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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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0월 26일 (목) 21:3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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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세(鄭經世)
한글팀 일러 조선중년문관.png
대표명칭 정경세
한자표기 鄭經世
생몰년 1563-1633
본관 진주(晉州)
우복(愚伏)
경임(景任)
시대 조선
국적 조선
대표저서 우복집
정여관(鄭汝寬)
이가(李軻)의 딸 합천 이씨
성격 문신
유형 학자


정의

정경세는 조선 후기 학자로서 이황-류성룡-정경세로 이어지는 영남학맥의 거두이다.

내용

생애

정경세의 호는 우복이며 진주정씨 정여관의 아들이다. 정경세는 류성룡의 문인으로서 이황-류성룡-정경세로 이어지는 영남학통의 적전이었다. 정경세는 영남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인조조에 이조판서에 올라 일국의 전형을 담당하고 양관대제학으로서 한 시대의 문병 을잡았던 매우 현달한 인물이었다. [1]

관직활동

1586년 알성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후 예문관 검열, 홍문관 교리, 승정원 좌승지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변화하자 3월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이후 대사헌, 이조판서, 대제학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공정한 도리를 확장하고 요행을 억제하며, 인재를 널리 취하고 사론(士論)을 조정하여 국정에 심혈을 기울였다.[2]

대외활동

1593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에는 의병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여 김성일에게 차임되기도 하였다. 1609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갔으며, 이듬해 돌아와서는 화약(火藥)의 매입을 예년의 갑절로 하도록 병부(兵部)에 글을 올렸다. 이후 명나라와 교섭하여 그 수입에 힘썼기에 특지(特旨)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칭호를 받았다. 사행의 일을 기록한 연행만록에 포함된 「농강천표」가 2016년 장서각 한글특별전에 전시되었다.[3]

평가

정경세는 주자학 전반에 조예가 깊었지만 특히 예학에 정통하였다. 17세기 초반 중앙 정계와 영남학파에 미친 정경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는 학식, 문장과 풍부한 정치적 경험을 바탕으로 류성룡의 사후에는 영남남인의 구심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학문적으로는 이황-류성룡으로 이어지는 학통의 정맥으로서 흔히 이황의 3고제로 불리는 류성룡, 김성일, 정구 3인이 모두 사망하는 1620년 이후에는 장현광과 더불어 영남학파의 대들보 역할을 하였다. .[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연행만록 정경세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류성룡 정경세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정경세 임진왜란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정경세 김성일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이황 류성룡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정경세 진주정씨 우복종택 A는 B와 관련이 있다 A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 내용
1586년 정경세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3년 정경세가 의병을 이끌고 임진왜란에 참여하였다.
1609년 정경세가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변화하여 정경세가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73쪽.
  2. 김도기, "정경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김도기, "정경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