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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정하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194 정묘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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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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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 후금(청)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첫 번 째 전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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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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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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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틈을 타 건주위(建州衛)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누르하치(奴兒哈赤)]]를 추대해 여러 부족을 통합,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양호|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대군으로 후금 토벌에 나서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도 공동 출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조선 선조|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명나라의 쇠퇴와 후금의 발흥이라는 동아(東亞)의 정세 변화를 주시하면서 신중한 중립적 외교 정책을 펴나갔다. 그리하여 [[강홍립|강홍립(姜弘立)]]에게 1만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명군을 돕게 하면서도 형세를 판단, 향배(向背)를 달리할 것을 비밀리에 지시하였다. 명군이 [[사르후전투|사르후전투(薩爾滸戰鬪)]]에서 대패한 뒤 계속 수세에 몰리자, [[강홍립]]은 후금과 휴전하고 출병이 불가피했음을 해명하였다. 그 결과 명나라 장수 [[모문룡|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설진(設鎭)해 요동 수복을 꾀하는 거북한 사태가 벌어졌지만,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별다른 사달이 일어나지 않았다.<ref>정하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194 정묘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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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화된 조선과 후금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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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서인]]이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그들은 광해군 때의 중립적 대외 정책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후금과의 관계를 끊는 한편, [[모문룡]]을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였다. 후금은 배후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고, 명나라에 이어 조선과도 경제 교류의 길이 막혀 극심한 물자 부족에 허덕이게 되었다. 때문에 후금은 무력적인 수단으로 이를 타개할 기회를 노렸다.<ref>정하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194 정묘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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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조선과 [[정묘호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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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선에서는 [[인조반정]] 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괄(李适)]]이 [[이괄의 난|반란]]을 일으켜 그 잔당이 후금과 내통하였다. 이에 후금 즉, 청나라 [[청 태종]]은 1627년 1월 [[아민|아민(阿敏)]]에게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조선군은 [[능한산성|능한산성(凌漢山城)]]을 비롯, 곳곳에서 후금군을 저지하는 데 실패하고, [[모문룡]]도 [[신미도|신미도(身彌島)]]로 도주하였다. [[조선 인조|인조]]는 [[장만|장만(張晩)]]을 도체찰사로 삼아 적을 막게 하고, 여러 신하를 각지에 파견해 근군(勤軍)을 모집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후금군은 남진을 계속, 안주성을 점령하고 다시 평양을 거쳐 황주까지 진출하였다. 평산에 포진했던 [[장만]]은 개성으로 후퇴하였다.<ref>정하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194 정묘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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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후금의 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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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가 극도로 불리하자 [[김상용|김상용(金尙容)]]이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어 서울을 지키고, [[소현세자|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남하하였다. 이 사이 [[조선 인조|인조]]는 전란을 피해 강화도로 들어갔다. 한편,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하는 등 분전하였다. 특히 [[정봉수|정봉수(鄭鳳壽)]]·[[이립|이립(李立)]]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는 데 따르는 후방의 위협을 염려하게 되었고, 조선 또한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후금군은 평산에서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곧 철병하고,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화약을 맺되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으로 3월 3일 두 나라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다.<ref>정하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194 정묘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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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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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틈을 타 건주위(建州衛)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누르하치(奴兒哈赤)]]를 추대해 여러 부족을 통합,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양호|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대군으로 후금 토벌에 나서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도 공동 출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조선에서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경향이 고조되었지만, [[조선 선조|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명나라의 쇠퇴와 후금의 발흥이라는 동아(東亞)의 정세 변화를 주시하면서 신중한 중립적 외교 정책을 펴나갔다. 그리하여 [[강홍립|강홍립(姜弘立)]]에게 1만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명군을 돕게 하면서도 형세를 판단, 향배(向背)를 달리할 것을 비밀리에 지시하였다. 명군이 [[사르후전투|사르후전투(薩爾滸戰鬪)]]에서 대패한 뒤 계속 수세에 몰리자, [[강홍립]]은 후금과 휴전하고 출병이 불가피했음을 해명하였다. 그 결과 명나라 장수 [[모문룡|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설진(設鎭)해 요동 수복을 꾀하는 거북한 사태가 벌어졌지만,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별다른 사달이 일어나지 않았다.<ref>정하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194 정묘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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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후 악화된 조선과 후금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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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은 [[서인]]들은 광해군 때의 대외 정책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후금과의 관계를 끊는 한편, [[모문룡]]을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후금은 배후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고, 명나라에 이어 조선과도 경제 교류의 길이 막혀 극심한 물자 부족에 허덕이게 되었다. 때문에 후금은 무력적인 수단으로 이를 타개할 기회를 노렸다.<ref>정하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194 정묘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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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후 조선의 불안과 [[정묘호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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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선에서는 [[인조반정]] 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그 잔당이 후금과 내통하게 되었다. 이에 즉위 전부터 조선에 대한 화친 방침에 반대, 주전론을 주장해왔던 청나라 [[청 숭덕제|태종]]은 더욱 침략의 뜻을 굳혀 1627년 1월 [[아민|아민(阿敏)]]에게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한 후금군의 주력 부대는 용천·선천을 거쳐 안주성 방면으로 남하하고, 일부 병력은 가도의 [[모문룡]]을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곽산의 [[능한산성|능한산성(凌漢山城)]]을 비롯, 곳곳에서 후금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가도의 [[모문룡]]도 [[신미도|신미도(身彌島)]]로 패주하였다. 후금군의 침입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선 인조|인조]]는 [[장만|장만(張晩)]]을 도체찰사로 삼아 적을 막게 하고, 여러 신하를 각지에 파견해 근군(勤軍)을 모집하였다. 그 동안 후금군은 남진을 계속, 안주성을 점령하고 다시 평양을 거쳐 황주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평산에 포진했던 [[장만]]은 개성으로 후퇴하였다.<ref>정하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194 정묘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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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후금 화약을 맺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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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가 극도로 불리하자 [[김상용|김상용(金尙容)]]이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어 서울을 지키고, [[소현세자|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남하하였다. 이 사이 [[조선 인조|인조]]는 전란을 피해 강화도로 들어갔다. 한편,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하는 등 분전하였다. 특히 [[정봉수|정봉수(鄭鳳壽)]]·[[이립|이립(李立)]]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는 데 따르는 후방의 위협을 염려하게 되었고, 조선은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남지 않았다. 이에 후금군은 평산 이남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곧 철병하고,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으로 3월 3일 두 나라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다.<ref>정하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194 정묘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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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끝났으나 불안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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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후금의 화약은 두 나라가 다같이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은 후금과의 형제 관계를 굴욕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더욱이 막대한 세폐(歲幣)와 수시로 강요하는 물자의 조달에 따르는 과중한 경제적 부담에 반발, 배금의 길을 굳히게 되었다. 후금 역시 세폐와 중강(中江)의 개시(開市) 등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되었지만, [[모문룡]]의 세력을 공멸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배금 경향이 날로 고조되는 데 불안을 느꼈다. 이러한 양국의 관계는 후금이 더욱 팽창된 세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강압적인 태도를 강화함으로써 악화일로를 걷게 되어 결국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ref>정하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194 정묘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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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C037/C037.htm '''"백마산성을 지킨 임경업장군"(신영상)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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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글팀_정묘호란_01_정묘호란_전쟁_상황도.jpg | 정묘호란 전쟁 상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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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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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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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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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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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내현, 「정묘호란 의병장 정봉수의 활약과 조선왕조의 인식」, 『한국사학보』,Vol.42, No.-, 고려사학회, 2011, 113-139쪽.
 +
**김용흠, 「정묘호란(丁卯胡亂)과 주화(主和),척화(斥和) 논쟁」, 『韓國思想史學』, Vol.26, No.-, 한국사상사학회, 2006, 159-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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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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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194 정묘호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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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한글고문서]]
 +
[[분류:사건]]

2017년 11월 27일 (월) 09:23 기준 최신판

정묘호란(丁卯胡亂)
정하명, "정묘호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정묘호란
한자표기 丁卯胡亂
유형 사건
시대 조선시대
날짜 1627년
관련인물 조선 인조, 임경업, 최명길, 이원익, 이괄
관련유물유적 어머니 신천강씨가 딸 순천김씨에게 보낸 한글편지 , 산성일기


정의

1627년 후금(청)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첫 번 째 전쟁을 말한다.

내용

악화된 조선과 후금의 관계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서인이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그들은 광해군 때의 중립적 대외 정책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후금과의 관계를 끊는 한편, 모문룡을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였다. 후금은 배후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고, 명나라에 이어 조선과도 경제 교류의 길이 막혀 극심한 물자 부족에 허덕이게 되었다. 때문에 후금은 무력적인 수단으로 이를 타개할 기회를 노렸다.[1]

불안한 조선과 정묘호란의 시작

한편 조선에서는 인조반정 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반란을 일으켜 그 잔당이 후금과 내통하였다. 이에 후금 즉, 청나라 청 태종은 1627년 1월 아민(阿敏)에게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조선군은 능한산성(凌漢山城)을 비롯, 곳곳에서 후금군을 저지하는 데 실패하고, 모문룡신미도(身彌島)로 도주하였다. 인조장만(張晩)을 도체찰사로 삼아 적을 막게 하고, 여러 신하를 각지에 파견해 근군(勤軍)을 모집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후금군은 남진을 계속, 안주성을 점령하고 다시 평양을 거쳐 황주까지 진출하였다. 평산에 포진했던 장만은 개성으로 후퇴하였다.[2]

조선과 후금의 화약

전세가 극도로 불리하자 김상용(金尙容)이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어 서울을 지키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남하하였다. 이 사이 인조는 전란을 피해 강화도로 들어갔다. 한편,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하는 등 분전하였다. 특히 정봉수(鄭鳳壽)·이립(李立)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는 데 따르는 후방의 위협을 염려하게 되었고, 조선 또한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후금군은 평산에서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곧 철병하고,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화약을 맺되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으로 3월 3일 두 나라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다.[3]

지식 관계망

  • 산성일기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정묘호란 친명배금 정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병자호란 친명배금 정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조선 인조반정 친명배금 정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조선 인조반정 조선 인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조선 인조반정 이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이괄의 난 이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정묘호란 이괄의 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정묘호란 청 숭덕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병자호란 청 숭덕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정묘호란 아민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정묘호란 모문룡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정묘호란 장만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정묘호란 김상용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조선 인조 소헌세자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정묘호란 정봉수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정묘호란 이립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정묘호란 산성일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정묘호란 송시열 분재 편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1627년 1월-3월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1636년 12월-1637년 1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정하명, "정묘호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정하명, "정묘호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정하명, "정묘호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권내현, 「정묘호란 의병장 정봉수의 활약과 조선왕조의 인식」, 『한국사학보』,Vol.42, No.-, 고려사학회, 2011, 113-139쪽.
    • 김용흠, 「정묘호란(丁卯胡亂)과 주화(主和),척화(斥和) 논쟁」, 『韓國思想史學』, Vol.26, No.-, 한국사상사학회, 2006, 159-199쪽.
  • 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 정하명, "정묘호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