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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에서 『국조오례의』가 완성된 성종 이전의 우리 나라와 중국의 외교실태 및 예제를 구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홍무예제&ridx=0&tot=1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f>
 
여말선초에서 『국조오례의』가 완성된 성종 이전의 우리 나라와 중국의 외교실태 및 예제를 구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홍무예제&ridx=0&tot=1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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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홍무예제&ridx=0&tot=1<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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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3171<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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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씨통전(杜氏通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11211107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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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9일 (일) 18:25 판

중국 명(明)나라 태조가 1381년 중국 각지의 유학자들을 불러 모아 편찬한 국가의 예식집(禮式集)을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찍은 것이다. 편찬을 명한 황제의 연호인 홍무(洪武, 1368~1398)를 따서 『홍무예제』라고 하였다. 조선 전기에 국가적 예법의 기준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세종실록오례』·『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할 때 중요하게 참고하였다.[1]

고려후기에서 조선 전기 사이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국가적 예법을 기록한 예서. 1책. 목판본. 보물 제1079호. 원래 명나라 개국 이래의 예제(禮制)를 일신하기 위하여 각종 사전(祀典)을 상고하여 제작한 것으로, 홍무연간(洪武年間)에 간행, 반포되었는데, 진하례의(進賀禮儀)·출사례의(出使禮儀)·서압체식(署押體式)·관리봉급(官吏俸給) 등 11개 항목으로 분류하여 사례를 적고 있다. 이 『홍무예제』는 우리나라에서 다시 인출하여 고려 말 조선 초에 많이 실시되어 오다가, 세종조에 와서 이 예제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자 세종은 문신 허조(許稠) 등에게 예제작업을 명하였다. 이때 『홍무예제』를 참작하고 『두씨통전(杜氏通典)』·『동국고금상정례(東國古今詳定禮)』 등에서 채집하여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제정하도록 하였다. 여말선초에서 『국조오례의』가 완성된 성종 이전의 우리 나라와 중국의 외교실태 및 예제를 구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홍무예제&ridx=0&tot=1
국립중앙박물관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3171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씨통전(杜氏通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112111079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