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신문(近代新聞).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은 1883년에 설치된 박문국에서 10월 30일에 창간한 한성순보(漢城旬報)다. 활자와 인쇄기 등은 일본에서 들여와 정부에서 발행한 것이다. 순한문을 사용한 일종의 관보였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박문국 시설이 파괴되어, 발행 1년만에 폐간되고 말았다. 한성순보의 뒤를 이어서 1886년 1월 25일에는 최초의 주간신문인 한성주보(漢城週報)가 창간되었다.
이렇게 관변 신문이 먼저 창간되고, 1896년 4월 7일,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개화파 서재필의 주도로 독립신문(獨立新聞)이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창간되었다. 보도기사보다 논설에 비중을 둔 독립신문은 근대화와 민족주의 고취 등 계몽적 성격이 강한 민족신문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애국계몽 성격의 민간신문이 이후 계속해서 창간되었으니, 1898년 한국 최초의 일간신문인 매일신문, 대한황성신문, 제국신문 등이 그것이다. 대한황성신문은 후에 황성신문으로 개명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후 일제의 한국 침략야욕이 노골화되자, 언론은 이에 맞서 항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904년 7월 16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창간되어 강경한 반일 논조를 펴나갔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썼으며, 대한매일신보 등의 신문은 일제히 일본을 비난했다. 1906년 창간한 만세보(萬歲報}는 이인직의 '혈의 누'를 연재하여 신문소설의 효시를 이루었다. 일제는 이러한 반일민족지에 대한 대응으로 대한일보(大韓日報)·대동신문(大東新聞)·동양신문 등을 발행했다. 일진회가 창간한 대한신보(大韓新報),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격인 대한신문(大韓新聞)도 친일매국신문이었다.
일제는 민족지를 탄압할 목적으로 1907년 7월에 '신문지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제국신문·만세보 등은 일제의 침략정책을 줄기차게 공격했으며, 민족의 자립과 단결을 호소하는 등 민족신문으로서의 언론활동에 최선을 다했다. 특히 대한매일신보는 통감부정책을 격렬하게 비판하여 양기탁이 구속되는 등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갖은 압력과 박해 속에서도 꿋꿋이 존속하던 민간신문은 1910년 한일합병으로 모두 폐간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