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문사(廣文社). 조선 말기 대구에서 설립된 회사. 사장은 김광제(金光濟), 부사장은 서상돈(徐相敦)으로 사내에는 광문사문회(廣文社文會 또는 廣文社會)가 있었다. 1906년 6월부터 대한매일신보 대구 지사의 사무도 맡아서 신문의 구독신청·배부·수금업무를 취급하였다. 1907년 2월 광문사문회는 특별회를 소집하여 명칭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개칭하고 회장에 박해령(朴海齡), 부회장에 사장인 김광제를 추대하였다. 또한 일본 동아동문회(東亞同文會)와 청나라 광학회(廣學會)와의 친목 도모 및 교육의 확장을 꾀하였다.그런데 이 무렵 서상돈·김광제 등 회사 간부들은 1천 3백여만 원이나 되는 국채를 상환하지 못하면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앞의 특별회에서 광문사문회의 개편 문제를 처리한 뒤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제안하였다.참석자들이 모두 동의하자 김광제가 즉시 실현하자고 다시 제의하였다. 참석자들은 그 자리에서 담배를 끊기로 결의하고 국채보상금 2천여 원을 출연하면서 취지를 널리 알리기로 하였다.사장·부사장·대동광문회장·부회장과 회원 장상철(張相轍)·강영주(姜永周)·심정섭(沈廷燮)·김우근(金遇根)·서병오(徐丙五)·윤하선(尹夏璿)·정재덕(鄭在悳)·이종정(李鍾楨)·길영수(吉永洙)·이우열(李遇烈)·강신규(姜信圭)·정규옥(鄭圭鈺)·추교정(秋敎廷)의 명의로, 2천만 동포가 담배를 3개월만 끊으면 국채를 갚을 수 있으니 담배를 끊어 절약한 담배 값을 모아 국채를 상환하자는 내용의 ‘국채보상취지서’를 발표하였다.전국 각지에서 큰 호응이 일어나 국채보상운동은 활발히 전개되었다. 광문사는 국채보상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대한매일신보 대구 지사의 사무를 다른 개인에게 넘겨 주었다. 김광제는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총무로 활동했다.같은 해 5월에는 전국 각지에 분립된 국채보상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회사 내에 조직된 대동광문회와 함께 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였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으나, 동아동문회와의 친목 도모를 표방하였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