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출판사의 등장. 우리나라의 근대 출판은 1883년 정부에서 신문이나 도서를 출판하기 위해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하고 신식 연활자와 인쇄기계를 도입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박문국은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1국으로 설치되었는데, 이것으로 보면 당시 근대화정책을 실시하려던 정부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1884년에는 근대적인 민간출판사 광인사가 설립되어 『농정신편(農政新編)』(1885), 『만국정표(萬國政表)』(1885), 『농정촬요(農政撮要)』(1886) 등 계몽도서를 출판하였다. 1885년에는 배재학당 인쇄부가 설치되어 『성경』을 대량으로 출판하였으며, 1888년에 성서출판소가 설립되어 선교에 관한 도서를 출판하였다.1888년∼1910년 사이에는 광문사·박문사·신문관·보성사·휘문관 등의 인쇄소가 있었다. 이들 인쇄소는 대부분 출판도 겸하고 있어서 다양한 출판물을 간행하였다.또 근대적 출판은 신교육이 실시됨으로써 큰 진전을 보였다. 1895년에는 『만국약사(萬國略史)』등의 교과용 도서가 간행되었다. 언론기관에서도 국한문혼용문체를 채용하여 교육의 보편화와 지식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추세의 영향으로 국문의 표기방법과 관련된 문법연구서가 출판되었다. 1907년에는 『혈의 누』·『미국독립사』·『이태리독립사』·『유년필독(幼年必讀)』 등, 1908년에는 『을지문덕』·『애국정신』·『귀의 성』·『금수회의록』 등이 출판되었다. 이 때의 출판자는 정부의 학부와 민간출판사, 교회 계통의 공익출판사와 각종 학회·기관·단체였다. 출판 경향은 계몽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1910년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우리나라의 출판은 1909년 2월에 법률 제6호로 공포된 ‘출판법’의 제재를 받게 되었다. 정치사상에 관한 도서출판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출판계에서는 검열 통과가 용이한 문학도서 출판이 성행하게 되었다.당시 민간출판사로는 신문관·회동서관·광학서포·박문서관·광문회 등이 있었다. 회동서관은 최찬식의 『추월색』, 지석영의 『자전석요(字典釋要)』 등 100여 종을, 신문관은 주시경의 『말의 소리』, 김두봉의 『조선말본』,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등을 출판하였다. 이러한 출판사들은 우리 문화의 보존자·전파자로, 우리 민족의 대변자로서의 계몽적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