日하여 擧行할 것을 청하는 觀象監의 계》

李墪, 以觀象監官員, 以領事提調意啓曰, 王子阿只氏藏胎吉日, 令日官推擇, 則今十一月·十二月爲吉朔云, 故擇日擧行事, 啓達, 蒙允矣。

令地官擇日, 則十二月十三日平吉云, 而卽今日氣凍寒, 石手亦皆赴役於山陵, 藏胎·石物等工役, 決難完畢於一月云, 依方書五月藏胎之法, 待明年二月解凍後, 擇日擧行, 似爲便當, 敢此仰稟。

傳曰, 明年二月, 亦是吉朔云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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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332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11월 12일 신사(辛巳) 20/26 기사



『승정원일기』 332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11월 13일 임오(壬午) 22/29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王子阿只氏의 藏胎을 내년 2월 解凍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擇日하여 거행할 것을 청하는 觀象監의 계》

觀象監官員, 以領事·提調意啓曰, 王子阿只氏藏胎吉日朔, 問於地官, 則今十一月·十二月爲吉云, 故擇日擧行事, 啓達允下矣。

令地官擇日, 則十二月十三日平吉云, 而卽今日氣凍寒, 石手等, 亦皆赴役於山陵, 藏胎石物等工役, 決難完畢於一月之內云。依方書五月藏胎之法, 待明年二月解凍後, 擇日擧行, 似爲便當, 敢此仰稟。

傳曰, 明年二月, 亦是吉朔云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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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332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11월 13일 임오(壬午) 22/29 기사



『승정원일기』 332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12월 18일 정사(丁巳) 24/35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忠原 胎峯을 看審한 결과 탈이 없다고 하므로 내년 2월 안으로 吉日을 推擇하여 始役하기를 청하는 觀象監의 계》

觀象監官員, 以領事意啓曰, 忠原胎峯有頉與否, 發遣地官金克萬看番, 則無頉云, 依前定奪, 明年二月內, 推擇吉日, 以爲前期始役之地,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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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332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12월 18일 정사(丁巳) 24/35 기사



『승정원일기』 332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12월 18일 정사(丁巳) 27/35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忠原 胎峯을 看審한 결과 탈이 없다고 하므로 내년 2월 안으로 吉日을 推擇하여 始役하기를 청하는 觀象監의 계》

閔鎭長, 以觀象監言啓曰, 忠原胎峰有頉與否, 發遣地官金克晚[金克萬]看審, 則無頉云, 依前定奪, 以明年二月內, 推擇吉日, 以爲前頭始役之地,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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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332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1688) 12월 18일 정사(丁巳) 27/35 기사



『승정원일기』 333책 (탈초본 17책) 숙종 15년(1689) 2월 4일 임인(壬寅) 21/29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元子의 탯줄을 묻을 때 安胎使 이하의 陪行 服色에 대해 묻는 禮曹의 계》

又以禮曹言啓曰, 卽者觀象監, 以今此元子藏胎時, 安胎使以下陪行服色, 吉服與時服, 指一分付事牒報, 而捲草祭時, 旣以吉服行祭, 藏胎時, 吉服乃行, 明白無疑, 而如此莫重之事, 不可臆度創規云。元子藏胎, 事體莫重, 而本曹, 亦無國恤時可據前例, 似當依捲草祭時禮, 借吉, 而臣曹, 有難率爾斷定, 何以爲之? 敢稟。

傳曰, 吉服陪行,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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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333책 (탈초본 17책) 숙종 15년(1689) 2월 4일 임인(壬寅) 21/29 기사



『승정원일기』 333책 (탈초본 17책) 숙종 15년(1689) 2월 16일 갑인(甲寅) 3/1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沈梓 등이 安胎하는 일을 忠州로 나감》

吏曹判書沈梓, 直講兪集一, 安胎事, 忠州地出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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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333책 (탈초본 17책) 숙종 15년(1689) 2월 16일 갑인(甲寅) 3/10 기사



『승정원일기』 333책 (탈초본 17책) 숙종 15년(1689) 2월 16일 갑인(甲寅) 4/1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金宇杭이 安胎하는 일을 陪行하기 위해 나감》

京畿都事金宇杭, 安胎陪行事, 出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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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333책 (탈초본 17책) 숙종 15년(1689) 2월 16일 갑인(甲寅) 4/10 기사



『승정원일기』 333책 (탈초본 17책) 숙종 15년(1689) 2월 27일 을축(乙丑) 7/7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晝講에 沈梓가 입시하여 廣州 軍兵의 春操를 변통하는 문제, 元子 胎峰의 禁標 안에 있는 廬舍와 田畓에 대해 給代하거나 給價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함》

晝講入侍時, 知事沈梓所啓, 廣州軍兵春操, 今當爲之, 而新舊留守交遞之際, 自爾遷延, 勢將設行於來月, 農節已迫, 民事可慮, 合有變通之道矣。

上曰, 令廟堂稟處, 可也。

備局謄錄入侍事[時], 知事沈梓所啓, 今此元子胎峰禁標內, 廬舍則已令撤毁, 田畓則當爲入陳, 似當分付該曹, 或給代或給價, 俾無稱冤之端矣。

上曰, 分付該曹, 或換給或給價,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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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333책 (탈초본 17책) 숙종 15년(1689) 2월 27일 을축(乙丑) 7/7 기사



『승정원일기』 620책 (탈초본 33책) 영조 2년(1726) 7월 8일 무술(戊戌) 24/3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忠州에 있는 景宗 胎峯의 石物을 加封하는 일을 이번 가을에 거행할 것인지를 묻는 禮曹의 계》

羅學川, 以禮曹意啓曰, 上年九月初五日, 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因大臣陳達, 忠淸道忠州地景宗大王胎峯石物加封之役, 當爲擧行, 而年事凶歉, 待明秋爲之事定奪矣。今年湖西年事, 亦不免凶歉, 似難動役, 而旣有今秋擧行之敎, 仍爲擧行乎? 敢稟。

傳曰, 日後登對時更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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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620책 (탈초본 33책) 영조 2년(1726) 7월 8일 무술(戊戌) 24/33 기사



『승정원일기』 621책 (탈초본 33책) 영조 2년(1726) 7월 16일 병오(丙午) 30/3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入診에 閔鎭遠 등이 입시하여 大殿 등의 건강 문제, 宗親府 書吏 등을 加出하는 문제, 金榦의 병세가 위중한 문제, 洪聖龍의 일에 대한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함》

丙午七月十六日辰時, 上御進修堂。

… (중략) … 致中曰, 景宗大王胎峯加封事, 連以凶歉, 尙未擧行矣。頃者禮曹草記, 以今秋擧行之意, 啓稟, 而以日後登對時, 更稟爲敎。臣與領府事相議, 則以爲玆事至重, 先大臣[先大王]卽位之後, 宜卽擧行, 而三年已迫, 尙爾遷就, 極爲未安云矣。胎峯在於忠州地, 而忠州今年年事, 似免凶歉云。且胎峯石物, 不過一裳石一表石, 爲役亦似不鉅, 以秋間擧行, 實合事宜矣。

上曰, 已與領府事相議耶?

鎭遠曰, 臣方帶繕工提調, 係是職掌故, 欲爲陳達而未果矣。此事昨年春, 臣待罪禮曹判書時, 以待秋擧行之意, 仰達, 及至秋成, 臣又爲陳達, 以年凶, 退行明秋定奪矣。今年湖西年事, 姑未知前頭之如何, 而以卽今論之, 忠州庶可免凶云, 今秋擧行, 似好矣。先大王卽阼之後, 宜卽擧行, 而三年將畢, 尙此遷就, 事極未安。固當及時擧行, 而必須預爲稟定, 然後京外多有擧行之事矣。

上曰, 胎峯, 例於卽位後加封, 而大行朝, 以湖西之連値凶歉, 難於動役, 而不卽擧行矣。予亦仰體先朝之盛意, 尙未擧行, 而三年倏迫, 予心之不安, 當如何耶? 今秋則不可不擧行, 而兩大臣之意, 亦如此, 依所達爲之,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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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621책 (탈초본 33책) 영조 2년(1726) 7월 16일 병오(丙午) 30/30 기사



『승정원일기』 621책 (탈초본 33책) 영조 2년(1726) 7월 19일 기유(己酉) 13/18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觀象監 提調 등이 忠州에 내려가 景宗 胎室의 石物 加封을 董役하게 할 것을 청하는 禮曹의 계》

羅學川, 以禮曹言啓曰, 今七月十六日, 藥房入診, 左議政洪致中同爲入侍時, 因大臣陳達, 忠淸道忠州地景宗大王胎室石物加封之役, 以今秋擧行事, 命下矣。胎室石物加封時, 依前例觀象監官員及繕工監監役官名一員, 令本監擇定, 前期下去本道, 眼同看役, 觀象監官員下去時, 告由祭香祝, 仍爲受去設行公, 觀象監及繕工監提調, 則石物排設, 臨時下去董役事, 分付本道及該監,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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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621책 (탈초본 33책) 영조 2년(1726) 7월 19일 기유(己酉) 13/18 기사



『승정원일기』 623책 (탈초본 34책) 영조 2년(1726) 9월 25일 갑인(甲寅) 36/35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晝講에 沈宅賢 등이 입시하여 孟子를 進講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고 지조를 지킨 權忭의 贈職과 賜諡, 胎室을 加封할 때 손상을 입은 田畓의 보상, 景宗 胎室의 禁標를 설치하는 문제, 金相奭의 牌招 등에 대해 논의함》

午時, 上御時敏堂。晝講入侍時, 知事沈宅賢, 特進官李裕民, 參贊官趙命臣, 檢討官金龍慶, 假注書安相徽, 記事官李潝·閔亨洙, 宗臣琅瑅都正燂, 武臣行副護軍韓聖欽。

… (중략) … 宅賢曰, 臣以胎室加封事, 往于忠州, 纔已完役上來矣, 胎室石物, 浮出於十餘里地, 曳運之時, 所經道傍田畓, 多致損傷, 今年年事, 可謂稍稔, 而獨此被傷田畓, 誠爲可惜。似有民人稱冤之端, 不可無軫恤之道, 令本道摘奸, 或給價, 或蠲役, 以重民情, 何如?

上曰, 所達之言, 好矣。分付道臣, 摘奸後, 參以道臣之見, 依所達給價·蠲役間, 參量處分, 可也。

宅賢曰, 胎室加封之後, 則禁標加定百步, 自是法例, 民田之入於禁標者, 自該曹, 例有給價之事云, 而民家之入於定界內者, 當爲撤毁, 守直軍八名內, 數三家, 亦在於毁出之中, 守直軍, 則必在胎室近處, 然後可專守護之道, 守直軍家, 則勿令毁出, 使之仍居, 似宜矣。

上曰, 依爲之。胎峯之初定禁標者, 幾步耶?

宅賢曰, 初定禁標者, 二百步, 而加封後, 退定一百步, 合爲三百步矣。

上曰, 予欲下敎而未及爲之矣。大行朝胎室, 事體重大, 加封後禁標, 旣已依例爲之, 而此後淸州胎室加封之時, 則不爲退定禁標, 只以當初所封之地, 定標事, 該曹知悉擧行, 可也。

宅賢曰, 忠州胎峯, 初以元子胎峯定標, 故爲二百步, 而淸州胎峯, 則步數似不及此, 聖上, 雖以恤民之盛意, 憫其民田之多入, 有此下敎, 而禁標不廣, 則亦慮有樵牧近逼之患, 事體所在, 豈可只以前定禁標, 仍爲定界乎?

上曰, 在禮官之道, 所達當然, 而亦非強請之事也。予若不墜先烈, 則雖不廣定禁標, 何患乎樵牧之近逼乎? 依前下敎擧行,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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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623책 (탈초본 34책) 영조 2년(1726) 9월 25일 갑인(甲寅) 36/35 기사



『승정원일기』 624책 (탈초본 34책) 영조 2년(1726) 10월 1일 기미(己未) 10/11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景宗大王의 胎室을 封築할 때 익사한 사람등에게 恤典을 거행할 것, 胎室 封築 때 손상을 입은 民田을 영구히 災頉로 할 것, 田米皮粟을 다른 곡물로 징수할 것 등을 청하는 閔鎭遠의 차자》

領府事閔鎭遠箚曰, 伏以, 臣伏聞自前大臣出外而歸, 則輒以沿路聞見, 有所陳聞, 臣今自鄕新歸, 敢依古事, 略以聞見數條, 列錄于下, 乞下廟堂, 商確稟處焉。

一, 今番景宗大王胎室封築之役, 適當無前水災, 赴役軍人, 無論僧俗, 或溺死, 或壓死者, 不止一二, 聞來殊甚驚慘。宜令本道, 各別詳査, 一一施以恤典, 以示愍惻之意矣。

一, 浮石所, 在於兩處, 一爲二十里, 一爲十里, 曳石之際, 所經民田, 多被傷破, 未收穀物, 見失者甚多, 而此則伏聞已因筵臣陳達, 有所變通, 誠爲事幸, 但浮石於民田中, 以許多石物浮出之際, 穿鑿傷毁, 決無以復事耕作, 田主, 以此呼冤云。今此浮石之田, 永許災頉, 俾無白地徵稅之弊, 恐宜矣。

一, 胎室四面定界之規, 潛邸時則以二百步爲限, 加封後則以三百步爲限, 胎室之前二百步許, 有川水, 曾前則以川水爲限矣。今番加封後, 又以川水外百步退限, 故民田多入於其中, 擧皆失業呼冤。臣意, 則川水旣是天作之限, 此一面則雖不滿三百步, 因前以川水爲限, 如以步數之縮, 爲未安, 則令本道, 所入民田, 成冊折價, 牒報一一給準價, 恐宜矣。

一, 石役時, 許多工匠供饋之事, 自監營, 分定列邑, 而潦水所阻, 列邑, 未能及期來供, 以致工匠輩, 頻有阻飢之患, 事多狼狽。其來供者, 許多需用之物, 人負馬載, 遠地搬運, 所供盤床, 殆至百數, 其弊極爲不貲。今後大役時, 工匠料米及饌價, 以地方官儲置米, 計減上下, 自該邑, 定給炊飯人, 則工匠, 無阻飢之患, 列邑, 無轉輸之弊。以此定式施行, 恐宜矣。

一, 大抵曳石之役, 害稼最酷, 今後, 如非萬分時急, 則公私曳石之役, 多擧於秋收前事, 定式施行, 恐宜矣。一, 今年農形, 初有大稔之望, 自經八月, 極備之災, 大失所料, 而猶不可謂凶歉, 但山峽諸邑, 田多畓少之處, 被災最酷, 黍稷不能成實, 山耕火田, 全無所收。民間方在遑遑中, 旱田給災, 朝家有難開路, 而糶穀中, 田米皮粟, 若許以他穀, 依折定代捧, 則猶可爲一分之惠矣。

一, 大臣之行, 監司陪行者, 非爲榮其人也, 蓋所以存事體也。臣之今行, 忠淸監司洪龍祚, 稱病, 以陰城縣監鄭惟一, 差定假都事, 使之陪行, 則惟一, 馳報臣行, 謂有親病, 終不陪行, 如臣無似, 固不敢以大臣自處, 而竊恐朝家待大臣之體貌, 自臣而墜壞無餘, 恐不可無責罰之擧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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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624책 (탈초본 34책) 영조 2년(1726) 10월 1일 기미(己未) 10/11 기사



『승정원일기』 624책 (탈초본 34책) 영조 2년(1726) 10월 14일 임신(壬申) 30/3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入診에 閔鎭遠 등이 입시하여 大殿의 건강 문제, 李時弼이 역모를 받고 致斃한 문제, 李公胤이 臺啓로 定配된 문제, 李道瞻의 兵曹 직임을 탄핵한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함》

丙午十月十四日午時, 上御進修堂, 藥房入診入侍時, 都提調閔鎭遠, 提調申思喆, 副提調鄭亨益, 假注書李壽海, 記事官李潝·閔亨洙, 醫官權聖徵·金德三·玄悌綱·許信·李徵夏·玄起鵬·李震成, 以次進伏。

… (중략) … 鎭遠曰, 景宗大王胎室加封時, 監董堂上以下, 例當書啓, 而以無下敎, 不敢修入書啓, 何以爲之乎?

上曰, 未及下敎矣。依例書啓,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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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624책 (탈초본 34책) 영조 2년(1726) 10월 14일 임신(壬申) 30/30 기사



『승정원일기』 626책 (탈초본 34책) 영조 2년(1726) 11월 9일 정유(丁酉) 13/17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沈宅賢 등에게 半熟馬 1匹 등을 賜給하라는 비망기》

備忘記, 傳于李秉泰曰, 景宗大王胎室石欄干加封時, 繕工監提調判書沈宅賢, 觀象監提調副護軍鄭亨益, 各半熟馬一匹, 書標官副正字柳基緖, 都差使員縣監鄭錫, 各兒馬一匹, 地方官牧使朴致遠, 上弦弓一張賜給, 監役官奉事任敬, 六品遷轉, 敎授金佑夏, 相當職除授, 奏時官李挺華, 上弦弓一張賜給, 員役工匠等, 令該曹本道米布分等磨鍊題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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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626책 (탈초본 34책) 영조 2년(1726) 11월 9일 정유(丁酉) 13/17 기사



『승정원일기』 2273책 (탈초본 114책) 순조 32년(1832) 1월 16일 갑자(甲子) 19/2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洪遠謨, 以觀象監提調意啓曰, 前在胎室修改時, 本監官員一員, 臨時下送, 監役·傳香·奏時, 仍令兼行矣。 今此景宗大王胎室修改敎是時, 亦依已例磨鍊之意, 敢啓。

傳曰, 知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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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2273책 (탈초본 114책) 순조 32년(1832) 1월 16일 갑자(甲子) 19/23



지식 관계망[편집]

태실 지식 관계망[편집]


시각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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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편집]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편집]

1.고문헌

  • 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3.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편집]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