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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in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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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군대를 지휘하고 통신하기 위한 도구[形名]에서 유래한 의장물로 둑[纛], 교룡기交龍旗 , 고자기 鼓字旗 , 금자기 金字旗 , 영자기令字旗 , 금金 , 고鼓의 7종이 있다. 둑 [纛] , 교룡기交龍旗  조선 후기부터 의장에 포함되었다. 왕이 가지는 군 지휘권을 통해 절대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의장물이며 왕의 의장(대가, 법가, 소가)에서 가장 선두에 배치되었다. 금과 고는 군의 진퇴를 명령하는 도구였으며, 금자기와 고자기의 이러한 기능을 깃발로 표현한 것이다. 왕의 의장에는 7종의 의장물이 모두 사용되었으며 왕세자의장에는 금, 고, 영자기 3종이 사용되었다. 여성 의장에는 사용되지 않았다.<ref> 국립고궁박물관,『왕실문화도감, 의장』, 2018, 208쪽 </ref>
 
군대를 지휘하고 통신하기 위한 도구[形名]에서 유래한 의장물로 둑[纛], 교룡기交龍旗 , 고자기 鼓字旗 , 금자기 金字旗 , 영자기令字旗 , 금金 , 고鼓의 7종이 있다. 둑 [纛] , 교룡기交龍旗  조선 후기부터 의장에 포함되었다. 왕이 가지는 군 지휘권을 통해 절대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의장물이며 왕의 의장(대가, 법가, 소가)에서 가장 선두에 배치되었다. 금과 고는 군의 진퇴를 명령하는 도구였으며, 금자기와 고자기의 이러한 기능을 깃발로 표현한 것이다. 왕의 의장에는 7종의 의장물이 모두 사용되었으며 왕세자의장에는 금, 고, 영자기 3종이 사용되었다. 여성 의장에는 사용되지 않았다.<ref> 국립고궁박물관,『왕실문화도감, 의장』, 2018, 208쪽 </ref>
  
==1. 노부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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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명의 정의==
[[노부|노부(鹵簿)]]는 ‘鹵簿’라는 용어는 한나라 蔡邕의 문집『獨斷』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채옹은 “천자가 궁성 밖으로 나갈 때 車駕의 차례(次第)”를<ref>蔡邕,『獨斷』卷下, “天子出,车驾次第谓之卤簿.”</ref>  노부라고 했다. 당시 황제들은 궁성 밖으로 나갈 수레를 여러 개 사용했기 때문에, ‘수레의 차례’를 노부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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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形)은 각종 깃발을, 명(名)은 징·북 따위를 말한다. 곧, 군대에서 명령이나 정보를 시각과 청각을 통하여 전달하는 수단이다.
宋代 사람인 葉夢得은 방패로 호위하는 사람을 장부(簿籍)에 기록하였기 때문에‘鹵簿’라고 했다.<ref> 葉夢得,『石林燕語』卷4, 50쪽, “唐人谓卤,櫓也,甲楯之别名. 凡兵卫以甲楯居外为前导,捍蔽其先后,皆著之簿籍,故曰‘卤簿’. 因举 南朝 御史中丞, 建康 令皆有‘卤簿’,为君臣通称,二字别无义,此説为差近差.”</ref>  이런 설명을 종합해보면, 노부는 처음에는 ‘수레의 순서’를 지칭하다 점차 ‘의장물 순서의 기록’ 또는 ‘의장물의 행렬’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용례를 볼 때 노부는 황제가 행차할 때 사용하는 의장물의 행렬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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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명은 중국의 예와 고구려나 신라의 군대 이름에 깃발을 뜻하는 ‘당(幢)’이 쓰였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 고려는 물론 삼국시대에도 군대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조선 전기에는 오위체제(五衛體制)에 의하여 편성된 단위 부대별로 형명이 배정되어 사용되었다.
노부와 관련된 용어로 儀衛가 있다. 의위는 儀仗과 衛仗의 합칭이다. 사전에서는 儀仗은 ‘중국의 천자나 왕공의 위엄과 격식을 갖추기 위해 동원하는 병장기와 儀物’로, 衛仗은 ‘천자를 호위하는 儀仗’으로 정의했다. <ref>諸橋轍次, 2000,『大漢和辭典』1, 東京:大修館書店, 942쪽.</ref> 사전적 정의에서 儀仗은 가장 큰 범주를 가진 단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호위 방법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황제의 위치에 따라 구분되었다. 황제가 궁궐이나 궁성 안에 있을 때 호위하는 것은 儀仗, 궁성이 아닌 곳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것은 衛仗이라고 부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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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에는 천으로 된 기(旗), 기에 술이 달린 휘(麾), 길게 술이 늘어져 ‘치우(蚩尤)의 머리같이 생겼다.’는 둑(纛) 등이 있었다. 대장(大將)을 예로 들면, 왕의 명령에 응하는 대표기(大標旗), 위장(衛將)에게 명령을 내리는 대휘(大麾), 위장을 소집하는 데 쓰는 대초요기(大招搖旗) 등 단위 부대 지휘관마다 깃발로 명령을 내리고 받았다. 이밖에 복병에 사용하는 대사기(大蛇旗), 척후에 쓰는 후기기(候騎旗) 등이 있었다. 둑은 단위부대마다 출정할 제사지내는 것으로서 부대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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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에는 대각(大角)과 소각(小角), 북과 도(), 징·방울 등이 사용되었다. 대장·위장·유군장(遊軍將)·부장(部將)에게 대각·소각이 1, 2개씩 배정되고, 나머지는 단위부대마다 1개씩 배정되었다. 명은 고려말 이성계(李成桂)로부터 쓰기 시작한 소각을 제외하면, 모두 유래가 오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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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형은 어떤 형태의 진(陣)을 갖추고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가를 알리는데 쓰이며, 명은 진격과 퇴각을 알리는 데 쓰는 등 약간의 차이가 있다. 형은 ‘깃발을 휘두르고[揮], 조금 뉘었다 세우고[點], 땅에 대었다 세우고[指]’하는 여러 동작에 따라 명령과 정보를 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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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은 종류에 따라 용도가 달라 소각을 불어 진퇴를 알리고 북과 소각을 함께 사용하여 독전하였다. 크게 고함지르며 적을 몰아칠 때는 도를 울리고, 후퇴할 때에는 징이나 방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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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로 명령을 내리기 전에는 늘 먼저 대각을 불어 군사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며, 진의 형태를 바꾸거나 할 때도 명과 형을 아울러 사용했다. 이러한 형명이 있음으로써 평시에 진법(陣法)을 훈련하고, 전쟁 때 일사불란하게 군대를 지휘할 수 있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8%95%EB%AA%85&ridx=0&tot=5 형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파일:중국 의장 위장 노부의 종류.png]] [표 1] 중국 의장, 위장, 노부의 종류.<ref> 이민기, 2016, 「고려시대 노부의 구조와 의미」. 한신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4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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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형명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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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는 속오법(束伍法)에 의하여 소부대 단위로 군사 편제가 이루어지고 형명의 용도가 세분되어 종류가 많아졌다. 그러나 진법의 내용이 조선 전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아 형명의 기본 짜임새는 대체로 같다.
역사적으로 노부제도가 정비된 시기는 唐代이다.『新唐書』儀衛志 에서는 천자가 ‘머무를 때(居)’와 ‘움직일 때(行)’를 구분하여 호위한다고 명시하고, <ref>『新唐書』卷23 志13 儀衛 上. “唐制,天子居曰衙,行曰驾,皆有卫有严。羽葆、华盖、旌旗、罕毕、车马之众盛矣,皆安徐而不哗.”</ref> 머무를 때의 경호방법을 다섯 가지의 衛仗으로, 천자가 이동할 때의 경호방법을 세 가지의 鹵簿로 설명했다. 또한 儀仗은 위장이나 노부에 소요되는 병장기와 동원되는 병사를 의미했다.<ref>『新唐書』卷23 志13 儀衛 上.</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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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의 경우 조선 전기에는 왕명을 내리는 깃발로 교룡기(蛟龍旗)뿐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다섯 가지로 늘었다. 중앙군은 국왕을 호위하는 무예청(武藝廳)·용호영(龍虎營)·별초(別抄)·난후별대(攔後別隊) 등을 지휘하기 위한 깃발이 각각 2∼8종씩 있었다. 5군영 또한 군영마다 대장에서 중군(中軍) 이하 각급 지휘관이 용도에 따라 인기(認旗)·수기(手旗)·영기(令旗) 등을 사용하였다.
호위로서의 의장과 위장을 명확히 구분한 것은 宋에 이르러서였다. 송에서는 천자의 호위 방법을 머무를 때와 出行할 때로 나누고, 전자를 ‘文仗’이라고 해서 이것을 ‘儀’ 라고 규정했으며, 후자를 ‘武仗’이라고 하며 이것을‘衛’라고 규정했다. 儀仗은 朝會之儀, 衛仗은 궁성과 황성 내에서 황제 이동 시 호위방법이었다.<ref>『宋史』卷143 志第97 “儀衛车驾行幸,非郊庙大礼具陈卤薄外,其常日导从,惟前有驾头,後拥伞扇而已,殊無禮典所载公卿奉引之盛. 其侍从及百司官属, 下至厮役, 皆杂行道中.”</ref> 송은 의장을 문신들의 호위[文仗]로, 위장을 무신들의 호위[武仗]로 구분한 점이 특징이다.<ref>『宋史』卷143 志第96 儀衛, “綦天下之貴, 一人而已是. 故環拱而居, 備物而動, 文謂之儀, 武謂之衛.”</ref>  노부는 대가와 법가․소가노부와 黃麾仗의 네 가지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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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과학기술의 발달로 화포가 전보다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되어 명에 화포가 들어가게 된 것이 조선 전기와는 크게 다른 점이다. 특히, 호포(號砲)각종 명령을 내리고 정보를 알리는 데 광범하게 사용되었다.
遼의 의위와 노부는 國仗․渤海仗․漢仗․鹵簿儀仗으로 구성되었다. 國仗은 거란족의 영역에서,<ref>『遼史』卷58 志第27 儀衛志 4, 國杖 연대기 기록 참조.</ref> 거란의 국장은 거란 고유의 제사이던 帝山儀를 진행할때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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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세종 때 전래된 나팔(喇叭)주 02)이 명에 포함되어 큰 구실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대각과 북의 구실이 많이 줄어들었다. 이 시기 취타(吹打)를 위한 악기들이 추가된 것도 두드러진 변화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8%95%EB%AA%85&ridx=0&tot=5 형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渤海仗은 遼陽府를 비롯한 옛 발해의 영역에서,<ref>『遼史』卷58 志第27 儀衛志 4, 渤海仗.</ref> 구체적 규모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연대기 기록만 있다. 이 연대기 기록에 의하면 건형 5년(983)에 성종이 동쪽으로 순행했을 때 東京(遼陽)留守가 의위를 갖추어 거가를 맞이했다는 기록을 통해서 일종의 발해의 의장을 수용했던 흔적으로 보인다.
 
漢仗은 한족의 영역에서 요의 황제가 들어갈 때<ref>『遼史』卷58 志第27 儀衛志 4, 漢仗.</ref> 앞의 두 기록과 마찬가지로, 연대기만 기록되었다. 요 태종이 大同 원년(947) 정월 宋 汴京으로 들어갔을 때 사용한 내용을 시작으로, 요의 황제가 한족의 영역에 출입하는 일이 있으면 한장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거란에서는 의장과 위장의 차이는 없었다. 이는 거란 특유의 통치체제 및 捺鉢의 巡御 때문이다. 거란 황제는 사계절 내내 행궁인 날발에 거주했다. 머무를 경우에만 거란식인 국장과 발해식인 渤海仗 및 한족식인 漢仗을 별도로 사용했다. 이동할 때에는 노부의장을 사용했다.
 
金에서는 황제의 호위방법을 宮城을 기준으로 立仗과 行仗으로 나누었다.<ref>『金史』卷41 志第22 儀衛(上); 같은 책 卷42 志第23 儀衛(下).</ref>
 
입장은 다시 殿庭內仗과 殿庭外仗으로 나누어 大禮나 大朝會때 사용했다. 행장은 法駕․大駕․黃麾仗으로 나누어 郊廟나 社稷壇에 제사지낼 때 사용했다. 금의 호위방식은 앞에서 언급한 여러 왕조들의 사례는 다음 [표 2]와 같이 종합할 수 있다. 
 
 
 
[[파일:노부 관련 용어의 정의.png]] [표 2] 노부 관련 용어의 정의.<ref> 이민기, 2016, 「고려시대 노부의 구조와 의미」. 한신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5쪽.</ref>
 
 
 
중국에서도 호위방법을 의장․위장․노부로 구분하였다. 의장은 ①황제의 경호에 필요한 의장물과 그 군대를 이르거나, ②황제가 朝庭의 朝會 또는 文臣들이 참가하는 의례에 참가할 때 사용하는 경호방법과 그 군대, 또는 ③皇帝가 宮城에 머무를 때 사용하는 경호방법을 이르는 말이었다. 
 
위장은 ①皇帝가 宮城에서 皇城으로 이동할 때 사용하는 경호방법과 그 군대, ②皇帝가 황성 바깥으로 이동할 때 군사력을 사용하여 경호하는 방법과 그 군대, ③皇帝가 皇城에서 머무를 때 군사력을 사용하여 경호하는 방법과 그 군대를 의미했다. 
 
노부는 ①皇帝를 皇城이나 皇城 밖에서 의장물을 사용하여 호위하는 방법, 또는 ②의장물의 구체적인 배열 기록을 의미했다.
 
 
 
==2. 고려시대 노부==
 
『고려사』여복지에는 儀衛 7가지, 鹵簿 6가지가 기록되어 있다. 7가지의 의위 가운데 황성 안에서 진행되는 朝會儀仗과 宣赦儀仗은 ‘儀仗’으로, 황성이 아닌 장소에서 진행되는 法駕衛仗과 燃燈衛仗, 八關衛仗, 西南京巡幸衛仗, 西南京巡幸回駕奉迎衛仗은 ‘衛仗’이라고 구분했다.
 
노부 가운데 王太子鹵簿와 高宗 8년의 宣赦鹵簿를 제외한 나머지 노부는 의종 때 제정되었다.<ref>『高麗史』志 26, 輿服, 鹵簿, 法駕鹵簿, “毅宗朝, 詳定."</ref> 儀典을 재정비하여『詳定古今禮』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노부 또한 정리대상에 포함된 것이다.<ref>金澈雄, 2003,「『詳定古今禮』의 편찬시기와 내용」,『東洋學』 33, 234~237쪽.</ref>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제정된 고려의 노부들은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鹵簿는 황성에 위치한 의례장소(毬庭)나 황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에 사용했으며, 그 목적은 국왕의 권력을 장엄하고 위엄있게 보이는 데 있었다. 노부의 형식은 본래 중국에서 사용되던 대가-법가-소가의 형식 가운데 법가와 소가만 차용하였다. 노부 가운데 가장 장엄하고 위상이 높은 것은 법가노부였다. 국가에서 중요하게 여긴 의례를 반영하여 法駕와 小駕사이에 上元煙燈奉恩寺眞殿親幸鹵簿․仲冬八關會出御看樂殿鹵簿․西南京巡幸還闕奉迎鹵簿․宣赦鹵簿를 포함시켰다. 법가노부는 원구와 태묘에서 의례를 행할 때, 上元燃燈奉恩寺眞殿親幸鹵簿는 燃燈會, 仲冬八關會出御看樂殿鹵簿는 八關會, 西·南京巡幸還闕奉迎鹵簿는 서경과 남경으로 巡幸할 때, 宣赦鹵簿는 赦免令을 반포할 때 사용했다. 여복지의 기록 순서는 중요도에 따른 것이며, 이를 통해 고려의 노부가 의례에 따라서 달리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고려의 의위는 의장과 위장을 통칭하는 말이며, 의장은 구정에서 의례를 할 때, 위장은 원구나 태묘, 봉은사 등 궁성이 아닌 장소에서 의례를 할 때 군대를 동원하여 국왕을 호위하는 방법을 의미했다. 국왕의 경호 방법을 병력의 사용 여부 및 경호하는 장소에 따라 기준을 달리 설정하여 적용한 것이다. 노부는 기와 의장용 병장기, 악기 등을 동원하여 국왕의 위엄을 표현하는 행렬을 의미했다. 노부는 의례의 성격에 따라서 달리 사용되었다.
 
 
 
==3. 조선시대 노부==
 
조선 초기에 태조가 즉위교서에서 의장법제(儀章法制)는 고려의 고사(古事)에 의거한다고 하였으므로 노부도 고려의 것을 답습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조선시대 노부는 국왕, 왕비, 세자, 세자빈 등 지위와 서열에 따라 노부의 종류와 배열이 정해졌다. 또한 조선이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제후국의 의장을 사용하였으므로 노부의 구성도 그에 준해 황제국에서만 사용하던 황기린기(黃麒麟旗), 백상기(白象旗) 등은 제외되었고, 군왕만세기(君王萬歲旗)는 군왕천세기로 변경되었다. 이후 오례(五禮)의 체제로 정비된 노부 구성 의장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유지되었다. 예컨대, 대가노부 앞면의 수정장(水精杖)과 금월부(金鉞斧), 뒷면의 산선(繖扇), 전후좌우의 사신기 깃발 등은 그 위치가 그대로 이어졌다.
 
 
 
그런데 군사제도의 변화에 따라 노부의 운영이 변경되기도 하였다. 문종대인 1451년(문종 1) 김종서(金宗瑞) 등이 만든 『신진법』과 세조가 만든 『진법』의 체제에 맞추어 노부의 배열과 운영이 변화되었다. 이들 군제는 형명(形名)과 분수(分數)를 정비한다는 취지하에 오위진법 체제로 운영되었다. 이때 크고 작은 깃발과각(角), 금고(金鼓) 등을 이용하여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노부 대열도 이를 준용하여 움직였다.
 
 
 
조선시대 노부의 관리와 운영은 병조 승여사(乘輿司)에서 담당하였다. 노부에 사용된 의장 물품은 160여 가지나 있었다. 길의장에 속하는 것으로는 각종 기치류(旗幟類)·무기류·산류(傘類)·부채류·당류(幢類)·장도류(粧刀類)·악기류 등이 있었다. 흉의장에는 삽(翣)·우보(羽葆))·만장·방상시(方相氏 : 악귀를 쫓는 연극을 할 때 이를 막아 내는 신) 등이 있었는데, 흉례 때에만 사용되었다. 황의장과 홍의장은 대중국 관계의 의식에서만 특별히 사용된 것으로 각기 황제와 황태자의 격식에 따라 운용되었다.
 
대가노부는 종묘와 사직의 제사, 행차시에, 법가노부는 문소전(文昭殿)·선농단(先農壇)·문선왕(文宣王)의 제사·열병(閱兵) 및 무과 전시(殿試) 참관시에, 소가노부는 능행(陵行)이나 기타 출타시에 사용되었다. 이들은 각기 궁정 의장의 대장·반장·소장에 해당하였다. 이상의 각급 노부에는 동원되는 병력과 취타대(吹打隊) 및 기타 인원수와 그들의 임무도 규정되어 있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9%B9%B5%E7%B0%BF&ridx=0&tot=32) 노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이와 함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도입된 개인 화기인 조총과 명나라척계광(戚繼光)의 절강병법(浙江兵法)에 따라 노부 운영은 다시 변화 과정을 거친다. 진법이 기마병(騎馬兵) 위주였던 것과 창검(槍劍), 궁시(弓矢)가 주였던 것에 반해 절강병법은 보병(步兵) 위주의 삼수병(三手兵)을 근간으로 하였다. 따라서 노부의 배열도 조총(鳥銃)을 중심으로 한 삼수병 체제로 바뀌는데, 앞을 호위하는 선상(先廂)과 뒤를 맡은 후상(後廂)의 장병이 사대(射隊)에서 조총병(鳥銃兵)으로 변경되었다. 더욱이 조선 후기로 갈수록 오군영(五軍營)으로 군사체제가 이전됨에 따라 노부를 운용하는 것도 군영별로 다소 차이를 보였다. 예컨대, 오군영별로 소속 군기와 표식이 서로 달라 노부를 호위하고 운용하는 병졸들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밖에 임진왜란 때 도입된 명나라 삼지창의 영향으로 대장기인 둑기〔纛旗〕의 상부도 일지창(一枝槍)에서 삼지창(三枝槍)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대한제국기에는 황제국의 위상에 맞게 명나라 황제 노부 의장을 준용하여 시행하였다. 예컨대 노부 중에 황색을 사용하고 황룡기(黃龍旗)가 등장하였으며, 청나라 의장기의 삼각형태가 아닌 명나라 의장기의 네모형태를 사용했다.<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B%85%B8%EB%B6%80(%E9%B9%B5%E7%B0%BF) 노부, 위키실록사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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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영,|| 『길위의 조정 조선시대 국왕 행차와 정치적 문화』  || 민속원 , 2017.|| ||
+
| 백영자, || 『황제를 수호하는 자들-궁중의장기의 부활』, || 경춘사, 20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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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영, || 「조선 후기 국왕 행차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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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영자, || 『조선시대의 어가행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199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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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진, 백영자, || 「조선시대 嘉禮都監儀軌의 班次圖에 나타난 服飾 연구」,|| 『한국의류학회지』14-2, 199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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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백영자, || 「조선왕조 鹵簿(어가행렬) 儀禮에 관한 硏究 : 형식구조의 파악을 중심으로」,|| 『한국의류학회지』13-2, 198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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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백영자, || 「朝鮮王朝 儀仗旗에 관한 硏究(Ⅰ)」,|| 『한국의류학회지』5-1, 198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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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국립고궁박물관, || 『왕실문화도감 의장』, || 국립고궁박물관, 20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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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고궁박물관, || 『조선 왕실 군사력의 상징, 군사의례』 || 국립고궁박물관, 20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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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지영,|| 「조선후기 국왕 행차에 대한 연구: 의궤반차도와 거동기록을 중심으로」  ||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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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 『진법역주(陣法譯註)』,|| 198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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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陵幸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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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관빈(趙觀彬) 등 봉교편집(奉敎編輯), || 『속병장도설』, || 규장각, 1749. || || http://jsg.aks.ac.kr/dir/view?dataId=JSG_K3-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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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호,||「朝鮮初期 국왕의 車駕變化와 象輅·輦」,|| 『동북아문화연구』30, 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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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보(徐榮輔) 등 봉교편집(奉敎編輯), || 『만기요람』권11, || 서울대학교 도서관, 1808. || 집옥재본(集玉齋本) ||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7A_0070_050_0010_2002_002_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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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기,|| 「고려 전기 노부의 구성과 운용」,|| 한신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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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승기, || 『조선의 무기와 갑옷』, || 가람기획, 20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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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1일 (월) 00:13 기준 최신판

Definition

개요

군대를 지휘하고 통신하기 위한 도구[形名]에서 유래한 의장물로 둑[纛], 교룡기交龍旗 , 고자기 鼓字旗 , 금자기 金字旗 , 영자기令字旗 , 금金 , 고鼓의 7종이 있다. 둑 [纛] , 교룡기交龍旗 조선 후기부터 의장에 포함되었다. 왕이 가지는 군 지휘권을 통해 절대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의장물이며 왕의 의장(대가, 법가, 소가)에서 가장 선두에 배치되었다. 금과 고는 군의 진퇴를 명령하는 도구였으며, 금자기와 고자기의 이러한 기능을 깃발로 표현한 것이다. 왕의 의장에는 7종의 의장물이 모두 사용되었으며 왕세자의장에는 금, 고, 영자기 3종이 사용되었다. 여성 의장에는 사용되지 않았다.[1]

형명의 정의

형(形)은 각종 깃발을, 명(名)은 징·북 따위를 말한다. 곧, 군대에서 명령이나 정보를 시각과 청각을 통하여 전달하는 수단이다. 형명은 중국의 예와 고구려나 신라의 군대 이름에 깃발을 뜻하는 ‘당(幢)’이 쓰였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 고려는 물론 삼국시대에도 군대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조선 전기에는 오위체제(五衛體制)에 의하여 편성된 단위 부대별로 형명이 배정되어 사용되었다. 형에는 천으로 된 기(旗), 기에 술이 달린 휘(麾), 길게 술이 늘어져 ‘치우(蚩尤)의 머리같이 생겼다.’는 둑(纛) 등이 있었다. 대장(大將)을 예로 들면, 왕의 명령에 응하는 대표기(大標旗), 위장(衛將)에게 명령을 내리는 대휘(大麾), 위장을 소집하는 데 쓰는 대초요기(大招搖旗) 등 단위 부대 지휘관마다 깃발로 명령을 내리고 받았다. 이밖에 복병에 사용하는 대사기(大蛇旗), 척후에 쓰는 후기기(候騎旗) 등이 있었다. 둑은 단위부대마다 출정할 때 제사지내는 것으로서 부대를 상징한다. 명에는 대각(大角)과 소각(小角), 북과 도(鼗), 징·방울 등이 사용되었다. 대장·위장·유군장(遊軍將)·부장(部將)에게 대각·소각이 1, 2개씩 배정되고, 나머지는 단위부대마다 1개씩 배정되었다. 명은 고려말 이성계(李成桂)로부터 쓰기 시작한 소각을 제외하면, 모두 유래가 오랜 것으로 생각된다. 대체로, 형은 어떤 형태의 진(陣)을 갖추고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가를 알리는데 쓰이며, 명은 진격과 퇴각을 알리는 데 쓰는 등 약간의 차이가 있다. 형은 ‘깃발을 휘두르고[揮], 조금 뉘었다 세우고[點], 땅에 대었다 세우고[指]’하는 여러 동작에 따라 명령과 정보를 전달하였다. 명은 종류에 따라 용도가 달라 소각을 불어 진퇴를 알리고 북과 소각을 함께 사용하여 독전하였다. 크게 고함지르며 적을 몰아칠 때는 도를 울리고, 후퇴할 때에는 징이나 방울을 썼다. 깃발로 명령을 내리기 전에는 늘 먼저 대각을 불어 군사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며, 진의 형태를 바꾸거나 할 때도 명과 형을 아울러 사용했다. 이러한 형명이 있음으로써 평시에 진법(陣法)을 훈련하고, 전쟁 때 일사불란하게 군대를 지휘할 수 있었다.[2]

조선 후기의 형명 운영

조선 후기에는 속오법(束伍法)에 의하여 소부대 단위로 군사 편제가 이루어지고 형명의 용도가 세분되어 종류가 많아졌다. 그러나 진법의 내용이 조선 전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아 형명의 기본 짜임새는 대체로 같다. 형의 경우 조선 전기에는 왕명을 내리는 깃발로 교룡기(蛟龍旗)뿐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다섯 가지로 늘었다. 중앙군은 국왕을 호위하는 무예청(武藝廳)·용호영(龍虎營)·별초(別抄)·난후별대(攔後別隊) 등을 지휘하기 위한 깃발이 각각 2∼8종씩 있었다. 5군영 또한 군영마다 대장에서 중군(中軍) 이하 각급 지휘관이 용도에 따라 인기(認旗)·수기(手旗)·영기(令旗) 등을 사용하였다. 한편, 과학기술의 발달로 화포가 전보다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되어 명에 화포가 들어가게 된 것이 조선 전기와는 크게 다른 점이다. 특히, 호포(號砲)가 각종 명령을 내리고 정보를 알리는 데 광범하게 사용되었다. 이와 함께 세종 때 전래된 나팔(喇叭)주 02)이 명에 포함되어 큰 구실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대각과 북의 구실이 많이 줄어들었다. 이 시기 취타(吹打)를 위한 악기들이 추가된 것도 두드러진 변화이다.[3]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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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명 Concept 개념용어 형명(形名) 형명 形名 http://dh.aks.ac.kr/hanyang/wiki/index.php/형명-形名

Additional Attribu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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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형명
한자표기 形名
영문명칭
이칭
유형 개념
관련개념 길례, 가례, 흉례, 의장, 노부

Contextual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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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tial Data

Spatial Information N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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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tial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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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l 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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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l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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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ine Reference

type resource title description/caption URL
해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형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8%95%EB%AA%85&ridx=0&tot=5
참고 위키실록사전 형명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D%98%95%EB%AA%85(%E5%BD%A2%E5%90%8D)


  • type: 해설, 참고, 3D_모델, VR_영상, 도해, 사진, 동영상, 소리, 텍스트

Bibliography

author title publication edition URL
백영자, 『황제를 수호하는 자들-궁중의장기의 부활』, 경춘사, 2010.
김지영, 「조선 후기 국왕 행차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5.
백영자, 『조선시대의 어가행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1997.
김정진, 백영자, 「조선시대 嘉禮都監儀軌의 班次圖에 나타난 服飾 연구」, 『한국의류학회지』14-2, 1990.
백영자, 「조선왕조 鹵簿(어가행렬) 儀禮에 관한 硏究 : 형식구조의 파악을 중심으로」, 『한국의류학회지』13-2, 1989.
백영자, 「朝鮮王朝 儀仗旗에 관한 硏究(Ⅰ)」, 『한국의류학회지』5-1, 1981.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의장』, 국립고궁박물관, 2018.
국립고궁박물관, 『조선 왕실 군사력의 상징, 군사의례』 국립고궁박물관, 2020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진법역주(陣法譯註)』, 1983
조관빈(趙觀彬) 등 봉교편집(奉敎編輯), 『속병장도설』, 규장각, 1749. http://jsg.aks.ac.kr/dir/view?dataId=JSG_K3-288
서영보(徐榮輔) 등 봉교편집(奉敎編輯), 『만기요람』권11, 서울대학교 도서관, 1808. 집옥재본(集玉齋本)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7A_0070_050_0010_2002_002_XML
민승기, 『조선의 무기와 갑옷』, 가람기획, 2004

Notes

  1. 국립고궁박물관,『왕실문화도감, 의장』, 2018, 208쪽
  2. 형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형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