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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인조실록』권 15 인조5년(1627), 1월 29일 정유,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501029_002 강을 건너 행궁에 도착하고, 청 사신이 화친의 뜻을 보이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인조실록』권 15 인조5년(1627), 1월 29일 정유,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501029_002 강을 건너 행궁에 도착하고, 청 사신이 화친의 뜻을 보이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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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후금 진영에 들어가 전쟁에서 진 조선의 불리한 상황을 최대한 유리하게 외교로 이끌가려고 하였다.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청나라 군대가 매우 빨리 한양까지 진격 하였고, 이에 [[조선 인조|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PAGENAME}}은 추격하는 청나라 군대의 속도를 낮추기 위해 일부러 청 진영으로 가서 강화 협상을 하였다. 그 결과 [[조선 인조|인조]]는 무사히 [[남한산성]]에 도착 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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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후금 진영에 들어가 전쟁에서 진 조선의 불리한 상황을 최대한 유리하게 외교로 이끌가려고 하였다.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청나라 군대가 매우 빨리 한양까지 진격 하였고, 이에 [[조선 인조|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PAGENAME}}은 추격하는 청나라 군대의 속도를 낮추기 위해 일부러 청 진영으로 가서 강화 협상을 하였다. 그 결과 [[조선 인조|인조]]는 무사히 [[남한산성]]에 도착 할 있었다.  
 
<ref>『인조실록』권 33 인조14년(1636), 12월 14일 갑신,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12014_003 최명길에게 강화를 청하게 하고 상은 남한 산성에 도착, 강도로 가기로 결정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인조실록』권 33 인조14년(1636), 12월 14일 갑신,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12014_003 최명길에게 강화를 청하게 하고 상은 남한 산성에 도착, 강도로 가기로 결정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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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처럼 상당수의 신하들이 화친을 거부했는데, {{PAGENAME}}은 척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 자체가 현실성이 없고 대책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결국 청나라와 강화를 맺게 된다. [[병자호란]] 이후 {{PAGENAME}}은 우의정 좌의정을 걸쳐 영의정 자리에 오른다. 전란 이후 국토과 황폐화 되었고 백성들의 삶이 말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하는데 {{PAGENAME}}은 많은 노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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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시기 처럼 상당수의 신하들이 화친을 거부했는데, {{PAGENAME}}은 척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 자체가 현실성이 없고 대책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결국 청나라와 강화를 맺게 된다. [[병자호란]] 이후 {{PAGENAME}}은 우의정 좌의정을 걸쳐 영의정 자리에 오른다. 전란 이후 국토과 황폐화 되었고 백성들의 삶이 말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하는데 {{PAGENAME}}은 많은 노력을 하였다.  
 
<ref>이겸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284 최명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ref>이겸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284 최명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2017년 7월 19일 (수) 21:31 판

틀:인물정보2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내용

최명길과 집안에 대해서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 또는 창랑(滄浪)이다. 최업(崔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수준(崔秀俊)이고, 아버지는 영흥부사 최기남(崔起南)이다. 어머니는 참판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1]

최명길의 광해군시기 활동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이시백(李時白)장유(張維) 등과 같이 학문을 배웠다. 1605년(선조 38)에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그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2]

1613년(광해 5)에는 병조 좌랑 자리에 올랐으나 [3] 불과 1년만에 국내 정치 문제와 아울러 명나라 사신 접촉 금지 문제가 생겨 관직을 삭탈 당한다. [4] 관직에서 쫓겨난 이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수년간 복상(服喪)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 시기에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것이 천운이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인목대비의 유폐 등 광해군의 치세가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다.

최명길의 인조시기 활동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김자점, 심기원 등 유생들과 함께 홍제원(弘濟院) 터에서 모여 반정에 참여하였다. [5] 그리하여 이틀 후에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으며, 10월에는 녹훈을 받아 1등 정사 공신이 된어 완성부원군에 봉해졌다. [6] 그 후에는 이조 참판까지 벼슬이 올라갔으며, 비변사 유사당상을 겸입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녹훈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자 최명길은 총독부사(摠督副使)가 되어 관군과 합류하여 이괄과 맞선다. [7] 이후 이괄이 패배하여 반란이 막을 내리자, 인조의 큰 신임을 얻게 되었다. [8]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 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강화도에 들어갔는데, 강화도의 수비도 불완전 하였고, 많은 대신들이 강화(講和[)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명길은 현실적인 판단 한 결과 더이상 전쟁은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인조를 설득하여 후금과 강화를 맺었다. [9] 그리고 후금 진영에 들어가 전쟁에서 진 조선의 불리한 상황을 최대한 유리하게 외교로 이끌가려고 하였다.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청나라 군대가 매우 빨리 한양까지 진격 하였고, 이에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최명길은 추격하는 청나라 군대의 속도를 낮추기 위해 일부러 청 진영으로 가서 강화 협상을 하였다. 그 결과 인조는 무사히 남한산성에 도착 할 수 있었다. [10]

정묘호란 시기 처럼 상당수의 신하들이 화친을 거부했는데, 최명길은 척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 자체가 현실성이 없고 대책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결국 청나라와 강화를 맺게 된다. 병자호란 이후 최명길은 우의정 좌의정을 걸쳐 영의정 자리에 오른다. 전란 이후 국토과 황폐화 되었고 백성들의 삶이 말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하는데 최명길은 많은 노력을 하였다. [11]

그리고 청나라와 외교를 전담하여 포로로 잡힌 조선인을 데려왔으며 복잡한 외교 문제 및 세폐 수량을 줄여서 조선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였다. 1642년(인조 20)경 임경업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 명나라와 결탁하여 청나라를 공격하려 했던 사실이 들어나면서 최명길도 심양으로 끌려가 감옥에 갇혔다. 1645년(인조 23) 약 3년간 심양에서 같혀 지내다가 고국으로 돌아왔고다시 인조를 보필하다가 1647년(인조 25)에 죽었다. [12]

성리학과 문장 실력이 뛰어나며 글씨체도 뛰어났고 양명학을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대표 저서로는 지천집, 지천주차(遲川奏箚)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주석

  1. 이겸주, 최명길,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선조실록』권 184, 선조38년(1605), 2월 14일 무오, 대제학 유근 등에게 생원 최명길 등 2백 명을 시취하게 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광해군일기[중초본]』권 71, 광해5년(1613), 10월 1일 을유, 유근 등에게 생원 최명길 등 2백 명을 시취하게 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광해군일기[중초본]』권 74, 광해6년(1614), 1월 14일 정묘, 대제학 유근 등에게 생원 최명길 등 2백 명을 시취하게 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광해군일기(중초본)』권 187, 광해15년(1623), 3월 12일 임인, 반정이 일어나자 도망하여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다, 『조선왕조실록』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인조실록』권 3, 인조1년(1623), 윤10월 18일 갑진, 정사훈(靖社勳)을 감정토록 명하여 1·2·3등 53명을 녹훈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인조실록』권 4, 인조2년(1624), 2월 12일 병신, 체찰 부사 이시발과 총독 부사 최명길 등이 이괄이 도주했다고 보고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인조실록』권 4, 인조2년(1624), 2월 18일 임인, 전의현에 머물다. 총독 부사 최명길이 길에서 맞이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9. 『인조실록』권 15 인조5년(1627), 1월 29일 정유, 강을 건너 행궁에 도착하고, 청 사신이 화친의 뜻을 보이다, 『조선왕조실록』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0. 『인조실록』권 33 인조14년(1636), 12월 14일 갑신, 최명길에게 강화를 청하게 하고 상은 남한 산성에 도착, 강도로 가기로 결정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1. 이겸주, 최명길,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2. 이겸주, 최명길,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유용한 자료

  • 겸주, 최명길,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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