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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__NOTOC__ ==Definition== ‘근정(勤政)’은 ‘정치를 부지런히 함’을 의미한다. 정도전이 ‘치세가 이루어지려면 정사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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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勤政)’은 ‘정치를 부지런히 함’을 의미한다. 정도전이 ‘치세가 이루어지려면 정사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는 뜻을 여러 경전의 표현을 빌려 작명하였다. 정도전이 임금에게 올린 ‘근정(勤政)’의 뜻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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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덕수궁(德壽宮)]]은 본디 조선 시대 [[성종|성종(成宗, 1457~1494)]]의 형인 월산대군|월산대군(月山大君 李婷, 1454~1489)]]의 집이 있었던 곳이나, [[선조|선조(宣祖, 1552~1608)]]가 [[임진왜란]]으로 피난을 갔다 서울로 돌아왔을 때 대부분의 궁궐이 불에 타 이 곳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정릉동 행궁(貞陵洞行宮)'<ref>행궁(行宮)은 임금이 추위나 더위를 피해서, 혹은 나들이나 요양 등으로 왕궁을 떠나 있을 때 머물던 별도의 궁궐이다. 경치가 좋은 곳에 짓기도했고, 통치력을 과시하고자 지방 요지에 지어 돌아가며 머물기도 했다. 이궁(離宮)이라고도 한다.</ref> 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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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광해군(光海君, 1575~1641)]]은 이 곳 즉조당(卽阼堂)에서 즉위했고, 1611년 이 곳을 행궁에서 궁궐로 높이며 [[경운궁|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호(宮號)를 붙여 주었으나 1618년 [[창덕궁]]을 완공하면서 그 곳으로 완전히 옮겨 갔다. 한편 광해군은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를 이 곳에 유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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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인조|인조(仁祖, 1595~1649)]]역시 이 곳 [[즉조당]]에서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 후 270여 년동안 이 곳은 궁궐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왕실에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영조]]가 선조의 환도(還都) 삼주갑(三周甲)<ref>환도(還都)삼주갑(三周甲)은 임진왜란으로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도성으로 돌아온 1593년 이후 60년이 세 번 지난 해, 1773년을 뜻한다.</ref> 을 맞아 배례를 행한 일이 있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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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이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고종|고종(高宗, 1852~1919)]] 때다. 덕수궁은 고종재위 말년에 약 10년 동안 정치적 혼란의 주 무대였다. 고종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그 이듬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했다가, 1897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때를 전후해 궁내에 많은 건물을 지었고, 그제서야 덕수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었다. 이 때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과 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등이 세워졌으며, [[정광헌|정관헌(靜觀軒)]]·[[돈덕전|돈덕전(惇德殿)]] 등 서양식 건물도 일부 들어섰다. 고종이 경운궁에 머무르고 있던 1904년에 궁에 큰 불이 나 전각의 대부분이 타 버렸으나, 곧 복구에 착수하여 이듬 해인 1905년 [[즉조당|즉조당(卽棲堂)]]·[[석어당|석어당(昔御堂)]]·[[경효전|경효전(景孝殿)]]·[[준명전|준명전(浚明殿)]]·[[흠문각|흠문각(欽文閣)]]·[[함녕전|함녕전(咸寧殿)]] 등을 중건하고, [[중화문|중화문(中和門)]]·조원문(朝元門) 등을 세웠다. 1906년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을 완성하고 대안문(大安門)도 수리했는데, 이 문은 그 때부터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바꾸고 궁의 정문으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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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고종은 제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주고, 새로 즉위한 순종(純宗, 1874~1926)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은 계속 경운궁에 머물렀는데, 이 때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고, 1910년에는 궁내에 서양식 대규모 석조 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을 세웠다.
  
“[[근정전]]과 [[근정문|근정문(勤政門)]]에 대하여 말하자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한데 하물며 정사처럼 큰 일이야 어떻겠습니까? 『서경』에 말하기를, ‘경계하면 근심이 없고 법도를 잃지 않는다.’고 하였고, 또 ‘안일과 욕심으로 제후들을 가르치지 말고 삼가고 두려워하십시오. 하루이틀 사이에 일만 가지 기틀이 생긴깁니다. 여러 관원들의 직책을 폐하지 마십시오. 하늘의 일을 사람들이 대신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순 임금과 우 임금의 부지런한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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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德壽)’는 ‘덕이 높고 오래 산다’는 뜻이다. 중국 송(宋)나라 때도 덕수궁이라는 이름의 궁정이 있었으며, 조선 2대 임금 정종(定宗, 1357~1419)이 태상왕이던 태조(太祖, 1335~1408) 이성계를 위해 개성에 지은 궁궐의 이름도 덕수궁이었다.
  
또 말하기를, ‘아침부터 해가 중천에 뜰 때와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 먹을 겨를도 없이 만백성을 다 즐겁게 하셨다.’고 하였으니, 이는 문왕(文王)의 부지런한 바입니다. 임금의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합니다. 그러나 편안하게 봉양 받기를 오래 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기 마련입니다. 또 아첨하고 아양 떠는 사람이 있어서 말하기를, ‘천하와 국가의 일로 임금의 정력을 소모하고 수명을 손상시킬 까닭이 없습니다.’ 하기도 하고, 또 말하기를,‘이미 높은 자리에 있어서 어찌 스스로를 낮추어 노고를 하십니까?’ 하기도 합니다. 이에 혹은 여악(女樂)으로, 혹은 사냥으로, 혹은 구경거리로, 혹은 토목(土木)일 같은 것으로써 무릇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일을 말하지 않음이 없으니,임금은 이것이 자신을 사랑함이 두텁다고 여겨, 자연히 태만해지고 거칠어지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니, 한(漢)^당(唐)의 임금들이 예전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 때만 못하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임금으로서 하루라도 부지런하지 않고 되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의 부지런한 것만 알고 그 부지런할 바를 알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한 것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세밀한 데에만 흘러서 볼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구하는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 데에 빨리 한다.’ 했습니다. 신은 이로써 이름짓기를 청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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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은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이흥민|이흥민(李興敏)]]이 썼다. 이흥민은 철종(哲宗, 재위 1849~1863년) 때에 성균관 대사성까지 지냈고 고종대에도 도승지 등 높은 관직에 있었던 문신이다.‘근(勤)’ 자는 왼쪽 변의 아래 쪽에 가로획이 하나 생략되어 있는데, 서체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ref>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1』, 문화재청, 2007, 54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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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문화재청, "[http://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newsItemId=155430816&sectionId=ocp&pageIndex=1&pageUnit=10&strWhere=title&strValue=%ec%98%81%ec%b6%94%eb%ac%b8&sdate=&edate=&category=&mn=NS_01_02 궁궐의 현판과 주련-경복궁_근정전, 근정문, 월화문, 일화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재청』<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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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3』, 문화재청, 2007, 22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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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문화재청, [http://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newsItemId=155696345&sectionId=ocp&pageIndex=1&strWhere=title&strValue=%eb%8d%95%ec%88%98%ea%b6%81&mn=NS_01_02 궁궐의 현판과 주련-덕수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재청』<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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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 위키 실록사전 || 근정전(勤政殿) ||  ||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근정전(勤政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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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경복궁근정전(景福宮勤政殿)) ||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2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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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료 || 조선왕조실록  || 태조 4년 10월 7일  || ||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410007_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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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 조선왕조실록사전 || 근정전(勤政殿) ||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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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동양고전종합DB || 서경집전(상):虞書:大禹謨 || 儆戒無虞 || http://db.cyberseodang.or.kr/front/alphaList/BookMain.do?bnCode=jti_1b0201&titleId=C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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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동양고전종합DB || 상서정의(2):虞書:皐陶謨  ||  || http://db.cyberseodang.or.kr/front/alphaList/BookMain.do?bnCode=jti_1b0102&titleId=C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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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동양고전종합DB || 서경집전(하):周書:無逸 ||不遑暇食  || http://db.cyberseodang.or.kr/front/alphaList/BookMain.do?bnCode=jti_1b0202&titleId=C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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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동양고전종합DB  || ||勤政 검색건 || http://db.cyberseodang.or.kr/front/search/index.do?srchCondition=A&SearchSelectKeyword=&srchKeyword=%E5%8B%A4%E6%94%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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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書經:虞書:大禹謨|| 儆戒無虞,罔失法度 || https://ctext.org/shang-shu/zh?searchu=%E5%84%86%E6%88%92%E7%84%A1%E8%99%9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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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書經:虞書:皋陶謨|| 兢兢業業 || https://ctext.org/shang-shu/zh?searchu=%E5%85%A2%E5%85%A2%E6%A5%AD%E6%A5%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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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書經:周書:無逸|| 不遑暇食 || https://ctext.org/shang-shu/zh?searchu=%E4%B8%8D%E9%81%91%E6%9A%87%E9%A3%9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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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0일 (토) 09:05 기준 최신판

Definition

덕수궁(德壽宮)은 본디 조선 시대 성종(成宗, 1457~1494)의 형인 월산대군|월산대군(月山大君 李婷, 1454~1489)]]의 집이 있었던 곳이나, 선조(宣祖, 1552~1608)임진왜란으로 피난을 갔다 서울로 돌아왔을 때 대부분의 궁궐이 불에 타 이 곳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정릉동 행궁(貞陵洞行宮)'[1] 이라 불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은 이 곳 즉조당(卽阼堂)에서 즉위했고, 1611년 이 곳을 행궁에서 궁궐로 높이며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호(宮號)를 붙여 주었으나 1618년 창덕궁을 완공하면서 그 곳으로 완전히 옮겨 갔다. 한편 광해군은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를 이 곳에 유폐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인조(仁祖, 1595~1649)역시 이 곳 즉조당에서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 후 270여 년동안 이 곳은 궁궐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왕실에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영조가 선조의 환도(還都) 삼주갑(三周甲)[2] 을 맞아 배례를 행한 일이 있는 정도였다. 덕수궁이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고종(高宗, 1852~1919) 때다. 덕수궁은 고종재위 말년에 약 10년 동안 정치적 혼란의 주 무대였다. 고종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그 이듬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했다가, 1897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때를 전후해 궁내에 많은 건물을 지었고, 그제서야 덕수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었다. 이 때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과 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등이 세워졌으며, 정관헌(靜觀軒)·돈덕전(惇德殿) 등 서양식 건물도 일부 들어섰다. 고종이 경운궁에 머무르고 있던 1904년에 궁에 큰 불이 나 전각의 대부분이 타 버렸으나, 곧 복구에 착수하여 이듬 해인 1905년 즉조당(卽棲堂)·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준명전(浚明殿)·흠문각(欽文閣)·함녕전(咸寧殿) 등을 중건하고, 중화문(中和門)·조원문(朝元門) 등을 세웠다. 1906년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을 완성하고 대안문(大安門)도 수리했는데, 이 문은 그 때부터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바꾸고 궁의 정문으로 사용했다. 1907년 고종은 제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주고, 새로 즉위한 순종(純宗, 1874~1926)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은 계속 경운궁에 머물렀는데, 이 때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고, 1910년에는 궁내에 서양식 대규모 석조 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을 세웠다.


‘덕수(德壽)’는 ‘덕이 높고 오래 산다’는 뜻이다. 중국 송(宋)나라 때도 덕수궁이라는 이름의 궁정이 있었으며, 조선 2대 임금 정종(定宗, 1357~1419)이 태상왕이던 태조(太祖, 1335~1408) 이성계를 위해 개성에 지은 궁궐의 이름도 덕수궁이었다.



[3] [4]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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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_현판 Object 물품 현판 현판:德壽宮 덕수궁 현판 懸板:德壽宮 http://dh.aks.ac.kr/hanyang/wiki/index.php/덕수궁_현판

Additional Attributes

  •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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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xtual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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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_현판 덕수궁 isPart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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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월산대군 isRelatedTo
덕수궁 선조 isRelatedTo
덕수궁 임진왜란 isRelatedTo

Spatial Data

Spactial Information N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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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_현판 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 현판 德壽宮 懸板

Spatial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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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l 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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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l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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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ine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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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ype: 해설, 참고, 3D_모델, VR_영상, 도해, 사진, 동영상, 소리, 텍스트

Bibliography

author title publication edition URL

Notes

  1. 행궁(行宮)은 임금이 추위나 더위를 피해서, 혹은 나들이나 요양 등으로 왕궁을 떠나 있을 때 머물던 별도의 궁궐이다. 경치가 좋은 곳에 짓기도했고, 통치력을 과시하고자 지방 요지에 지어 돌아가며 머물기도 했다. 이궁(離宮)이라고도 한다.
  2. 환도(還都)삼주갑(三周甲)은 임진왜란으로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도성으로 돌아온 1593년 이후 60년이 세 번 지난 해, 1773년을 뜻한다.
  3.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3』, 문화재청, 2007, 22쪽.
  4.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덕수궁", 『문화재청』online,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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