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구 석곽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138번째 줄: 138번째 줄:
 
3. ‘동북·서북·서남공정’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하여 중국의 분열을 방지하고 하나의 큰 역사의 틀에 묶어놓는 역사공정이다. 중국의 동북삼성(흑룡강성·길림성·요녕성)에서 일어난 과거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는 ‘동북공정’, 소수민족인 위구르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신장 웨이우얼 지역의 역사를 편입하는 ‘서북공정’, 소수민족인 티베트인들이 오래 역사를 유지해왔던 티베트 지역의 역사를 편입하는 ‘서남공정’이 그 내용이다.
 
3. ‘동북·서북·서남공정’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하여 중국의 분열을 방지하고 하나의 큰 역사의 틀에 묶어놓는 역사공정이다. 중국의 동북삼성(흑룡강성·길림성·요녕성)에서 일어난 과거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는 ‘동북공정’, 소수민족인 위구르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신장 웨이우얼 지역의 역사를 편입하는 ‘서북공정’, 소수민족인 티베트인들이 오래 역사를 유지해왔던 티베트 지역의 역사를 편입하는 ‘서남공정’이 그 내용이다.
  
 +
동양에서 용의 기원에 대해 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서이족]]의 토템신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서이족은 황하유역에서 뱀과 가까이 살면서 공포의 대상인 뱀을 회유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자신들의 조상으로 삼고 숭배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뱀은 자연계의 뱀의 형상이 아닌 용으로 신격화되었고 보족의 풍습, 금기들을 용으로 상징화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사공포설이나 사신신앙설도 용의 기원을 뱀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
 +
또한 뱀은 자연계에 실존하지만 용은 상상의 산물로서 상룡, 마룡, 어룡 등과 같이 실존하는 동물에 다른 속성이 첨가, 혼합, 왜곡되어 새로운 형태로 되었다고 하여 용충설, 용수설, 용어설, 용조설 등이 보여 지고 있다.
 +
 +
용이 번개, 무지개, 천둥, 구름 등 자연천상의 신격화의 결과로 생성되었다는 용위섬전설은 공중에 나타난 번개의 형상을 보고 그것을 기점으로 가늘고 긴 네발 달린 신비한 용을 상상해냈다는 설이다. 용권설에서는 바다에서 태풍이 불 때 바닷물이 회오리바람과 함께 휘감겨 올라가는 현상, 즉 기상상이 구체화 하여 용을 상상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이러한 용위섬전설과 용권설은 용의 기원을 뱀의 형태 발전에서 보다는 각 민족의 풍토 속에서 기상에 의한 자연적인 발생으로 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
 +
용에 관한 기록 가운데 가장 연대가 빠른 것은 중국 상나라 때 갑골문자에 남아있는 것이다. 갑골문자에서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용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글자가 70여 자나 되어 적어도 상나라 때에는 용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
 +
상나라 사람들은 용머리에 뿔을 달아 주었다. 이것은 상나라 사람들이 지닌 뿔 숭배의 원시 종교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나라 사람들은 뿔은 특별한 신성을 의미한다. 뿔이 없는 동물에도 뿔을 달아 주었는데 이는 신통한 동물에게 신성을 부가하여 천지를 교류하는 사명을 잘 완수하도록 원했기 때문이다. 이로서 용은 모방된 자연 생물의 울타리에서 뛰쳐나와 환상과 창조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
 +
상나라 때의 용은 통일된 것이 아니라 유형별로 차이가 있으며 구조도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올수록 점점 복잡해지며 송나라 때에는 용의 모습이 구체화 된다.
 +
 +
한마디로 상나라 때 용의 모습과 송나라 때 용의 모습은 큰 차이가 난다. 이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조금씩 용의 모습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이러한 변화는 만일 상나라 이전에도 용이 있었다면 상나라 때와는 그 모습이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
 +
중국인들은 삼성타라촌에서 발견된 C자형 옥저룡, C자형 옥으로 만든 돼지용이라는 뜻으로 최초의 ‘중화제일용’으로 생각한다. 용의 모습의 원형으로는 도마뱀, 뱀, 악어, 말, 소, 뱀 등 많은 동물이 있다. 그런데 옥저룡을 원시용으로 보는 것은 용의 원형이 돼지라는 것을 뜻한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돼지가 중요시된 것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이 돼지를 기우제 지낼 때 사용했는데, 이런 점은 홍산 우하량 지역의 동산치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돼지 뼈로도 증명된다. 용은 물을 뜻하고 돼지 또한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결국 용과 돼지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는 논리다.
 +
 +
1971년 중국 내몽고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촌(三星他拉村)의 홍산 문화유적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높이 26cm의 ‘C자형 옥저룡(玉猪龍)’이 발견됐다.
 +
 +
중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이 옥조룡(玉猪龍으로도 적음)은 묵록색을 띠며 길이 26센티미터, 무게는 1킬로그램으로 완벽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추후에 굽어진 형태가 마치 영어 문자 C와 같아 C형 옥저룡(玉猪龍)이라고도 불린다. 이를 옥저룡이라고 부르는 것은 옥으로 만든 돼지 용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
이 대형 옥룡은 하나의 옥 원료의 조각으로 입술부분은 앞으로 튀어나오고 약간 위로 굽었으며, 입은 꼭 닫았고 두 눈은 돌출돼 마름쇠형을 띈다. 용체의 횡단면은 타원형을 띠고 용의 등부에는 단공이 있으며 부조(浮雕)와 전조(淺雕)수법의 운용이 섬세하고, 통체를 잘 다듬어 빛나고 매끄럽다.
 +
 +
옥저룡(玉猪龍)이란 이름은 중국의 손수도 박사가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가 옥저룡이 원시용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보아도 용을 돼지로 보는 견해는 매우 많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에 이미 농경사회로 들어섰으므로 적어도 돼지를 사육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타당하게 여겨졌다.
 +
 +
고대 농경사회에서 돼지가 중요시된 것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주역』에는 ‘용은 구름이다’ 또는 ‘용은 물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용이 물과 동일시됐는데 물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물 즉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돼지를 사용했다고 추측한다. 이런 점은 우하량 지역의 동산치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돼지 뼈로도 증명된다.
 +
 +
고대인들이 돼지를 기우제 지낼 때 사용했는데, 물이나 용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볼 때 돼지 또한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됐기 때문에 결국 용과 돼지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는 논리이다.
 +
 +
손보기의 용에 대한 견해가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오늘날 보는 용은 후대로 갈수록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 원시적인 형태가 홍산문화에서 발원됐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오천년역사(中華五千年歷史)’를 주장할 때도 용의 탄생을 홍산문화와 연계시키고 있다. 즉 요서지방의 홍산문화 유적에서 이와 비슷한 기물 또는 문양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자연스럽게 용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
 +
중국인들이 옥룡을 중요시하는 것은 옥룡을 홍산인들이 숭배하던 신의 형상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인들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용이 홍산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중국인들은 홍산인이 중국에서 최초로 용을 신령으로 숭배한 민족이며 이후 용이 신격화돼 중원지역으로 전파돼 현재 중국인들이 용을 생활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
 +
이와 같이 홍산의 용이 중국 용의 시조로 확정되기까지에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1987년 하남성(河南省) 복양시(?陽市) 서수파(西水坡) 앙소문화유적지 1호 묘에서 놀라운 유물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흰색의 조개껍질로 정성스럽게 형상을 만들어 놓은 원용문으로 된 용형상물로 이를 방소룡(蚌塑龍)이라고도 부른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이 용은 힘차게 앞으로 기어가는 느낌을 준다. 특히 무덤 주인의 좌측에는 용의 형상이 있고 우측에는 호랑이 형상이 있어서 보다 큰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음양오행론과 풍수지리에 입각한 좌청룡, 우백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학근은 이 발굴을 근거로 사신도(四神圖)의 기원이 서수파에서 기원한다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
 +
탄소연대측정에 의해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촌(三星他拉村)의 [[홍산문화]] 문화유적보다 빠른 기원전 4460±135년으로 확인되자 ‘중화제일용’의 자리가 바뀌었다. 그러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를 ‘천하제일용’으로 부르기도 한다. 복양시에서는 재빨리 천하제일용 발굴을 기념해 ‘중국 용의 고향’이라는 ‘중화용향(中華龍鄕)'이란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
 +
그러나 이러한 혼란도 잠시 1994년에 또 다시 놀라운 용 형상물이 사해문화에서 발견됐다. 사해문화는 요령성 서부 의무려산 동쪽의 부신(阜新) 몽고족 자치현에서 발달된 문화로 흥륭와에서 세계 최초의 옥 귀걸이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제일옥’이 발견된 지역이며 역시 흥륭와에서 ‘중화제일촌’이 발견되기 전까지 ‘요하제일촌’으로 불리던 집단 주거지가 발견된 곳이다.
 +
 +
<사해문화의 용무늬 토기>
 +
 +
사해유적지에서 발견된 용형상물을 석소룡(石塑龍)이라고 부르는데 길이가 19.7미터, 넓이가 1~2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그런데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석소룡이 서수파에서 발견된 ‘중화제일용’보다 무려 1200년이나 앞선 기원전 5,6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
 +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학자들은 서수파의 것이 중원의 앙소문화에서 발견됐음을 우대해 서수파의 방소룡을 ‘중화제일용’으로 계속 고집했다. 그러나 과학기술에 의한 연대측정 결과를 마냥 거부할 수는 없는 일로 결국 2004년 중국학자들은 사해유적에서 발굴된 용형상물을 ‘중화제일용’으로 확정했다. ‘중화제일용’의 영예가 홍산문화 쪽으로 다시 돌려진 것이다.
 +
 +
우리가 아는 용은 후대로 갈수록 많은 변화를 겪었다. 손 박사는 그 원시적인 형태가 홍산문화에서 발원됐다고 주장했다.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오천년역사’(中華五千年歷史)를 주장하며 용의 탄생을 홍산문화와 연계시키고 있다.
 +
 +
붉은색 산으로 유명한 내몽고 적봉시(赤峰市) 오한기(敖漢旗) 보국토향 인근의 흥륭와촌에서 발견된 흥룡화문화는 기원전 6200년까지 올라가는 신석기문화 유적이다. 방어 용도의 성과 대형 주거지 등이 발견됐으며 현재 중국 국경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신석기 집단 주거지다. 이곳에서 세계 최초의 옥귀걸이가 출토됐다. 중국은 이곳을 ‘중화원고제일촌’(中華遠古第一村) 또는 ‘화하제일촌’(華夏第一村)이라 부른다.
 +
 +
흥륭와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옥은 적봉시에서 동쪽으로 450km나 떨어져 있는 압록강에 인접한 요령성 수암(岫岩)에서 나오는 ‘수암옥’이다. 이는 흥륭와문화 시대인 기원전 6000년경에 이미 만주 벌판 서쪽과 동쪽이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
 +
이후 사해문화(査海文化, 기원전 5600~5200), 부하문화(富河文化, 기원전 5200~기원전5000년), 조보구문화(趙寶溝文化, 기원전 5000~기원전 4400년)을 거쳐 국가단계로 진입했다고 보이는 [[홍산문화]](紅山文化, 기원전 4500~기원전 3000년)가 꽃피게 된다. 중국학자들은 요하 일대의 신석기문화를 모두 넓은 의미의 홍산문화라고 부르기도 하며 홍산문화를 석기와 청동기를 같이 사용하는 시대로 간주한다.
 +
 +
[[홍산문화]]의 중심지였던 조양시는 요령의 서쪽에 위치한다. 1996년 새의 공룡진화설을 뒷받침하는 ‘공룡중화용조’(시노사우롭테릭스)가 발견돼 세계 최초의 새인 시조새가 날아오른 지역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이후 계속하여 시조새 화석들이 발견되어 ‘세계고생물화석의 보고’로도 알려져 있다.
 +
 +
[[홍산문화]]와 상문화 간의 시간적인 차이는 약 2천 년, 거기다 지역적으로도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손 박사는 시공차를 극복하기 위해 요서지역의 하가점하층문화의 채회도에서 나타나는 짐승무늬 도안을 용의 모습으로 추정하고 이것이 이리두문화와 상문화로 전해졌다고 주장했다.
 +
이 주장은 찬반 논란에 직면했다. 하가점하층문화의 채회도에서 나타나는 짐승의 얼굴 모습을 용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 현대의 용 뿐 아니라 원시용과도 전혀 닮지 않았다는 얘기다.
 +
 +
Human Genetics에 발표된 김욱교수의 논문을 보면 한국인의 유전자가 한족(베이징인)보다도, 더 남쪽의 운남인과 가깝고 심지어 베트남인과도 매우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다고 한다.
 +
 +
스펜서 교수의 유전자 이동지도에 의하면, 중국인은 M175유형의 돌연변이형을 가지는데, 티벳고원에서 남쪽으로 이주하여, 동남아를 거친 후 북상하여, 북중국지역에서는 다시 아형인 M122형 돌연변이를 가진다. 김욱교수가 북경인과 운남인을 분류한 이유는 두 지역의 언어가 같은 티벳-중국어족이라하더라도 영화의 자막 처리를 못하면 보지못할 정도로 언어가 매우 다르며 실제로 얼굴 모습도 중국내에서 남방계, 북방계를 나눌 정도로 꽤 다르기 때문이다.
 +
 +
그런데, 지역의 위치상 사실, 우리나라 사람은 북방계 중국인과 더 가까워야 한다. 그런데, 김욱교수의 논문은 거꾸로 한국인의 유전자는 남방계 중국인과 가까움을 실증하고 있다. 즉 한국인에게는 M122형보다 오래된 M175유형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전자 증거를 굳이 들지않더라도 한국어의 한자발음이 표준 북경어보다 남부 지방의 광동어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장개석을 북경어로 하면 장제스가 되지만 광동어로 하면 장카이섹이 된다.
 +
 +
최근 [[홍산문화]]나 앙소문화보다 오래된 선홍산문화유적인 발해만의 "사해문화유적"에서는 빗살무늬토기의 변형인 지자문토기가 발견되고, 특이할 만한 사실은 용에 대한 토템이 있다는 사실이며, 문화유적의 특징상 "모계사회"의 여군장 제도를 가진 사회라고 한다.
 +
 +
용 토템의 진실을 캐는데는 중국이 아니라 "베트남"신화가 더 도움이 된다.
 +
 +
"神農氏의 三世孫 데 밍(帝明)이 데 응이(帝宜)를 낳고, 얼마 후에 남방을 순방하던 중 응우 링(五嶺)에 이르렀다. 그는 이곳에서 부 띠엔(惨僊)의 딸과 결혼하여 록 뚝(綠續)을 낳았다. 록 뚝이 총명하기 그지없기에 데 밍은 몹시 사랑하여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록 뚝이 극구 사절하기에 데 밍은 하는 수 없이 長男 데 응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북방을 다스리게 한 다음, 次男 록 뚝을 낑 즈엉 브엉(涇陽王)에 봉하여 씩 꾸이(赤鬼, 운남성에서 바다에 이르는 지역)라고 하는 남방을 다스리도록 했다. 낑 즈엉 브엉은 동 딩 꾸언(洞庭君, 용왕)의 딸 턴 롱(神龍)과 혼인하여 락 롱 꾸언(怷龍君, 출룡군)을 낳았다. 어려서 숭 람이라고 불리웠던 락 롱 꾸언은 데 라이(북방을 다스린 데 응이의 후손 임금)의 딸 어우 꺼(垯姬, 달희)와 결혼하여 100개들이 알 하나를 낳았다. 그 알에서 100명의 아들이 나왔는데 이들이 百越族의 선조인 것이다. 어느날 왕이 어우 꺼에게 말하기를 "나는 용의 종족이요, 당신은 산의 종족인지라 水와 火는 서로 다른 까닭에 합하는게 실로 어렵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즉시 이들은 헤어졌는데 어우 꺼는 50명의 아들들을 데리고 산으로, 락 롱 꾸언은 나머지 50명을 데리고 남쪽 바다로 갔다. 이 때 이들은 장남을 훙 브엉(雄王)으로 봉하여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일백명 아들 중 장남은 기원전 2879년 락비엣 족의 왕이 되는데 이 왕국이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반랑(Van Lang)왕국으로 명명 된다. 이 반랑 왕국은 홍하 델타지역을 중심으로 턴롱(天龍)의 후예로서 웅왕이라고 불리우는 역대왕이 통치하며 기원전 258년까지 2,600여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하나 그 연대는 확실 하지 않다.
 +
 +
분명히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난생신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발음이 좀 어렵지만, 티벳-중국어족인 베트남인은 "신농"씨와 관련이 있는 벼농사의 농경민임과 동시에, 바다의 "용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토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의 혼혈인이다. 베트남 민족에 영향을 준 용토템의 바다로 부터 들어온 오스트로네시아인은 거꾸로 "한반도"기원의 "해상 남방 이주경로"를 가진 집단을 일컫는 것으로 본다.
 +
 +
용은 가상의 동물이다. 어로민족 특히 남쪽으로 내려간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의 경우에는 에스키모어족과는 달리 태풍, 회오리와도 같은 날씨변동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공포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태호 복희씨의 직책이 "우사"란 이야기 한마디가 어로민족의 "풍어기원"의 개념과 "벼농사의 기우제"의 개념이 복합된 "동해 용왕제"를 수행하는 북방 알타이계 "샤먼"이었다는 말로 통한다. 무엇보다 복희와 여왜가 원형으로 소용돌이치는 "팔괘와 태극"이라는 동양사상의 시조라는 사실이다.
  
 
== 역대 [[서국]](徐國) 국왕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

2024년 3월 24일 (일) 20:45 기준 최신판

서가구 석곽묘(徐家溝 石槨墓)=훙산문화(紅山文化)=홍산문화(紅山文化)


요령성(遼寧省) 대련시(大連市) 장해현(長海縣) 대장산도진(大長山島鎭) 합선도(哈仙島) 서가구촌(徐家溝村)에 있는 청동기 시대[고조선 시대]의 석곽묘.

서가구 석곽묘는 요령성 대련시 장해현 서가구촌 서북쪽 단애처에 있는 청동기 시대의 석곽묘이다. 장해현 일대 윤가촌 유형(尹家村類型)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서가구 석곽묘는 요령성 대련시 장해현 대장산도진 합선도 서가구촌 서북쪽 민가 뒤편 단애부에 위치하고 있다.

서가구 석곽묘는 1979년 서가구촌의 주민이 자신의 집 뒤 단애처에서 괴석과 함께 청동기가 떨어져 내린 것을 발견하고 신고하여 1980년 장해현 문화관(長海縣文化館)에서 수습 조사하였다.

서가구 석곽묘의 무덤 구덩이는 길이 1.99m, 너비 0.9m 가량이다. 석곽의 규모와 구조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서가구 석곽묘에서는 중세형 동검 1점, 도씨검(桃氏劍) 5점, 청동 칼집 부속 1점, 청동제 검 손잡이 1점, 청동 도끼 1점, 청동 끌 1점이 출토되었다.

서가구 석곽묘는 현재 유적의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

서가구 석곽묘는 상마석 토광묘군과 함께 장해현 일대의 청동기 시대 말기~초기 철기 시대 물질문화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서가구 석곽묘는 장해현 일대의 윤가촌 유형(尹家村類型) 표지 유적에 속한다.

한편 서가구 석곽묘를 비롯한 장해현 일대의 비파형 동검과 중세형 동검 등 출토 유적을 고조선 유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중국 네이멍구자치구의 츠펑시(赤峰市)의 훙산(紅山)을 중심으로 한 요서(遼西) 지역에서 생성된 신석기시대 위주의 문화집합체를 말한다. 츠펑시는 외곽의 7개 기(旗)와 2개 현(縣)을 거느리고 있는데, 총 면적은 9만km2에 달하고, 청대의 현에서 1947년 시로 승격하였으며 시 중심부에 훙산구 등 3개 구가 있다.

‘츠펑’은 ‘붉은 산봉우리’란 뜻으로, 이 말은 시 동북쪽에 있는 ‘붉은 산’, 즉 ‘훙산(몽골어로는 ‘우란하따’, 즉 암홍색 화강암 산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는데, 이곳에서 훙산문화가 발견되었다. 이 문화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의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다.

그는 1906년 츠펑 일대(당시는 러허성(熱河省))에 대한 지표(地表)조사를 하다가 많은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積石墓)를 발견하였다. 그의 조사는 만주와 네이멍구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침략을 위한 정지작업의 일환이었다.

20세기 초부터 일본에서는 교토대학(京都大學)을 중심으로 이른바 ‘만주학(滿洲學)’이란 하나의 관학(官學)이 발족되어 동북 3성에 관한 정보 탐지에 악용되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츠펑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지역에서 굉장한 유물들이 잇달아 발굴되었다. 1955년에는 이러한 유물들이 시사하는 문화 일체를 ‘훙산문화’라고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의 발굴 결과를 놓고 보면, 훙산문화의 포괄 범위는 동쪽으로는 차오양(朝陽), 남쪽은 발해만, 서쪽은 네이멍구 초원, 북쪽은 다싱안링 남록까지의 광범위한 지역이다. 이 문화는 신석기시대 문화가 주종이지만, 청동기시대나 동석(銅石)병용시대 문화 등 여러 문화를 함께 아우르고 있다. 문화의 성격도 초기 농경문화와 유목문화, 정주농경문화 등이 섞여 있다. 15만 년 전 인류의 거주를 비롯한 구석기문화도 관련되어 있다.

이 문화집합체를 구성하고 있는 주요 문화들로는 ‘중화 제1촌’ ‘중화 시조취락(始祖聚落)’이라는 싱룽와(興隆窪) 문화(8,000년 전), 훙산문화(6,000년 전), 뉴허량(牛河梁) 문화(5,000년 전), 샤오허얜(小河沿) 문화(4,900년 전), 씨야지야디앤(夏家店) 상 · 하층 문화(4,200~3,300년 전), 링허(凌河) 문화(2,800년 전) 등이 있다.

훙산문화 유적의 밀도는 문화의 유구성과 다양성을 말해주는데, 예를 들면 츠펑 인근의 아오한(敖漢) 한 기(旗)에만 옥과 토기로 유명한 싱룽와 문화와 샤오허얜 문화, 씨야지야디앤 문화가 얼기설기 얽혀 있다. 8,300km2의 이 아오한기에만도 신석기 유적 1,000여 곳, 청동기 유적 2,000여 곳이 있다.

훙산문화는 몇가지 내용에서 ‘가장 오래됨’을 자랑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이른바 ‘세계 4대 문명’을 앞질렀다는 것이다. 다링(大凌)강 서쪽 강안에 위치한 당산(唐山) 절벽에 있는 비둘기 동굴(하쯔퉁, 鴿子洞)에서는 15만년 전 원시인간이 불을 사용한 흔적과 함께 300여 점의 석기류와 호랑이 · 야생말 · 산양 등 30가지가 넘는 포유동물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60km쯤 떨어진 젠핑(建平)현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5만년 전 ‘젠핑인’의 생활 모습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구석기시대를 이어 나타난 것이 훙산문화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아오한기의 싱룽와 문화다. ‘중화 제1촌’ ‘중화 시조취락’, 즉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조 마을이라는 이 마을은 175채의 집이 10채 단위로 줄지어 계획도시처럼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주위는 마치 해자(垓字)처럼 도랑으로 에워싸여 있다. 여기서 빗살무늬토기와 옥기가 발견되었다.

사실 인류 최초의 농경문화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이라크)에서도 이렇게 정연하게 계획된 촌락이 발견된 적은 없다. 1983~1994년에 모두 7차례에 걸쳐 발굴한 이 마을의 면적은 무려 4만m2에 달하는데, 집 자리 규모는 보통 60m2(약 18평)이며 한복판에 있는 가장 큰 두 집은 140m2나 된다. 이 두 집에는 우두머리가 살았거나, 집회장이나 종교의식의 장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집마다 생산도구나 취사용구를 갖추고 있으며, 식품 저장용 움막까지 갖추고 있다. 같은 열에 속하는 가족끼리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주민들은 경제적 자립을 유지하고 일정한 사회적 조직과 활동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 일종의 씨족사회를 연상케 한다.

‘중국 제1 마을’이라고 하는 싱룽와(興隆洼) 마을 유적(8,000년 전) 여기서 200km 떨어진 차하이(査海)에서도 55채의 주거지가 발견되었는데, 구조나 유물들은 싱룽와와 대동소이하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이 두 곳을 한데 묶어 싱룽와 · 차하이 문화라고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돼지가 사람과 함께 순장된 사실인데, 이것은 돼지가 일찍부터 종교제의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옥 귀고리와 옥룡(玉龍)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옥기라고 해서 츠펑시의 상징물이 되고 있다.

이상의 몇가지 예에서 보듯, 훙산문화는 화하족(華夏族)이 창조한 중원의 황허 문명보다 더 오래된 문화라는 것이 주창자들의 주장이다. 여러 문화 중 훙산문화(6,000년 전)를 기준으로 잡더라도 1천여 년을 앞선 것인데,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문명보다 그 편년이 더 올라가는 셈이다. 훙산문화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라고 자랑하는 이유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훙산문화가 화하족이 창조한 중원문화와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채도처럼 관련된 유물도 있지만, 상당히 다른 점도 있다. 예컨대,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나 적석총(積石塚) 같은 유물이 중원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1983년 뉴허량 출토 채소(彩塑) 여신상 훙산문화의 외연성(外延性)과 관련해 특기할 만한 사항은 비너스(Venus)상의 발견이다. 1979년 늦봄 어느 날, 훙산문화의 중심에 자리한 커쭈어(喀左)현 둥산주이(東山嘴)에서 대형 석조제단(石造祭壇)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출토된 유물 중에는 중국에서 처음 보는 흙으로 빚은 여인 나체 소상(塑像) 2점이 끼어 있어 학계의 큰 주목을 끌었다.

두 점 모두 머리부분이 떨어져나가 완전한 형태는 알 수 없다. 잔해의 높이는 각각 5cm와 5.8cm이고, 배와 엉덩이가 불쑥 튀어나온 임신부형 환조(丸彫) 조형물로, 제작 연대는 5천여 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이 발굴에 이어 1983년 둥산주이 서쪽 50km 떨어진 뉴허량에서도 같은 시기의 여신묘(女神廟) 한 기와 적석총군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서 크기가 서로 다른 여러가지 여인 나체소상 조각들과 함께 여신묘(女神墓) 주실 서쪽에서 사람 키 크기의 채소여신상(彩塑女神像)이 발굴되었다. 머리부분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이 여신상은 정교한 원조(圓雕)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특히 눈망울은 맑고 짙은 푸른빛 구슬을 박아넣어 생기마저 돌아 매우 신비한 감을 준다. 일부 중국 학계에서는 몽골 인종으로 추정되는 이 여인을 ‘훙산인들의 여시조’로, ‘중화민족의 공동조상(공조, 共祖)’으로 간주하면서 ‘삼황오제(三皇五帝)’ 전설이 허구가 아닌 실재라는 증거로까지 확대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3점의 여인상과 비슷한 상, 즉 비너스상이라는 여인 나체상이 유라시아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다. (‘비너스상’항 참고) 훙산문화에서 발견된 나체 여인상이 형태나 상징성에서 유라시아 비너스상과 일맥상통하다는 데는 별 이의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상관성이 문명의 보편성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교류에 의해 생긴 것인지는 연구과제다.

훙산문화와 한반도 훙산문화를 창조한 주역은 중원문화를 창조한 화하족(華夏族)이 아니라 동이족(東夷族)이다. 이러한 근원에서 훙산문화와 한민족(韓民族) 문화의 상관성을 찾게 된다. 이러한 상관성은 선사시대부터 전개되어온 역사과정에서 확증되고 있다. 우선, 암각화의 상관성이다. 한반도의 경우 1971년 경북 울산(蔚山) 천전리(川前里)에서 암각화가 처음 발견된 이래 20여 개소에서 암각화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주로 경북을 비롯한 남부 지역에서 발견되고 중부와 북부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아 한반도 암각화의 기원이나 계통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었다.

그 기원을 연해주 아무르강 유역이나 몽골 초원에서 찾으려고 했으나, ‘한국형 암각화’라고 하는 방패 모양 등 기하학 무늬의 암각화가 나오지 않아 그 시도는 결론을 맺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최근(2007) 훙산문화에 속하는 츠펑시의 츠쟈잉쯔(遲家營子)와 상지팡잉쯔(上機房營子) 등지에서 유사 암각화가 발견됨으로써 한국 암각화의 계통문제가 해명될 것으로 기대된다.

역시 츠펑시에 속한 아오한기(旗)의 쓰자쯔진(四家子鎭)에 있는 초오모우산(草帽山, 초모로 만든 산, 삿갓 산) 뒤편에서 2006년 6월, 5,500년 전의 제사터나 묘터인 적석총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서 얇고 널찍한 돌로 위를 덮은 석관이 여러 구 나왔는데, 지안(集安)의 고구려 장군총이나 경주의 신라고분 같은 적석총과 같은 형태의 유물이다.

시기적으로 적석총에 앞선 빗살무늬토기도 발견되었다.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대표적 토기로, 약 60군데에서 나왔으며, 제작연대는 기원전 6000~300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보아 북방 유라시아 빗살무늬토기대(帶)에 속하며, 시베리아를 거쳐 전래된 것으로 판단된다.

싱룽와 유적을 비롯한 요하 일대 신석기 유적에서도 지자(之字) 무늬의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이것은 이러한 토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 중원문화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뚜렷한 증거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와 함께 빗살무늬토기대의 동단을 이루고 있음을 시사한다.

옥을 세상에서 가장 먼저(8,000년 전) 썼다는 게 훙산문화의 큰 자랑거리의 하나인데, 대표적 유물은 싱룽와 유적에서 출토된 옥결(玉玦, 옥 귀고리)이다. 싱룽와 문화보다 조금 뒤진 차하이 문화 유적에서도 귀고리 · 관옥 · 구슬을 비롯한 20여 점의 옥이 나왔다.

그런데 최근 한반도 중부인 강원도 고성군(高城郡) 문암리(文巖里)와 전남 여수(麗水) 안도(雁島) 패총에서도 형태뿐만 아니라, 연대도 7,000~6,000년 전으로 비슷한 옥 귀고리가 발견되었다. 게다가 훙산 옥기에는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여러 점 있고, 제단 터에서는 희생된 곰 아래턱뼈도 발견되었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상징인 곰 토템과의 연관성을 추측케 한다.

고조선의 영역을 다링하(大凌河) 유역 내지는 그 너머까지로 본다면, 두 지역간, 두 문화간의 소통이나 교류에 의해 이루어진 이러한 연관성이나 공유성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훙산 옥의 원산지가 예부터 한반도에 이르는 교통요지에 자리한 선양(瀋陽) 남방의 슈옌(岫岩)이라는 사실은 문암리나 안도 패총 옥의 원류나 산지를 추적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最古 문명 홍산문화, 고조선·고구려가 맥 이었다 중국, 황하문명보다 앞서자 역사왜곡...홍산문화 발견은 한민족 고대사 연구 분수령 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1983년부터 1985년 사이에는 조양시 남서쪽의 능원(凌源) 시에 있는 우하량 마을에서 대대적인 유적지 발굴이 이뤄졌다.

이곳에서 제단, 여신묘, 적석총, 피라미드, 돌로 쌓은 사각형 모양의 광장 등 놀라운 고대 문화 유적이 대거 발견됐다. 그 연대는 기원전 3630년(+11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산취 유적보다 더 앞선 시기의 유적이다. 그런데 이 유적들은 계급의 분화와 사회적 분업이 이루어진 수공업 경제의 존재를 입증하고 고대국가(중국학자들은 古國이라 한다)의 모습을 보여줘 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특히 중국 입장에서는 북방 오랑캐인 동이족의 땅에서 중국 국가 역사를 훨씬 앞서 초기 국가 단계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은 충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홍산문화(동석병용기 시대-청동기 시대)

1. 고 소하연(小河沿) 문화(기원전 3000~기원전 2000년)는 1874년 오한기의 소하연 마을에서 발굴됐다. 오한기를 비롯한 네이멍구와 요녕성 일대에 넓게 분포된 소하연 문화는 후(後)홍산문화로 분류되며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잇는 동석병용기 시대의 유적으로 협의의 홍산문화와 초기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 문화 시대를 연결하는 무덤 양식이다. 이곳에서는 농경 시대의 주거지, 토기, 동물상 등이 발굴됐고 후대 동이족의 나라 상나라 갑골문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원시상형문자가 등장했다.

2. 하가점하층 문화(기원전 2000~기원전 1500년)는 요하 지역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 전기문화로 내몽골 자치구 츠펑 시의 하가점촌에서 최초로 발견돼 그 지역 이름이 붙여졌다. 하가점하층 문화는 홍산문화-소하연 문화를 잇는 청동기시대 문화로 연산(燕山) 남북의 넓은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북쪽으로 시라무강, 동쪽으로는 의무려산 서부, 서쪽으로는 하북성 일부까지, 남쪽으로는 발해만까지 분포한다. 하가점하층 문화는 조양시에서 가장 많이 발굴됐는데 유적지가 1300여 곳이라 한다.

하가점하층 문화 지역 중 연산 이북 지역에서는 하가점상층 문화가 새로이 형성되는데, 기원전 1500~300년경 문화 유적이다. 이들은 북방 기마유목민들의 청동기시대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가점하층 문화 유적지에서는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발굴됐으며 특히 한민족의 표지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 돌무덤, 비파형 동검, 복골 등이 발굴돼 한민족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과의 연결 관계가 주목되었다. 홍산문화 유적지에 대해서는 추후 홍산문화 답사 기행 편에서 좀 더 상세히 소개하겠다.

홍산문화와 한민족 고대사

홍산문화의 다양한 유적과 유물은 이 문화를 일구어낸 사람들이 한민족 역사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발굴되는 수많은 유적·유물의 특징, 연대, 유적지의 지정학적 위치 등에 비춰 이곳에서 형성된 고대 문화는 중국의 고대 문화와는 다른 만주와 한반도로 연결되는 문화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흥륭와 유적에서 발굴된 옥귀걸이 등 옥유물은 한반도와 연결된다. 흥륭와 문화의 옥유물 재료는 수암현에서 온 것인데 수암은 흥륭와 유적지에서 남동쪽으로 5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으로 압록강에서는 서쪽으로 불과 130킬로미터 떨어졌다. 이것은 요하 일대의 신석기 문화의 주인공들이 예맥족이 살던 땅 요동 지역과 연결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종호 박사는 “뉴허랑 지역 신비의 왕국에서 발견된 결상이식과 같은 형태의 옥귀걸이가 한반도 중부인 강원도를 비롯해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됐다는 것은, 당대의 홍산문화가 한반도 전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의 단적인 증거라고 볼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우실하 항공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결국 흥륭와 문화 시기와 같거나 앞선 시기에 동해안 문암리와 남해안 안도패총에서도 비슷한 옥귀걸이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문암리 것은 중국 장강유역이나 일본 열도보다 최소한 1000년 이상 앞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원전 6000년경에는 요서, 요동, 연해주, 한반도가 동일 문화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흥륭와 유적 등에서 요하 일대는 빗살무늬 토기가 다수 출토되었는데 우실하 교수는 이에 대해 “빗살무니 토기와 세석기는 요하 일대 신석기 문화에서는 대부분 보이는 것이지만, 황하 일대에서는 보이지 않는 북방 문화 계통이다. 흥륭와의 주도 세력들은 중원에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기본적으로 빗살무늬 토기가 전파되는 길로 이동한 세력임을 알 수 있다. 결국 기원전 6000년 당시부터 이미 한반도와 중국 동북 지역 일대를 엮는 발해만 연안은 중원과는 다른 독자적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후대의 예·맥족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종호 박사는 요하 지역의 빗살무늬 토기에 대해 “큰 틀에서 랴오허 지역 일대는 홍산문화 이후 하가점하층 문화-고조선 문화로 이어지는 데 이들 지역의 기본 유물은 빗살무늬 토기다. 반면에 중국의 도기는 채도(彩陶)에서 흑도(黑陶), 다시 백도(白陶)로 전승돼 우리의 토기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고 말했다. 부하문화에서 발굴된 복골도 동이족의 전유물인 골복의 전통을 보여준다. 이 전통은 후에 동이족의 나라 상(은)나라로 이어져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실하 교수는 “요서 지역에서 시작된 골복의 전통은 한반도의 백두대간 동쪽을 타고 내려와 한반도 동남해안 일대에서도 많이 보인다. 이 골복 문화도 결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가 동일 문화권이었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김정학은 복골의 전통이 주로 북방 아시아족에 기원한다는 점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복골(卜骨)은 북중국과 만주 지방에서 많이 발견돼 주목할 만한데, 이들 지방은 신석기시대 이래로 수렵·방목을 주 생업으로 한 북방 아시아족이 살고 있었다. 동물의 뼈, 특히 견갑골(肩胛骨)에 금을 내 점복 하는 습속은 이들 수렵·유목을 주로 한 북방 아시아족에서 기원한 것을 시사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하량 유적지 등 요하 일대에서는 다수의 적석총이 발굴되었는데 적석총은 요하 일대와 만주·한반도에서 나타나는 고대 무덤 양식으로 중국과는 전혀 다른 묘제다. 중국은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드는 토광묘가 주류이며 역사 시대 이후에야 목관묘가 널리 사용되었다 한다. 고대로부터 무덤 양식은 오랜 기간 변하지 않고 고유의 전통이 지켜진다고 한다. 따라서 무덤 양식으로 민족의 이동 경로나 삶의 영역을 유추해볼 수 있다. 적석총은 요하 지역과 만주, 한반도에 걸쳐 널리 나타나는 한민족의 전형적인 무덤 양식으로 고구려는 건국 초부터 적석총을 조성했는데 백제 초기에도 적석총이 이어졌다.

하가점하층 문화 유적에서도 빗살무늬 토기, 돌무덤, 비파형 동검 등 잘 알려진 한민족 고유의 고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특히 이 지역에서 치(稚)를 가진 석성도 발견되었는데 이 또한 고대로부터 이어온 한민족 고유의 축성방법이다. 수많은 고구려성에서 나타나고 백제의 계양산성에도 나타나는 이 축성기술은 하가점하층 문화에서 등장해 고구려까지 이어지지만, 같은 시기의 중원 지역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또 이 지역에서 발굴되는 비파형 동검과 관련해서 이종호 박사는 “청동단검은 당시 적과의 육박전에 사용된 주된 무기로 통치 권력의 중요한 상징이었다. 비파형 동검이 발견된 지역은 큰 틀에서 홍산문화의 영역에 들어간다. 따라서 홍산인들이 홍산인들의 국가 즉, 신비의 왕국을 건설했고 이어서 단군을 시조로 하는 고조선이 성립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약이 아니다”고 밝히고 있다.

하가점상층 문화는 기원전 14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까지의 문화로, 기마유목민들의 초원 문화 유적이 나타나며 중국에서는 동호(東胡)의 문화라 하는데 이 ’동호‘ 역시 앞서 기술한 대로 고조선의 다른 이름이라고 봐야 한다.

이같이 홍산문화는 지역적 위치, 유물 내용, 연대 등에서 한민족 고유의 문화와 밀접한 연결고리가 있다. 특히 우하량 유적은 고조선이 존재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고조선 성립 훨씬 이전에 초기 단계의 고대국가가 존재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준다. 고조선보다 무려1200년 앞서는 기원전 3500년경의 초기 단계 고대국가의 흔적이 발굴된 것이다. 이 초기 국가에 대해 중국 사서에는 기록이 없다. 그동안 중국 입장에서는 이 지역이 오랫동안 북방 오랑캐의 땅이며 문명이 소외된 지역이라고 봐왔고 문화적인 연결고리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앞서 설명한 대로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해왔다. 요하 일대에서 발굴된 홍산문화는 한민족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의 존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실증적 연구도 있다. 유 엠 부진을 비롯한 학자들이 중국 사서의 기록을 토대로 중립적으로 연구를 한 결과에 따르면 요하 일대는 바로 고조선 지역이다. 홍산문화의 대 발견은 한민족 고대사 연구에 분수령이 될 수 있다. 앞으로 관련된 고고학·역사학·인류학 등 모든 과학적 분야를 동원해 연구해 나가야 할 부분이다.

‘홍산·단군이 중국 역사’라는 몰염치 중국은 그동안 황하 유역인 중원 지역에서 발흥한 황하 문명을 모태로 중국 문명이 형성돼 왔다. 중국의 국가 기원은 기원전 2000년에서 1500년경으로 봤다. 그런데 우하량 유적지가 발굴되자 이 지역에 기원전 3500년경에

고대국가가 존재했다고 발표했다. 이를 기초로 세계 최고의 문명이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며 중국 역사를 ‘중화 5000년’으로 갑자기 늘렸다. 그동안 한민족 표지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 적석총, 비파형 동검의 출토지였고 오랫동안 동이족의 지역으로 치부해온 땅인 요하 지역에서 나타난 고대문명을 중국 역사로 편입했다. 그동안 중국 역사에서 제외했던 이민족의 역사가 중국 역사로 뒤바뀐 것이다.

우하량 등 홍산문화 유적의 대 발견 후 중국은 역사에 대한 입장을 근본적으로 전환해 그동안의 ‘황하 중심 문명론’에서 벗어나 ‘다중심 문화 발전론’을 전개했다. 요약하면 황하 문명보다 훨씬 이른 홍산문화가 중국 문명의 시발점이며 다른 지역의 고대 문화와 함께 중국 역사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그동안 신화로 취급되던 삼황오제(기원전 4000~3500년경)와 황제 염제·치우제의 삼시조가 역사에 편입되고 황제와 치우가 싸운 탁록대전도 기원전 2700년경의 역사적 사실이 된다. 또 지금의 중국 영토 내에서 일어난 인물인 단군 웅녀 주몽과 이들로부터 비롯한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의 고대사는 당연히 중국사의 일부라는 것이다.

홍산문화 유적이 발굴된 이후 역사관에 변화가 생긴 중국은 원래 황제의 후예라고 해왔으나 1980년대 이후에는 염제를 포함한 염·황후예라 했다. 그런데 1983~1985년 우하량 유적 발굴 후에는 입장을 크게 바꾼다. 그동안 오랑캐인 동이족의 우두머리로 치부해왔던 치우를 중국의 조상으로 영입했다. 베이징에서 16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탁록현에 1994~1998년 중에 ‘귀근원’이란 절을 세우고 ‘중화삼조당’이란 사당을 지어 중국인들의 조상은 황제 염제 치우를 모두 포함한 삼시조라 선언한다. 이제 중국에서는 홍산문화가 황하문명에 앞서고 있으며 우하량 유적에는 기원전 3500년경 고대국가가 존재했다고 인정하고 중국 내 일어난 모든 문화가 중국문화라는 입장을 정리했다. 이것이 중국의 역사 공정의 주된 내용이다. 중국의 역사학자 백수이(白壽葬)가 쓴 <중국통사강요>에서 중국의 이러한 입장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중국은 하나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다. 중국 역사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경 내의 각 민족이 공동으로 창조한 역사로 과거에 광대한 중국 영토에서 생존·번영했으나 지금은 소멸된 민족의 역사도 중국 역사다.”

중국의 역사 공정은 인적·물적 자원을 대거 투입하여 시대별·지역별로 조직적이고 주도면밀하게 진행돼왔다.

1. ‘하상주 단대공정’은 1996~2000년 기간 그동안 선사시대로 취급하던 전설적인 하·상·주 시대에 대한 연구 작업이다. 연구 결과 하(夏)는 기원전 2070~1600년, 상(商)은 기원전 1600~1046년, 주(周)는 기원전 1046~771년까지 실존했던 나라로 설정했다. 이 시기는 요하 지역에 단군조선 시대의 역사가 전개되던 시기다.

2. ‘중화문명탐원공정’은 2001~2006년 기간 진행됐는데 중국 문명의 기원이 황하문명이 아니라 요하 일대의 홍산문명에서 비롯되며 홍산문명은 세계 4대 문명권보다 앞서는 문명권으로 존재했다는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이다.

3. ‘동북·서북·서남공정’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하여 중국의 분열을 방지하고 하나의 큰 역사의 틀에 묶어놓는 역사공정이다. 중국의 동북삼성(흑룡강성·길림성·요녕성)에서 일어난 과거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는 ‘동북공정’, 소수민족인 위구르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신장 웨이우얼 지역의 역사를 편입하는 ‘서북공정’, 소수민족인 티베트인들이 오래 역사를 유지해왔던 티베트 지역의 역사를 편입하는 ‘서남공정’이 그 내용이다.

동양에서 용의 기원에 대해 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서이족의 토템신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서이족은 황하유역에서 뱀과 가까이 살면서 공포의 대상인 뱀을 회유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자신들의 조상으로 삼고 숭배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뱀은 자연계의 뱀의 형상이 아닌 용으로 신격화되었고 보족의 풍습, 금기들을 용으로 상징화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사공포설이나 사신신앙설도 용의 기원을 뱀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뱀은 자연계에 실존하지만 용은 상상의 산물로서 상룡, 마룡, 어룡 등과 같이 실존하는 동물에 다른 속성이 첨가, 혼합, 왜곡되어 새로운 형태로 되었다고 하여 용충설, 용수설, 용어설, 용조설 등이 보여 지고 있다.

용이 번개, 무지개, 천둥, 구름 등 자연천상의 신격화의 결과로 생성되었다는 용위섬전설은 공중에 나타난 번개의 형상을 보고 그것을 기점으로 가늘고 긴 네발 달린 신비한 용을 상상해냈다는 설이다. 용권설에서는 바다에서 태풍이 불 때 바닷물이 회오리바람과 함께 휘감겨 올라가는 현상, 즉 기상상이 구체화 하여 용을 상상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이러한 용위섬전설과 용권설은 용의 기원을 뱀의 형태 발전에서 보다는 각 민족의 풍토 속에서 기상에 의한 자연적인 발생으로 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용에 관한 기록 가운데 가장 연대가 빠른 것은 중국 상나라 때 갑골문자에 남아있는 것이다. 갑골문자에서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용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글자가 70여 자나 되어 적어도 상나라 때에는 용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상나라 사람들은 용머리에 뿔을 달아 주었다. 이것은 상나라 사람들이 지닌 뿔 숭배의 원시 종교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나라 사람들은 뿔은 특별한 신성을 의미한다. 뿔이 없는 동물에도 뿔을 달아 주었는데 이는 신통한 동물에게 신성을 부가하여 천지를 교류하는 사명을 잘 완수하도록 원했기 때문이다. 이로서 용은 모방된 자연 생물의 울타리에서 뛰쳐나와 환상과 창조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상나라 때의 용은 통일된 것이 아니라 유형별로 차이가 있으며 구조도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올수록 점점 복잡해지며 송나라 때에는 용의 모습이 구체화 된다.

한마디로 상나라 때 용의 모습과 송나라 때 용의 모습은 큰 차이가 난다. 이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조금씩 용의 모습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이러한 변화는 만일 상나라 이전에도 용이 있었다면 상나라 때와는 그 모습이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중국인들은 삼성타라촌에서 발견된 C자형 옥저룡, C자형 옥으로 만든 돼지용이라는 뜻으로 최초의 ‘중화제일용’으로 생각한다. 용의 모습의 원형으로는 도마뱀, 뱀, 악어, 말, 소, 뱀 등 많은 동물이 있다. 그런데 옥저룡을 원시용으로 보는 것은 용의 원형이 돼지라는 것을 뜻한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돼지가 중요시된 것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이 돼지를 기우제 지낼 때 사용했는데, 이런 점은 홍산 우하량 지역의 동산치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돼지 뼈로도 증명된다. 용은 물을 뜻하고 돼지 또한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결국 용과 돼지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는 논리다.

1971년 중국 내몽고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촌(三星他拉村)의 홍산 문화유적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높이 26cm의 ‘C자형 옥저룡(玉猪龍)’이 발견됐다.

중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이 옥조룡(玉猪龍으로도 적음)은 묵록색을 띠며 길이 26센티미터, 무게는 1킬로그램으로 완벽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추후에 굽어진 형태가 마치 영어 문자 C와 같아 C형 옥저룡(玉猪龍)이라고도 불린다. 이를 옥저룡이라고 부르는 것은 옥으로 만든 돼지 용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형 옥룡은 하나의 옥 원료의 조각으로 입술부분은 앞으로 튀어나오고 약간 위로 굽었으며, 입은 꼭 닫았고 두 눈은 돌출돼 마름쇠형을 띈다. 용체의 횡단면은 타원형을 띠고 용의 등부에는 단공이 있으며 부조(浮雕)와 전조(淺雕)수법의 운용이 섬세하고, 통체를 잘 다듬어 빛나고 매끄럽다.

옥저룡(玉猪龍)이란 이름은 중국의 손수도 박사가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가 옥저룡이 원시용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보아도 용을 돼지로 보는 견해는 매우 많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에 이미 농경사회로 들어섰으므로 적어도 돼지를 사육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타당하게 여겨졌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돼지가 중요시된 것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주역』에는 ‘용은 구름이다’ 또는 ‘용은 물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용이 물과 동일시됐는데 물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물 즉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돼지를 사용했다고 추측한다. 이런 점은 우하량 지역의 동산치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돼지 뼈로도 증명된다.

고대인들이 돼지를 기우제 지낼 때 사용했는데, 물이나 용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볼 때 돼지 또한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됐기 때문에 결국 용과 돼지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는 논리이다.

손보기의 용에 대한 견해가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오늘날 보는 용은 후대로 갈수록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 원시적인 형태가 홍산문화에서 발원됐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오천년역사(中華五千年歷史)’를 주장할 때도 용의 탄생을 홍산문화와 연계시키고 있다. 즉 요서지방의 홍산문화 유적에서 이와 비슷한 기물 또는 문양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자연스럽게 용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중국인들이 옥룡을 중요시하는 것은 옥룡을 홍산인들이 숭배하던 신의 형상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인들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용이 홍산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중국인들은 홍산인이 중국에서 최초로 용을 신령으로 숭배한 민족이며 이후 용이 신격화돼 중원지역으로 전파돼 현재 중국인들이 용을 생활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홍산의 용이 중국 용의 시조로 확정되기까지에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1987년 하남성(河南省) 복양시(?陽市) 서수파(西水坡) 앙소문화유적지 1호 묘에서 놀라운 유물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흰색의 조개껍질로 정성스럽게 형상을 만들어 놓은 원용문으로 된 용형상물로 이를 방소룡(蚌塑龍)이라고도 부른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이 용은 힘차게 앞으로 기어가는 느낌을 준다. 특히 무덤 주인의 좌측에는 용의 형상이 있고 우측에는 호랑이 형상이 있어서 보다 큰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음양오행론과 풍수지리에 입각한 좌청룡, 우백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학근은 이 발굴을 근거로 사신도(四神圖)의 기원이 서수파에서 기원한다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탄소연대측정에 의해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촌(三星他拉村)의 홍산문화 문화유적보다 빠른 기원전 4460±135년으로 확인되자 ‘중화제일용’의 자리가 바뀌었다. 그러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를 ‘천하제일용’으로 부르기도 한다. 복양시에서는 재빨리 천하제일용 발굴을 기념해 ‘중국 용의 고향’이라는 ‘중화용향(中華龍鄕)'이란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도 잠시 1994년에 또 다시 놀라운 용 형상물이 사해문화에서 발견됐다. 사해문화는 요령성 서부 의무려산 동쪽의 부신(阜新) 몽고족 자치현에서 발달된 문화로 흥륭와에서 세계 최초의 옥 귀걸이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제일옥’이 발견된 지역이며 역시 흥륭와에서 ‘중화제일촌’이 발견되기 전까지 ‘요하제일촌’으로 불리던 집단 주거지가 발견된 곳이다.

<사해문화의 용무늬 토기>

사해유적지에서 발견된 용형상물을 석소룡(石塑龍)이라고 부르는데 길이가 19.7미터, 넓이가 1~2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그런데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석소룡이 서수파에서 발견된 ‘중화제일용’보다 무려 1200년이나 앞선 기원전 5,6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학자들은 서수파의 것이 중원의 앙소문화에서 발견됐음을 우대해 서수파의 방소룡을 ‘중화제일용’으로 계속 고집했다. 그러나 과학기술에 의한 연대측정 결과를 마냥 거부할 수는 없는 일로 결국 2004년 중국학자들은 사해유적에서 발굴된 용형상물을 ‘중화제일용’으로 확정했다. ‘중화제일용’의 영예가 홍산문화 쪽으로 다시 돌려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용은 후대로 갈수록 많은 변화를 겪었다. 손 박사는 그 원시적인 형태가 홍산문화에서 발원됐다고 주장했다.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오천년역사’(中華五千年歷史)를 주장하며 용의 탄생을 홍산문화와 연계시키고 있다.

붉은색 산으로 유명한 내몽고 적봉시(赤峰市) 오한기(敖漢旗) 보국토향 인근의 흥륭와촌에서 발견된 흥룡화문화는 기원전 6200년까지 올라가는 신석기문화 유적이다. 방어 용도의 성과 대형 주거지 등이 발견됐으며 현재 중국 국경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신석기 집단 주거지다. 이곳에서 세계 최초의 옥귀걸이가 출토됐다. 중국은 이곳을 ‘중화원고제일촌’(中華遠古第一村) 또는 ‘화하제일촌’(華夏第一村)이라 부른다.

흥륭와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옥은 적봉시에서 동쪽으로 450km나 떨어져 있는 압록강에 인접한 요령성 수암(岫岩)에서 나오는 ‘수암옥’이다. 이는 흥륭와문화 시대인 기원전 6000년경에 이미 만주 벌판 서쪽과 동쪽이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후 사해문화(査海文化, 기원전 5600~5200), 부하문화(富河文化, 기원전 5200~기원전5000년), 조보구문화(趙寶溝文化, 기원전 5000~기원전 4400년)을 거쳐 국가단계로 진입했다고 보이는 홍산문화(紅山文化, 기원전 4500~기원전 3000년)가 꽃피게 된다. 중국학자들은 요하 일대의 신석기문화를 모두 넓은 의미의 홍산문화라고 부르기도 하며 홍산문화를 석기와 청동기를 같이 사용하는 시대로 간주한다.

홍산문화의 중심지였던 조양시는 요령의 서쪽에 위치한다. 1996년 새의 공룡진화설을 뒷받침하는 ‘공룡중화용조’(시노사우롭테릭스)가 발견돼 세계 최초의 새인 시조새가 날아오른 지역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이후 계속하여 시조새 화석들이 발견되어 ‘세계고생물화석의 보고’로도 알려져 있다.

홍산문화와 상문화 간의 시간적인 차이는 약 2천 년, 거기다 지역적으로도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손 박사는 시공차를 극복하기 위해 요서지역의 하가점하층문화의 채회도에서 나타나는 짐승무늬 도안을 용의 모습으로 추정하고 이것이 이리두문화와 상문화로 전해졌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찬반 논란에 직면했다. 하가점하층문화의 채회도에서 나타나는 짐승의 얼굴 모습을 용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 현대의 용 뿐 아니라 원시용과도 전혀 닮지 않았다는 얘기다.

Human Genetics에 발표된 김욱교수의 논문을 보면 한국인의 유전자가 한족(베이징인)보다도, 더 남쪽의 운남인과 가깝고 심지어 베트남인과도 매우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다고 한다.

스펜서 교수의 유전자 이동지도에 의하면, 중국인은 M175유형의 돌연변이형을 가지는데, 티벳고원에서 남쪽으로 이주하여, 동남아를 거친 후 북상하여, 북중국지역에서는 다시 아형인 M122형 돌연변이를 가진다. 김욱교수가 북경인과 운남인을 분류한 이유는 두 지역의 언어가 같은 티벳-중국어족이라하더라도 영화의 자막 처리를 못하면 보지못할 정도로 언어가 매우 다르며 실제로 얼굴 모습도 중국내에서 남방계, 북방계를 나눌 정도로 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역의 위치상 사실, 우리나라 사람은 북방계 중국인과 더 가까워야 한다. 그런데, 김욱교수의 논문은 거꾸로 한국인의 유전자는 남방계 중국인과 가까움을 실증하고 있다. 즉 한국인에게는 M122형보다 오래된 M175유형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전자 증거를 굳이 들지않더라도 한국어의 한자발음이 표준 북경어보다 남부 지방의 광동어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장개석을 북경어로 하면 장제스가 되지만 광동어로 하면 장카이섹이 된다.

최근 홍산문화나 앙소문화보다 오래된 선홍산문화유적인 발해만의 "사해문화유적"에서는 빗살무늬토기의 변형인 지자문토기가 발견되고, 특이할 만한 사실은 용에 대한 토템이 있다는 사실이며, 문화유적의 특징상 "모계사회"의 여군장 제도를 가진 사회라고 한다.

용 토템의 진실을 캐는데는 중국이 아니라 "베트남"신화가 더 도움이 된다.

"神農氏의 三世孫 데 밍(帝明)이 데 응이(帝宜)를 낳고, 얼마 후에 남방을 순방하던 중 응우 링(五嶺)에 이르렀다. 그는 이곳에서 부 띠엔(惨僊)의 딸과 결혼하여 록 뚝(綠續)을 낳았다. 록 뚝이 총명하기 그지없기에 데 밍은 몹시 사랑하여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록 뚝이 극구 사절하기에 데 밍은 하는 수 없이 長男 데 응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북방을 다스리게 한 다음, 次男 록 뚝을 낑 즈엉 브엉(涇陽王)에 봉하여 씩 꾸이(赤鬼, 운남성에서 바다에 이르는 지역)라고 하는 남방을 다스리도록 했다. 낑 즈엉 브엉은 동 딩 꾸언(洞庭君, 용왕)의 딸 턴 롱(神龍)과 혼인하여 락 롱 꾸언(怷龍君, 출룡군)을 낳았다. 어려서 숭 람이라고 불리웠던 락 롱 꾸언은 데 라이(북방을 다스린 데 응이의 후손 임금)의 딸 어우 꺼(垯姬, 달희)와 결혼하여 100개들이 알 하나를 낳았다. 그 알에서 100명의 아들이 나왔는데 이들이 百越族의 선조인 것이다. 어느날 왕이 어우 꺼에게 말하기를 "나는 용의 종족이요, 당신은 산의 종족인지라 水와 火는 서로 다른 까닭에 합하는게 실로 어렵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즉시 이들은 헤어졌는데 어우 꺼는 50명의 아들들을 데리고 산으로, 락 롱 꾸언은 나머지 50명을 데리고 남쪽 바다로 갔다. 이 때 이들은 장남을 훙 브엉(雄王)으로 봉하여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일백명 아들 중 장남은 기원전 2879년 락비엣 족의 왕이 되는데 이 왕국이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반랑(Van Lang)왕국으로 명명 된다. 이 반랑 왕국은 홍하 델타지역을 중심으로 턴롱(天龍)의 후예로서 웅왕이라고 불리우는 역대왕이 통치하며 기원전 258년까지 2,600여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하나 그 연대는 확실 하지 않다.

분명히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난생신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발음이 좀 어렵지만, 티벳-중국어족인 베트남인은 "신농"씨와 관련이 있는 벼농사의 농경민임과 동시에, 바다의 "용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토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의 혼혈인이다. 베트남 민족에 영향을 준 용토템의 바다로 부터 들어온 오스트로네시아인은 거꾸로 "한반도"기원의 "해상 남방 이주경로"를 가진 집단을 일컫는 것으로 본다.

용은 가상의 동물이다. 어로민족 특히 남쪽으로 내려간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의 경우에는 에스키모어족과는 달리 태풍, 회오리와도 같은 날씨변동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공포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태호 복희씨의 직책이 "우사"란 이야기 한마디가 어로민족의 "풍어기원"의 개념과 "벼농사의 기우제"의 개념이 복합된 "동해 용왕제"를 수행하는 북방 알타이계 "샤먼"이었다는 말로 통한다. 무엇보다 복희와 여왜가 원형으로 소용돌이치는 "팔괘와 태극"이라는 동양사상의 시조라는 사실이다.

역대 서국(徐國) 국왕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황룡(黃龍)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

곡창(鹄蒼)

곡창(鹄蒼)

세계 최초 개이름.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泰山(태산)=서산(徐山)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월병(月餠)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대장군 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 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

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서귀포(西歸浦)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서불과차(徐不過此)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서복(徐福)과 서귀포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