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고종 15) ~ 1964년】. 이강(李剛). 독립운동가. 1902년 미주개발회사(美洲開發會社)를 통해 하와이로 이민갔다가 1903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안창호의 권고로 학업을 단념하고 1904년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고, 1905년 기관지 『공립신문(共立新聞)』을 창간해 주필이 되었다. 1907년 신민회 조직에 가담하였다. 몇 달 뒤에 바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신민회 지회를 설립하였다. 1909년 재로대한인국민회(在露大韓人國民會)를 조직하였다. 『해조신문(海潮新聞)』을 창간하여 편집·논설기자로 활동하고, 『대동공보(大東共報)』로 제호를 고친 뒤에 편집책임을 맡았다.1909년 10월 안중근(安重根)이 이토 포살의 특공대로 자원해 하얼빈에 갔을 때 안중근과 대동공보사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의거가 성공한 뒤에는 영국인 변호사를 구하기 위해 북경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1919년 9월 러시아령에서 파견한 강우규(姜宇奎)의 일본총독 사이토[齋藤]에 대한 폭탄 투척 사건이 일어나자 그 연루자로 지목되어 일본의 파견경찰에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1919년 말 석방되자 바로 상해로 탈출해 임시정부에 참여, 의정원(議政院) 의원·부의장·의장을 역임하였고 흥사단 운동에도 참가해 흥사단 원동지방위원회(遠東地方委員會)를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