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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서가구 석곽묘(徐家溝 石槨墓)=훙산문화(紅山文化) 요령성(遼寧省) 대련시(大連市) 장해현(長海縣) 대장산도진(大長山島鎭) 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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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가구 석곽묘를 비롯한 장해현 일대의 비파형 동검과 중세형 동검 등 출토 유적을 고조선 유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편 서가구 석곽묘를 비롯한 장해현 일대의 비파형 동검과 중세형 동검 등 출토 유적을 고조선 유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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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네이멍구자치구의 츠펑시(赤峰市)의 훙산(紅山)을 중심으로 한 요서(遼西) 지역에서 생성된 신석기시대 위주의 문화집합체를 말한다. 츠펑시는 외곽의 7개 기(旗)와 2개 현(縣)을 거느리고 있는데, 총 면적은 9만km2에 달하고, 청대의 현에서 1947년 시로 승격하였으며 시 중심부에 훙산구 등 3개 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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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펑’은 ‘붉은 산봉우리’란 뜻으로, 이 말은 시 동북쪽에 있는 ‘붉은 산’, 즉 ‘훙산(몽골어로는 ‘우란하따’, 즉 암홍색 화강암 산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는데, 이곳에서 훙산문화가 발견되었다. 이 문화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의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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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06년 츠펑 일대(당시는 러허성(熱河省))에 대한 지표(地表)조사를 하다가 많은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積石墓)를 발견하였다. 그의 조사는 만주와 네이멍구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침략을 위한 정지작업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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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부터 일본에서는 교토대학(京都大學)을 중심으로 이른바 ‘만주학(滿洲學)’이란 하나의 관학(官學)이 발족되어 동북 3성에 관한 정보 탐지에 악용되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츠펑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지역에서 굉장한 유물들이 잇달아 발굴되었다. 1955년에는 이러한 유물들이 시사하는 문화 일체를 ‘훙산문화’라고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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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발굴 결과를 놓고 보면, 훙산문화의 포괄 범위는 동쪽으로는 차오양(朝陽), 남쪽은 발해만, 서쪽은 네이멍구 초원, 북쪽은 다싱안링 남록까지의 광범위한 지역이다. 이 문화는 신석기시대 문화가 주종이지만, 청동기시대나 동석(銅石)병용시대 문화 등 여러 문화를 함께 아우르고 있다. 문화의 성격도 초기 농경문화와 유목문화, 정주농경문화 등이 섞여 있다. 15만 년 전 인류의 거주를 비롯한 구석기문화도 관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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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화집합체를 구성하고 있는 주요 문화들로는 ‘중화 제1촌’ ‘중화 시조취락(始祖聚落)’이라는 싱룽와(興隆窪) 문화(8,000년 전), 훙산문화(6,000년 전), 뉴허량(牛河梁) 문화(5,000년 전), 샤오허얜(小河沿) 문화(4,900년 전), 씨야지야디앤(夏家店) 상 · 하층 문화(4,200~3,300년 전), 링허(凌河) 문화(2,800년 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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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산문화 유적의 밀도는 문화의 유구성과 다양성을 말해주는데, 예를 들면 츠펑 인근의 아오한(敖漢) 한 기(旗)에만 옥과 토기로 유명한 싱룽와 문화와 샤오허얜 문화, 씨야지야디앤 문화가 얼기설기 얽혀 있다. 8,300km2의 이 아오한기에만도 신석기 유적 1,000여 곳, 청동기 유적 2,000여 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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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산문화는 몇가지 내용에서 ‘가장 오래됨’을 자랑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이른바 ‘세계 4대 문명’을 앞질렀다는 것이다. 다링(大凌)강 서쪽 강안에 위치한 당산(唐山) 절벽에 있는 비둘기 동굴(하쯔퉁, 鴿子洞)에서는 15만년 전 원시인간이 불을 사용한 흔적과 함께 300여 점의 석기류와 호랑이 · 야생말 · 산양 등 30가지가 넘는 포유동물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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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60km쯤 떨어진 젠핑(建平)현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5만년 전 ‘젠핑인’의 생활 모습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구석기시대를 이어 나타난 것이 훙산문화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아오한기의 싱룽와 문화다. ‘중화 제1촌’ ‘중화 시조취락’, 즉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조 마을이라는 이 마을은 175채의 집이 10채 단위로 줄지어 계획도시처럼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주위는 마치 해자(垓字)처럼 도랑으로 에워싸여 있다. 여기서 빗살무늬토기와 옥기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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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류 최초의 농경문화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이라크)에서도 이렇게 정연하게 계획된 촌락이 발견된 적은 없다. 1983~1994년에 모두 7차례에 걸쳐 발굴한 이 마을의 면적은 무려 4만m2에 달하는데, 집 자리 규모는 보통 60m2(약 18평)이며 한복판에 있는 가장 큰 두 집은 140m2나 된다. 이 두 집에는 우두머리가 살았거나, 집회장이나 종교의식의 장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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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집마다 생산도구나 취사용구를 갖추고 있으며, 식품 저장용 움막까지 갖추고 있다. 같은 열에 속하는 가족끼리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주민들은 경제적 자립을 유지하고 일정한 사회적 조직과 활동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 일종의 씨족사회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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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제1 마을’이라고 하는 싱룽와(興隆洼) 마을 유적(8,00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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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200km 떨어진 차하이(査海)에서도 55채의 주거지가 발견되었는데, 구조나 유물들은 싱룽와와 대동소이하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이 두 곳을 한데 묶어 싱룽와 · 차하이 문화라고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돼지가 사람과 함께 순장된 사실인데, 이것은 돼지가 일찍부터 종교제의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옥 귀고리와 옥룡(玉龍)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옥기라고 해서 츠펑시의 상징물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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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몇가지 예에서 보듯, 훙산문화는 화하족(華夏族)이 창조한 중원의 황허 문명보다 더 오래된 문화라는 것이 주창자들의 주장이다. 여러 문화 중 [[훙산문화]](6,000년 전)를 기준으로 잡더라도 1천여 년을 앞선 것인데,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문명보다 그 편년이 더 올라가는 셈이다. 훙산문화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라고 자랑하는 이유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훙산문화가 화하족이 창조한 중원문화와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채도처럼 관련된 유물도 있지만, 상당히 다른 점도 있다. 예컨대,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나 적석총(積石塚) 같은 유물이 중원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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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뉴허량 출토 채소(彩塑) 여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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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산문화의 외연성(外延性)과 관련해 특기할 만한 사항은 비너스(Venus)상의 발견이다. 1979년 늦봄 어느 날, 훙산문화의 중심에 자리한 커쭈어(喀左)현 둥산주이(東山嘴)에서 대형 석조제단(石造祭壇)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출토된 유물 중에는 중국에서 처음 보는 흙으로 빚은 여인 나체 소상(塑像) 2점이 끼어 있어 학계의 큰 주목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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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점 모두 머리부분이 떨어져나가 완전한 형태는 알 수 없다. 잔해의 높이는 각각 5cm와 5.8cm이고, 배와 엉덩이가 불쑥 튀어나온 임신부형 환조(丸彫) 조형물로, 제작 연대는 5천여 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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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굴에 이어 1983년 둥산주이 서쪽 50km 떨어진 뉴허량에서도 같은 시기의 여신묘(女神廟) 한 기와 적석총군 유적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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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적에서 크기가 서로 다른 여러가지 여인 나체소상 조각들과 함께 여신묘(女神墓) 주실 서쪽에서 사람 키 크기의 채소여신상(彩塑女神像)이 발굴되었다. 머리부분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이 여신상은 정교한 원조(圓雕)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특히 눈망울은 맑고 짙은 푸른빛 구슬을 박아넣어 생기마저 돌아 매우 신비한 감을 준다. 일부 중국 학계에서는 몽골 인종으로 추정되는 이 여인을 ‘훙산인들의 여시조’로, ‘중화민족의 공동조상(공조, 共祖)’으로 간주하면서 ‘삼황오제(三皇五帝)’ 전설이 허구가 아닌 실재라는 증거로까지 확대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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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3점의 여인상과 비슷한 상, 즉 비너스상이라는 여인 나체상이 유라시아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다. (‘비너스상’항 참고) 훙산문화에서 발견된 나체 여인상이 형태나 상징성에서 유라시아 비너스상과 일맥상통하다는 데는 별 이의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상관성이 문명의 보편성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교류에 의해 생긴 것인지는 연구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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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산문화와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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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산문화를 창조한 주역은 중원문화를 창조한 화하족(華夏族)이 아니라 동이족(東夷族)이다. 이러한 근원에서 훙산문화와 한민족(韓民族) 문화의 상관성을 찾게 된다. 이러한 상관성은 선사시대부터 전개되어온 역사과정에서 확증되고 있다. 우선, 암각화의 상관성이다. 한반도의 경우 1971년 경북 울산(蔚山) 천전리(川前里)에서 암각화가 처음 발견된 이래 20여 개소에서 암각화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주로 경북을 비롯한 남부 지역에서 발견되고 중부와 북부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아 한반도 암각화의 기원이나 계통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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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원을 연해주 아무르강 유역이나 몽골 초원에서 찾으려고 했으나, ‘한국형 암각화’라고 하는 방패 모양 등 기하학 무늬의 암각화가 나오지 않아 그 시도는 결론을 맺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최근(2007) 훙산문화에 속하는 츠펑시의 츠쟈잉쯔(遲家營子)와 상지팡잉쯔(上機房營子) 등지에서 유사 암각화가 발견됨으로써 한국 암각화의 계통문제가 해명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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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츠펑시에 속한 아오한기(旗)의 쓰자쯔진(四家子鎭)에 있는 초오모우산(草帽山, 초모로 만든 산, 삿갓 산) 뒤편에서 2006년 6월, 5,500년 전의 제사터나 묘터인 적석총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서 얇고 널찍한 돌로 위를 덮은 석관이 여러 구 나왔는데, 지안(集安)의 고구려 장군총이나 경주의 신라고분 같은 적석총과 같은 형태의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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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적으로 적석총에 앞선 빗살무늬토기도 발견되었다.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대표적 토기로, 약 60군데에서 나왔으며, 제작연대는 기원전 6000~300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보아 북방 유라시아 빗살무늬토기대(帶)에 속하며, 시베리아를 거쳐 전래된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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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룽와 유적을 비롯한 요하 일대 신석기 유적에서도 지자(之字) 무늬의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이것은 이러한 토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 중원문화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뚜렷한 증거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와 함께 빗살무늬토기대의 동단을 이루고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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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을 세상에서 가장 먼저(8,000년 전) 썼다는 게 훙산문화의 큰 자랑거리의 하나인데, 대표적 유물은 싱룽와 유적에서 출토된 옥결(玉玦, 옥 귀고리)이다. 싱룽와 문화보다 조금 뒤진 차하이 문화 유적에서도 귀고리 · 관옥 · 구슬을 비롯한 20여 점의 옥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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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근 한반도 중부인 강원도 고성군(高城郡) 문암리(文巖里)와 전남 여수(麗水) 안도(雁島) 패총에서도 형태뿐만 아니라, 연대도 7,000~6,000년 전으로 비슷한 옥 귀고리가 발견되었다. 게다가 훙산 옥기에는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여러 점 있고, 제단 터에서는 희생된 곰 아래턱뼈도 발견되었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상징인 곰 토템과의 연관성을 추측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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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영역을 다링하(大凌河) 유역 내지는 그 너머까지로 본다면, 두 지역간, 두 문화간의 소통이나 교류에 의해 이루어진 이러한 연관성이나 공유성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훙산 옥의 원산지가 예부터 한반도에 이르는 교통요지에 자리한 선양(瀋陽) 남방의 슈옌(岫岩)이라는 사실은 문암리나 안도 패총 옥의 원류나 산지를 추적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역대 [[서국]](徐國) 국왕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

2024년 1월 5일 (금) 08:52 판

서가구 석곽묘(徐家溝 石槨墓)=훙산문화(紅山文化)


요령성(遼寧省) 대련시(大連市) 장해현(長海縣) 대장산도진(大長山島鎭) 합선도(哈仙島) 서가구촌(徐家溝村)에 있는 청동기 시대[고조선 시대]의 석곽묘.

서가구 석곽묘는 요령성 대련시 장해현 서가구촌 서북쪽 단애처에 있는 청동기 시대의 석곽묘이다. 장해현 일대 윤가촌 유형(尹家村類型)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서가구 석곽묘는 요령성 대련시 장해현 대장산도진 합선도 서가구촌 서북쪽 민가 뒤편 단애부에 위치하고 있다.

서가구 석곽묘는 1979년 서가구촌의 주민이 자신의 집 뒤 단애처에서 괴석과 함께 청동기가 떨어져 내린 것을 발견하고 신고하여 1980년 장해현 문화관(長海縣文化館)에서 수습 조사하였다.

서가구 석곽묘의 무덤 구덩이는 길이 1.99m, 너비 0.9m 가량이다. 석곽의 규모와 구조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서가구 석곽묘에서는 중세형 동검 1점, 도씨검(桃氏劍) 5점, 청동 칼집 부속 1점, 청동제 검 손잡이 1점, 청동 도끼 1점, 청동 끌 1점이 출토되었다.

서가구 석곽묘는 현재 유적의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

서가구 석곽묘는 상마석 토광묘군과 함께 장해현 일대의 청동기 시대 말기~초기 철기 시대 물질문화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서가구 석곽묘는 장해현 일대의 윤가촌 유형(尹家村類型) 표지 유적에 속한다.

한편 서가구 석곽묘를 비롯한 장해현 일대의 비파형 동검과 중세형 동검 등 출토 유적을 고조선 유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중국 네이멍구자치구의 츠펑시(赤峰市)의 훙산(紅山)을 중심으로 한 요서(遼西) 지역에서 생성된 신석기시대 위주의 문화집합체를 말한다. 츠펑시는 외곽의 7개 기(旗)와 2개 현(縣)을 거느리고 있는데, 총 면적은 9만km2에 달하고, 청대의 현에서 1947년 시로 승격하였으며 시 중심부에 훙산구 등 3개 구가 있다.

‘츠펑’은 ‘붉은 산봉우리’란 뜻으로, 이 말은 시 동북쪽에 있는 ‘붉은 산’, 즉 ‘훙산(몽골어로는 ‘우란하따’, 즉 암홍색 화강암 산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는데, 이곳에서 훙산문화가 발견되었다. 이 문화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의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다.

그는 1906년 츠펑 일대(당시는 러허성(熱河省))에 대한 지표(地表)조사를 하다가 많은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積石墓)를 발견하였다. 그의 조사는 만주와 네이멍구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침략을 위한 정지작업의 일환이었다.

20세기 초부터 일본에서는 교토대학(京都大學)을 중심으로 이른바 ‘만주학(滿洲學)’이란 하나의 관학(官學)이 발족되어 동북 3성에 관한 정보 탐지에 악용되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츠펑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지역에서 굉장한 유물들이 잇달아 발굴되었다. 1955년에는 이러한 유물들이 시사하는 문화 일체를 ‘훙산문화’라고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의 발굴 결과를 놓고 보면, 훙산문화의 포괄 범위는 동쪽으로는 차오양(朝陽), 남쪽은 발해만, 서쪽은 네이멍구 초원, 북쪽은 다싱안링 남록까지의 광범위한 지역이다. 이 문화는 신석기시대 문화가 주종이지만, 청동기시대나 동석(銅石)병용시대 문화 등 여러 문화를 함께 아우르고 있다. 문화의 성격도 초기 농경문화와 유목문화, 정주농경문화 등이 섞여 있다. 15만 년 전 인류의 거주를 비롯한 구석기문화도 관련되어 있다.

이 문화집합체를 구성하고 있는 주요 문화들로는 ‘중화 제1촌’ ‘중화 시조취락(始祖聚落)’이라는 싱룽와(興隆窪) 문화(8,000년 전), 훙산문화(6,000년 전), 뉴허량(牛河梁) 문화(5,000년 전), 샤오허얜(小河沿) 문화(4,900년 전), 씨야지야디앤(夏家店) 상 · 하층 문화(4,200~3,300년 전), 링허(凌河) 문화(2,800년 전) 등이 있다.

훙산문화 유적의 밀도는 문화의 유구성과 다양성을 말해주는데, 예를 들면 츠펑 인근의 아오한(敖漢) 한 기(旗)에만 옥과 토기로 유명한 싱룽와 문화와 샤오허얜 문화, 씨야지야디앤 문화가 얼기설기 얽혀 있다. 8,300km2의 이 아오한기에만도 신석기 유적 1,000여 곳, 청동기 유적 2,000여 곳이 있다.

훙산문화는 몇가지 내용에서 ‘가장 오래됨’을 자랑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이른바 ‘세계 4대 문명’을 앞질렀다는 것이다. 다링(大凌)강 서쪽 강안에 위치한 당산(唐山) 절벽에 있는 비둘기 동굴(하쯔퉁, 鴿子洞)에서는 15만년 전 원시인간이 불을 사용한 흔적과 함께 300여 점의 석기류와 호랑이 · 야생말 · 산양 등 30가지가 넘는 포유동물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60km쯤 떨어진 젠핑(建平)현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5만년 전 ‘젠핑인’의 생활 모습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구석기시대를 이어 나타난 것이 훙산문화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아오한기의 싱룽와 문화다. ‘중화 제1촌’ ‘중화 시조취락’, 즉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조 마을이라는 이 마을은 175채의 집이 10채 단위로 줄지어 계획도시처럼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주위는 마치 해자(垓字)처럼 도랑으로 에워싸여 있다. 여기서 빗살무늬토기와 옥기가 발견되었다.

사실 인류 최초의 농경문화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이라크)에서도 이렇게 정연하게 계획된 촌락이 발견된 적은 없다. 1983~1994년에 모두 7차례에 걸쳐 발굴한 이 마을의 면적은 무려 4만m2에 달하는데, 집 자리 규모는 보통 60m2(약 18평)이며 한복판에 있는 가장 큰 두 집은 140m2나 된다. 이 두 집에는 우두머리가 살았거나, 집회장이나 종교의식의 장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집마다 생산도구나 취사용구를 갖추고 있으며, 식품 저장용 움막까지 갖추고 있다. 같은 열에 속하는 가족끼리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주민들은 경제적 자립을 유지하고 일정한 사회적 조직과 활동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 일종의 씨족사회를 연상케 한다.

‘중국 제1 마을’이라고 하는 싱룽와(興隆洼) 마을 유적(8,000년 전) 여기서 200km 떨어진 차하이(査海)에서도 55채의 주거지가 발견되었는데, 구조나 유물들은 싱룽와와 대동소이하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이 두 곳을 한데 묶어 싱룽와 · 차하이 문화라고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돼지가 사람과 함께 순장된 사실인데, 이것은 돼지가 일찍부터 종교제의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옥 귀고리와 옥룡(玉龍)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옥기라고 해서 츠펑시의 상징물이 되고 있다.

이상의 몇가지 예에서 보듯, 훙산문화는 화하족(華夏族)이 창조한 중원의 황허 문명보다 더 오래된 문화라는 것이 주창자들의 주장이다. 여러 문화 중 훙산문화(6,000년 전)를 기준으로 잡더라도 1천여 년을 앞선 것인데,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문명보다 그 편년이 더 올라가는 셈이다. 훙산문화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라고 자랑하는 이유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훙산문화가 화하족이 창조한 중원문화와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채도처럼 관련된 유물도 있지만, 상당히 다른 점도 있다. 예컨대,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나 적석총(積石塚) 같은 유물이 중원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1983년 뉴허량 출토 채소(彩塑) 여신상 훙산문화의 외연성(外延性)과 관련해 특기할 만한 사항은 비너스(Venus)상의 발견이다. 1979년 늦봄 어느 날, 훙산문화의 중심에 자리한 커쭈어(喀左)현 둥산주이(東山嘴)에서 대형 석조제단(石造祭壇)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출토된 유물 중에는 중국에서 처음 보는 흙으로 빚은 여인 나체 소상(塑像) 2점이 끼어 있어 학계의 큰 주목을 끌었다.

두 점 모두 머리부분이 떨어져나가 완전한 형태는 알 수 없다. 잔해의 높이는 각각 5cm와 5.8cm이고, 배와 엉덩이가 불쑥 튀어나온 임신부형 환조(丸彫) 조형물로, 제작 연대는 5천여 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이 발굴에 이어 1983년 둥산주이 서쪽 50km 떨어진 뉴허량에서도 같은 시기의 여신묘(女神廟) 한 기와 적석총군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서 크기가 서로 다른 여러가지 여인 나체소상 조각들과 함께 여신묘(女神墓) 주실 서쪽에서 사람 키 크기의 채소여신상(彩塑女神像)이 발굴되었다. 머리부분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이 여신상은 정교한 원조(圓雕)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특히 눈망울은 맑고 짙은 푸른빛 구슬을 박아넣어 생기마저 돌아 매우 신비한 감을 준다. 일부 중국 학계에서는 몽골 인종으로 추정되는 이 여인을 ‘훙산인들의 여시조’로, ‘중화민족의 공동조상(공조, 共祖)’으로 간주하면서 ‘삼황오제(三皇五帝)’ 전설이 허구가 아닌 실재라는 증거로까지 확대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3점의 여인상과 비슷한 상, 즉 비너스상이라는 여인 나체상이 유라시아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다. (‘비너스상’항 참고) 훙산문화에서 발견된 나체 여인상이 형태나 상징성에서 유라시아 비너스상과 일맥상통하다는 데는 별 이의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상관성이 문명의 보편성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교류에 의해 생긴 것인지는 연구과제다.

훙산문화와 한반도 훙산문화를 창조한 주역은 중원문화를 창조한 화하족(華夏族)이 아니라 동이족(東夷族)이다. 이러한 근원에서 훙산문화와 한민족(韓民族) 문화의 상관성을 찾게 된다. 이러한 상관성은 선사시대부터 전개되어온 역사과정에서 확증되고 있다. 우선, 암각화의 상관성이다. 한반도의 경우 1971년 경북 울산(蔚山) 천전리(川前里)에서 암각화가 처음 발견된 이래 20여 개소에서 암각화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주로 경북을 비롯한 남부 지역에서 발견되고 중부와 북부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아 한반도 암각화의 기원이나 계통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었다.

그 기원을 연해주 아무르강 유역이나 몽골 초원에서 찾으려고 했으나, ‘한국형 암각화’라고 하는 방패 모양 등 기하학 무늬의 암각화가 나오지 않아 그 시도는 결론을 맺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최근(2007) 훙산문화에 속하는 츠펑시의 츠쟈잉쯔(遲家營子)와 상지팡잉쯔(上機房營子) 등지에서 유사 암각화가 발견됨으로써 한국 암각화의 계통문제가 해명될 것으로 기대된다.

역시 츠펑시에 속한 아오한기(旗)의 쓰자쯔진(四家子鎭)에 있는 초오모우산(草帽山, 초모로 만든 산, 삿갓 산) 뒤편에서 2006년 6월, 5,500년 전의 제사터나 묘터인 적석총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서 얇고 널찍한 돌로 위를 덮은 석관이 여러 구 나왔는데, 지안(集安)의 고구려 장군총이나 경주의 신라고분 같은 적석총과 같은 형태의 유물이다.

시기적으로 적석총에 앞선 빗살무늬토기도 발견되었다.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대표적 토기로, 약 60군데에서 나왔으며, 제작연대는 기원전 6000~300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보아 북방 유라시아 빗살무늬토기대(帶)에 속하며, 시베리아를 거쳐 전래된 것으로 판단된다.

싱룽와 유적을 비롯한 요하 일대 신석기 유적에서도 지자(之字) 무늬의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이것은 이러한 토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 중원문화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뚜렷한 증거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와 함께 빗살무늬토기대의 동단을 이루고 있음을 시사한다.

옥을 세상에서 가장 먼저(8,000년 전) 썼다는 게 훙산문화의 큰 자랑거리의 하나인데, 대표적 유물은 싱룽와 유적에서 출토된 옥결(玉玦, 옥 귀고리)이다. 싱룽와 문화보다 조금 뒤진 차하이 문화 유적에서도 귀고리 · 관옥 · 구슬을 비롯한 20여 점의 옥이 나왔다.

그런데 최근 한반도 중부인 강원도 고성군(高城郡) 문암리(文巖里)와 전남 여수(麗水) 안도(雁島) 패총에서도 형태뿐만 아니라, 연대도 7,000~6,000년 전으로 비슷한 옥 귀고리가 발견되었다. 게다가 훙산 옥기에는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여러 점 있고, 제단 터에서는 희생된 곰 아래턱뼈도 발견되었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상징인 곰 토템과의 연관성을 추측케 한다.

고조선의 영역을 다링하(大凌河) 유역 내지는 그 너머까지로 본다면, 두 지역간, 두 문화간의 소통이나 교류에 의해 이루어진 이러한 연관성이나 공유성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훙산 옥의 원산지가 예부터 한반도에 이르는 교통요지에 자리한 선양(瀋陽) 남방의 슈옌(岫岩)이라는 사실은 문암리나 안도 패총 옥의 원류나 산지를 추적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역대 서국(徐國) 국왕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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