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구만

han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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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d || [[감경인]]
|-
|본관|| 회산(檜山)
|-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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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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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관술정(觀術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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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일(汝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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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 15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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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16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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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사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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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조선
|-
|국적|| 한국
|-
|대표직함|| [[감포만호]] 
|-
|상훈||
|-
|능묘|| 경상남도 창원
|-
|}

남구만(南九萬)
대표명칭 남구만
한자표기 南九萬
생몰년 1629-1711
시호 문충(文忠)
약천(藥泉)
운로(雲路)
출생지 충청도 충주(忠州) 누암(樓巖)
시대 조선
국적 조선
대표저서 약천집
대표직함 영의정
상훈 보사 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 1등
유형 문신



정의

남구만(南九萬)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며 호는약천(藥泉),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내용

생애

  • 출생

남구만은 1629년(인조 7) 12월 3일 충청도 충주(忠州) 누암(樓巖)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남구만의 호는 약천(藥泉), 자는 운로(雲路),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부친은 남일성(南一星), 모친은 강릉부사 권업(權曗)의 딸이다. 20세에 봉사(奉事) 정수의 딸과 혼인하였다. 1711년(숙종 37) 8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1]

  • 교유관계

남구만과 가장 교류가 많았던 유생으로는 서계 박세당을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최석정(崔錫鼎), 최규서(崔奎瑞), 이사명(李師命), 최석항(崔錫恒), 정제두(鄭濟斗) 등 당대의 명사들이 그의 문인으로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소론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하여 학계와 정치계에서 활약하였다.[2]

정치활동

서인의 논객으로 정계에 입문하다

28세(1656년)에 별시 문과 을과에 합격하여 이후 청요직(淸要職)으로 순조롭게 진출하였다. 30세에 윤선도(尹善道)의 국시소(國是疏)가 올라오자 정언으로서 동료와 함께 상차하여 탄핵에 앞장서 서인을 대표하는 논객의 역할을 하였다.[3]

대동법 헌의와 국방관의 정립

35세에 호남에 대한 대동법(大同法) 실시에 대해 헌의하였다. 43세부터 46세까지 4년 동안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북방 정책에 관여하였는데, 특히 이 시기는 남구만의 국방사상과 역사관이 정립되는 시기이며, 1698년(숙종 24)에 남구만이 신전자초방의 간행을 건의하는 계기가 되었다.[4]

정치적 격변기 남구만의 처세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로 소명을 받고 이어서 부제학, 공조 참의, 동지의금부사, 양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면서 5월에는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을 지어 보사 원종공신 (保社原從功臣) 1등에 녹훈된다. 56세에 우의정, 57세에는 좌의정에 오른다.[5]

남구만은 임술옥사(壬戌獄事)의 고변자인 김환(金煥)의 처벌 건과 효종의 세실(世室), 태조(太祖)의 존호 추상 등 안건에서 박세채, 이상진(李尙眞)과 노선을 같이 하여 젊은 사류의 입장을 지지하였는데, 김환을 옹호하는 송시열 등 노론과 대립하게 되었다.[6]

1688년 장희빈(張禧嬪)과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을 앞세운 남인들의 진출이 두드러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박세채를 두둔하며 동평군을 탄핵하다가 경흥(慶興)에 위리안치된다. 이후 삼사(三司)의 구원으로 방환되었다가 다음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고 남인이 득세하자, 약천은 다시 추궁을 받아 강릉(江陵)에 중도부처되고 조카이자 문인(門人)인 박태보(朴泰輔)가 장사(杖死)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7]

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서인이 다시 득세하자 남구만은 영의정으로 소명을 받는다.

  • 사림 정치의 원칙을 지키다

그러나 남인의 실각과 인현왕후 복위의 과정에서 김춘택(金春澤)과 한중혁(韓重爀)이 자금을 써서 궁금(宮禁)과 결탁하여 공작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자, 남구만은 사림 정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이들을 처벌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다시 노론과 대립하게 된다. 이에 사직과 대명(待命), 영의정 제수가 반복되다가, 결국 68세(1696) 이후 고향으로 내려가 다시는 재상을 맡지 않았다.[8]

지식 관계망

  • 남구만, 박세당, 박세체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남구만 박세당 A는 B와 교유하였다
남구만 최석정 A는 B의 스승이다
남구만 정제두 A는 B의 스승이다
남구만 이민서 A는 B와 교유하였다
이경여 이민서 A는 B의 어버이이다
남구만 송준길 A는 B와 관련이 있다
남구만 윤선도 A는 B와 관련이 있다
남구만 대동법 A는 B와 관련이 있다
남구만 김좌명 A는 B와 관련이 있다
남구만 송시열 A는 B와 관련이 있다
남구만 경신환국 A는 B와 관견이 있다
남구만 김환 A는 B와 관련이 있다
김환 경신환국 A는 B에 참여하였다
남구만 예송논쟁 A는 B와 관련이 있다
기사환국 송시열 A는 B와 관련이 있다
희빈 장씨 박세채 A는 B와 관련이 있다
갑술환국 인현황후 A는 B와 관련이 있다
갑술환국 남구만 A는 B와 관련이 있다
남구만 정호 A는 B와 관련이 있다
남구만 신전자초방 편찬 A는 B를 주도하였다

시간정보

시간 내용
1656년 별시 문과에 합격하여 청요직에 진출하였다
1657년 경연에서 송준길의 인정을 받아 서인들 사이에서 인망이 높아졌다
1658년 효종이 인평대군의 상에 친림하는것을 간언하여 막았다
1658년 윤선도를 탄핵하는 데 앞장섰다
1663년 대동법의 시행에 대해 건의하였다
1664년 김좌명의 파직을 청하다 제직당했다
1675년 예송논쟁으로 남인이 득세하는 것을 경계하다 제직되었다
1698년 남구만신전자초방 편찬을 주도하였다
1679년 윤후허견 을 탄핵하다 거제로 유배당했다
1680년 경신환국의 결과로 보사 원등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1687년 남구만이 영의정의 관직을 받았다
1688년 장희빈과 남인을 견제하기 위해 박세채를 두둔하며 동평군을 탄핵하다가 경흥(慶興)에 위리안치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영의정이 되었다
1696년 고향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2.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3.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4.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5.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6.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7.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8.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이황진, 「약천 남구만의 유배시 연구」, 『韓民族語文學』Vol.75, 한민족어문학회, 2017.
    • 최윤정, 「書簡을 통해 본 박세당과 남구만의 교유 양상」, 『한국고전연구』vol.24, 한국고전연구학회, 2011.
  • 단행본
    • 성당제, 『약천 남구만 문학연구』, 한국학술정보, 2007.

유용한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