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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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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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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대파한 싸움이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7823 행주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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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임진왜란 때인 1593년 2월에 전라도관찰사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로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2859 행주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3월 27일 확인</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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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 집결===
<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2424&cid=40942&categoryId=33383 행주대첩]" 『네이버지식백과 -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 2017년 03월 27일 확인.</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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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은 임진왜란 초에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군사를 일으켜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巡察使)가 되었다. 그 뒤 중국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수원 독산성 | 독산성]](禿山城)에 머물다가, 1593년(선조 26) 2월 1만여 병력을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이 물색한 행주산성에 집결시켰다. [[권율]]은 [[조경]]을 시켜 행주산성을 보수하게 하고 목책을 세우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를 금주(衿州:始興)에 주둔시키고 휘하 병력 중 4,000명을 뽑아 보내서 한양에 주둔한 적을 견제하게 하였다. 또한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은 강화(江華)에서, 충청감사 [[허욱]](許頊)은 통진(通津:金浦)에서 각각 그를 지원하기로 하였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7823 행주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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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은 남은 병사를 이끌고 [[조경]] 등과 함께 [[행주산성]]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승장(僧將) [[처영]](處英)도 승의병(僧義兵) 1,000명을 이끌고 [[권율]]을 따라 강을 건너니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1만 명이 못 되었다. [[권율]]이 정예병을 뽑아 서울에 보내어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2859 행주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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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의 총공세===
권율은 왜란 초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1592년(선조 25) 7월 배티〔梨峙〕싸움에서 대승한 공으로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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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왜군은 이 무렵 총퇴각을 감행하여 서울 부근으로 집결하여 이었다. 그 병력이 대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1월 말 벽제관(碧蹄館)에서 조명연합군에게 승리한 직후여서 그들의 사기 또한 충천해 있었다. 왜군은 [[배티전투]]와 [[독산성]]에서의 치욕적인 대패를 설욕하고 후방의 위험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행주산성]]을 공격하기로 결의하였다.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지휘하에 3만여 명의 병력이 7개 대로 나뉘어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였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9&cp_code=cp0208&index_id=cp02081391&content_id=cp020813910001&search_left_menu=4 행주산성전투]", 문화원형 라이브러리<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ref><br/>
권율은 관군과 함께 평양을 수복한 뒤, 남쪽으로 내려온 명나라의 원군과 호응해 서울을 되찾기 위해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북상하던 중 수원 독산성(禿山城)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어 그는 군대를 서울 근교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에게 적당한 지역을 물색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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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2일 새벽 왜군은 3만여 병력으로 내습하여 여러 겹으로 성(城)을 포위하고, 3진으로 나누어 9차례에 걸쳐 종일토록 맹공격해왔다. 이에 [[권율]]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왜군과 맞서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마침내 왜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는데, [[권율]]은 이를 추격하여 13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깃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 등에게도 부상을 입혔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7823 행주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조경은 양천(陽川)에서 한강을 건너 병력을 주둔시킬 만한 곳을 찾아내어 권율에게 보고하였다. 권율은 서울 주변인 안현(鞍峴)에 진을 치려고 했으나 막하 장수들이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조경이 물색한 곳으로 결정했는데, 이 곳이 행주산성이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조경으로 하여금 목책(木柵)을 완성하게 하고, 은밀히 군사를 이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휘하 병력 중 4,000명을 뽑아 전라도병사 선거이(宣居怡) 지휘 하에 금천(衿川 : 지금의 시흥)에 주둔시켜 서울의 적을 견제하였다. 이 때 죽산에서 패한 소모사(召募使) 변이중(邊以中)도 정예병 1,000명을 거느리고 양천에 주둔해, 행주산성과 금천 중간 위치에서 일본군을 견제하였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행주산성에 배수진을 친 권율을 돕기로 하였다.
 
권율은 남은 병사를 이끌고 조경 등과 함께 행주산성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승장(僧將) 처영(處英)도 승의병(僧義兵) 1,000명을 이끌고 권율을 따라 강을 건너니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1만 명이 못 되었다. 이후 권율이 정예병을 뽑아 서울에 보내어 전투 태세를 갖췄다.
 
적장들은 배티와 독산성에서 치욕적인 대패를 경험한지라 단번에 침공해 권율의 군대를 무찔러 위험을 없애자고 결의하였다. 한 번도 진두에 나서본 일이 없던 총대장 우키타(宇喜多秀家)를 비롯해 이시다(石田三成)·마시다(增田長盛)·오타니(大谷吉繼)의 세 봉행(奉行 : 통치자 장군을 보좌하던 최고 무관직) 등 본진의 장수들까지 7개 부대로 나눠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였다. 이 때 전 병력은 3만여 명이었다.
 
성 안의 관군이 소지한 무기는 궁시(弓矢)·도창(刀槍) 외에, 변이중이 만든 화차(火車), 권율의 지시로 만든 수차석포(水車石砲)라는 특수한 무기가 있었다. , 산성에서는 일본군이 몰려올 것에 대비해 성책을 내외 이중으로 만들었다.
 
토제(土堤)를 쌓아 조총 탄환을 피할 수 있게 했고, 병사에게 재를 담은 주머니를 허리에 차게 하였다. 일본군이 공격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권율은 이번 한판싸움에 병사들의 생사는 물론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것을 병사들에게 주지시키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1593년 2월 12일 오전 6시 경 일본군의 선봉 100여 기(騎)가 나타나더니 뒤이어 대군이 밀려 왔다. 제1대장 고니시(小西行長)가 선봉으로 나섰다. 그는 평양싸움에서 대패한 이후 벽제관(碧蹄館)싸움에도 참전하지 않다가 마침내 설욕할 좋은 기회라 여기고 성(城) 공격에 앞장섰다.
 
성 안의 아군은 일시에 화차에서 포를 발사하고, 수차석포에서 돌을 뿜어내며, 진천뢰(震天雷)·총통(銃筒) 등을 쏘아대고 강궁(强弓)의 시위를 당겼다. 몰려들었던 적의 병마가 이에 맞아 혼비백산하니 고니시의 제1대는 궤멸해 물러갔다. 이시다가 이끈 제2대도 공격에 실패하였다.
 
이어 제3대의 일본군들이 달려들었다. 대장 구로다(黑田長政)는 전년 9월 연안성(延安城)싸움에서 의병에게 대패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긴 방죽 위에 누대를 만들고 그 위에 총수(銃手) 수십 명을 배치해 성 안으로 조총을 쏘게만 하고 병졸에게는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조경은 대포를 쏘아 이를 깨뜨렸다. 또 포전(砲箭) 끝에 칼날 두 개씩을 달아 쏘니 맞는 자는 즉사하였다.
 
제1대부터 3대까지 연패하는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총대장 우키타는 크게 노해 선두에 나서니 이에 소속된 제4대 장병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제4대는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계속 진격해 제1성책을 넘어서 제2성책까지 접근하였다.
 
관군은 한때 동요했으나 권율의 독려로 힘을 얻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화차의 총통이 적장에게 집중 사격되어 우키타는 부상을 입고 부하의 부축을 받으며 퇴진하였다. 그리고 이 때까지 남아 선두에서 지휘하던 제2대장 이시다도 부상으로 후퇴하였다.
 
제5대장 깃카와(吉川廣家)는 제4대의 뒤를 이어 화통(火筒)을 성책 일부에 집중 발사해 불이 붙게 했으나 관군은 미리 마련한 물로 꺼 버렸다. 관군이 시석(矢石)을 퍼부어 깃카와가 큰 부상을 입고 퇴각했고 부하 병졸의 사망자만도 160명이나 발생하였다.
 
두 대장의 부상에 분노한 제6대장 모리(毛利秀元)와 고바야카와(小早川秀秋)는 제2성책을 공격하였다. 이에 처영은 승의군을 이끌고 용감히 맞섰다. 그리고 승의병이 각기 허리에 찬 재를 뿌리자 눈을 뜰 수 없게 된 적군은 달아나고 말았다.
 
일본군은 마지막 남은 제7대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제7대장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는 노장으로 선두에 서서 서북쪽 자성(子城)을 지키던 승의군 한 귀퉁이를 뚫고 성 안에까지 돌입하려 하였다. 이에 승의병이 동요해,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 때 권율은 대검을 빼들고 승의군의 총공격을 호령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에 돌입하였다. 옆 진영의 관군도 화살이 다해 투석전을 폈는데, 이때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이 일치단결해 싸웠다. 특히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다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성 안에 무기와 군인이 부족한 상황을 눈치챈 적군이 기세를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마침 경기수사(京畿水使) 이빈(李蘋)이 화살 수만 개를 실은 배 두 척을 몰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적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였다. 이에 당황한 적은 성 안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성 안의 관군도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적을 추격해 130급(級)을 베었다. 그리고 파괴된 내성도 급히 보수하였다.
 
적군은 퇴각하면서 사방에 흩어진 시체를 불태웠다. 아군은 그들이 버리고 간 갑주(甲胄)·도창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였다. 노획물 중 중요한 것만도 272건이었다. 적군이 버리고 간 적의 시체가 200구가 넘었고, 타다 남은 시체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것이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명()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평양으로 회군하던 중 행주대첩의 소식을 듣고 벽제관에서 패하고 급히 회군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대첩이 있은 다음 권율은 병력을 이끌고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과 본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하였다. 그 뒤 권율이 김명원의 뒤를 이어 도원수가 된 것은 행주대첩의 전공이 많이 작용된 것이라 하겠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2859 행주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3월 27일 확인</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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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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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명(明)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평양으로 회군하던 중 행주대첩의 소식을 듣고 [[벽제관]]에서 패하고 급히 회군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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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첩이 있은 다음 [[권율]]은 병력을 이끌고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과 본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하였다.<ref> 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2859 행주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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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석전(石戰)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기 때문에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는 없다.<ref>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7823 행주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시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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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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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C031/C031.htm "행주대첩"(오승우) 지식관계망]
파일:한글팀_행주대첩_행주대첩비_구비_02.jpg| 행주대첩비(구비)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07400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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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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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3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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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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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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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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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및 참조===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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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 자원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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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2859 행주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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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7823 행주대첩]",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
 +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9&cp_code=cp0208&index_id=cp02081391&content_id=cp020813910001&search_left_menu=4 행주산성전투]", 문화원형 라이브러리<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
  
[[분류:한글고문헌]]
+
[[분류:민족기록화]][[분류:사건]]

2017년 12월 26일 (화) 23:19 기준 최신판

행주대첩(幸州大捷)
Mountain fortress battle.png
대표명칭 행주대첩
한자표기 幸州大捷
이칭 행주성전투
유형 전투
시대 조선
날짜 1592년 02월 12일
관련인물 권율, 조경, 처영
관련유물유적 행주산성, 고양 충장사


정의

임진왜란권율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대파한 싸움이다.[1]

내용

행주산성 집결

권율은 임진왜란 초에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군사를 일으켜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巡察使)가 되었다. 그 뒤 중국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독산성(禿山城)에 머물다가, 1593년(선조 26) 2월 1만여 병력을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이 물색한 행주산성에 집결시켰다. 권율조경을 시켜 행주산성을 보수하게 하고 목책을 세우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를 금주(衿州:始興)에 주둔시키고 휘하 병력 중 4,000명을 뽑아 보내서 한양에 주둔한 적을 견제하게 하였다. 또한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은 강화(江華)에서, 충청감사 허욱(許頊)은 통진(通津:金浦)에서 각각 그를 지원하기로 하였다.[2]
권율은 남은 병사를 이끌고 조경 등과 함께 행주산성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승장(僧將) 처영(處英)도 승의병(僧義兵) 1,000명을 이끌고 권율을 따라 강을 건너니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1만 명이 못 되었다. 권율이 정예병을 뽑아 서울에 보내어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3]

왜군의 총공세

한편 왜군은 이 무렵 총퇴각을 감행하여 서울 부근으로 집결하여 이었다. 그 병력이 대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1월 말 벽제관(碧蹄館)에서 조명연합군에게 승리한 직후여서 그들의 사기 또한 충천해 있었다. 왜군은 배티전투독산성에서의 치욕적인 대패를 설욕하고 후방의 위험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행주산성을 공격하기로 결의하였다.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지휘하에 3만여 명의 병력이 7개 대로 나뉘어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였다.[4]
2월 12일 새벽 왜군은 3만여 병력으로 내습하여 여러 겹으로 성(城)을 포위하고, 3진으로 나누어 9차례에 걸쳐 종일토록 맹공격해왔다. 이에 권율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왜군과 맞서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마침내 왜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는데, 권율은 이를 추격하여 13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깃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 등에게도 부상을 입혔다.[5]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

이것이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명(明)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평양으로 회군하던 중 행주대첩의 소식을 듣고 벽제관에서 패하고 급히 회군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대첩이 있은 다음 권율은 병력을 이끌고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과 본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하였다.[6]
당시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석전(石戰)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기 때문에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는 없다.[7]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행주대첩 행주산성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A ekc:depicts B
권율 행주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조경 행주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처영 행주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우키타 히데이에 행주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시다 미쓰나리 행주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깃카와 히로이에 행주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변이중화차 행주대첩 A는 B에 사용되었다 A ekc:isUsedIn B
변이중화차 변이중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수차석포 행주대첩 A는 B에 사용되었다 A ekc:isUsedIn B
권율 고양 충장사 A는 B에 제향되었다 A ekc:isEnshrinedIn B
행주대첩비 행주대첩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600134 126.824743 행주산성행주대첩이 발발한 곳이다
37.599162 126.825750 고양 충장사행주산성에 위치한다
37.599097 126.825966 행주대첩비행주산성에 위치한다
  • 임진왜란 3대첩

시각자료

가상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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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행주대첩", 『doopedia』online, 두산백과.
  2. "행주대첩", 『doopedia』online, 두산백과.
  3. 이장희, "행주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행주산성전투", 문화원형 라이브러리『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5. "행주대첩", 『doopedia』online, 두산백과.
  6. 이장희, "행주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행주대첩", 『doopedia』online, 두산백과.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이장희, "행주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행주대첩",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행주산성전투", 문화원형 라이브러리『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