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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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섭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0월 3일 (화) 15:1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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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丙子胡亂)
이장희, "병자호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병자호란
한자표기 丙子胡亂
이칭 병정노란(丙丁虜亂)
유형 사건
시대 조선시대
날짜 1636년 12월-1637년 1월
관련인물 인조 청태종
관련장소 남한산성 강화도



정의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 부르기도 한다.

내용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된 배경

  •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인조 6) 이후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禮幣: 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해왔다. 그뿐 아니라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므로 변방의 백성과 변방 수장(守將)들의 괴로움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후금의 파약(破約) 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 후금에 대하여 화의를 반대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 되었다.[1]
  • 1636년 2월에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이 후금 태종(太宗)의 존호(尊號)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 한씨(韓氏)의 문상(問喪)차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를 강요해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다. 조정 신하들 가운데 척화(斥和)를 극간(極諫)하는 이가 많아 인조도 이에 동조해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國書)를 받지 않았으며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했다. 조선의 동정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일이 낭패했음을 간파하고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주했는데, 공교롭게도 도망치던 도중에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후금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그들도 비로소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고 재차 침입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 같은 해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했으며, 태종은 관온인성황제(貫溫仁聖皇帝)의 칭호를 받았다. 그 해 11월 심양(瀋陽)에 간 조선 사신에게 그들은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2]

병자호란 일어나다

  • [청태종은 몸소 전쟁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1636년 12월 1일에 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아 예친왕(禮親王) 대선(代善),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 예친왕(豫親王) 다탁(多鐸)과 패륵(貝勒) 악탁(岳託)·호격(豪格)·두도(杜度) 등을 이끌고 다음 날 몸소 조선 침입에 나섰다. 9일에 압록강을 건너 다탁은 전봉장(前鋒將) 마부태에 명해 바로 서울로 진격하도록 했다. 마부태는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수비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피해 밤낮을 달려 심양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서울에 육박했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입했다는 급보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12일로서 의주부윤 임경업과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장계(狀啓)가 도착한 뒤였다. 보고에 접한 조정에서는 비로소 적의 형세가 급박한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게 빨리 진격해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3]
  • 13일 오후 늦게 재차 장계가 이르러 청군이 이미 평양에 도착했다고 하자 조정은 갑작스런 변란에 황망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다음 14일 개성유수의 치계(馳啓)로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부제학 [[이민구]|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張紳)으로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직시켜 강화를 수비하도록 했다. 한편,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김상용(金尙容)에게 명해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둘째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 셋째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을 인도해 강화도로 피하도록 했다. 심기원(沈器遠)을 상중에서 불러내어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고 호조참의 남선(南銑)을 찬획사(贊劃使)로 삼았다. 인조도 그날 밤 숭례문으로 서울을 빠져 나와 강화도로 향했으나, 적정을 탐색하던 군졸이 달려와서 청국군이 벌써 영서역(迎曙驛: 지금의 서울 은평구 대조동과 불광동 사이)을 통과했으며, 마부태가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해, 한 부대를 보내 양천강(陽川江)을 차단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겼다고 보고했다. 결국 인조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4]
  •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이 서울로부터 뒤따라오니 그에게 동성(東城) 망월대(望月臺)를 지키게 하고, 이영달(李穎達)을 중군(中軍)으로 삼고 총융사 구굉(具宏)에게 남성(南城)을 지키게 했다. 또, 수원부사 구인후(具仁垕)를 부장(副將)으로 삼고 상중에 있던 이확(李廓)을 불러 중군을 삼았으며, 어영대장 이서(李曙)는 북성(北城)을, 수어사 이시백(李時白)은 서성(西城)을 지키고 이직(李稷)을 중군으로 삼았다. 이때 영남의 분방병(分防兵)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채 여주목사 이필원(李必遠), 이천부사 조명욱(曺明勗), 양근군수 한회일(韓會一), 지평현감 박환(朴煥) 등이 약간의 군사를 이끌고 입성했고, 파주목사 기종헌(奇宗獻)이 수백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구원했다. 이때 성안에 있는 군사는 1만 3000명으로 성첩(城堞)을 지키도록 하고, 도원수·부원수와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에게는 근왕병(勤王兵)을 모으도록 하는 한편, 명나라에 위급함을 알려 원병을 청했다. 이 때 성안에는 양곡 1만 4300석(石), 장(醬) 220 항아리가 있어 겨우 50여 일을 견딜 수 있는 식량에 불과했다. 청군의 선봉 부대는 12월 16일에 이미 남한산성에 이르고 대신 담태(潭泰)의 군사도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서울에 입성해 그 길로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포위했다.[5]
  • 청태종은 다음해 1월 1일에 남한산성 밑 탄천(炭川)에서 20만의 군사를 포진하고 성 동쪽의 망월봉(望月峰)에 올라 성안을 굽어보며 조선군의 동태를 살폈다. 포위를 당한 성안의 조선군은 12월 18일 어영부사(御營副使) 원두표(元斗杓)가 성안의 장사를 모집, 성을 빠져나가 순찰중인 적군 6명을 죽이고, 동월 20일 훈련대장 신경진의 군이 출전해 또 적군 30명을 죽였으며, 다음날 어영대장 이기축(李起築)이 군사를 이끌고 서성을 나가 적군 10명을 또 죽여 성안에 사기를 올렸다. 그러나 이렇다할 큰싸움 없이 40여일이 지나자 성안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이러할 즈음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가 거느리고 올라왔던 관군들은 목적지에 이르기도 전에 무너졌다. 충청도관찰사 정세규(鄭世䂓)의 군사는 험천(險川)에서 패해 이성현감(尼城縣監) 김홍익(金弘翼), 남포현감(藍浦縣監) 이경(李慶) 등이 전사했고,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경상우병사 민영(閔泳)의 군사도 광주(廣州) 쌍령(雙領)에서 괴멸해 두 병사도 전사했다.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은 경기 용인 광교산(光敎山)에 이르러 적장 액부양고리(額駙揚古利)를 죽이고 승첩을 거두었으나 뒤에 역습을 당해 수원으로 퇴각한 뒤 전군이 무너졌다. 또, 평안도관찰사 홍명구(洪命耉)는 금화(金化)에서 전사하고 부원수 신경원(申景瑗)이 맹산(孟山) 철옹(鐵甕)에서 사로잡혔으며, 도원수 김자점의 군사가 토산(兎山)에서 패주하고 강원도관찰사 조정호(趙廷虎), 함경남도관찰사 민성휘(閔聖徽)의 군사도 패배해 중도에서 좌절되니, 남한산성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다.[6]
  • 그리고 강화도가 점령당하고 포로가 된 대군의 수서(手書)와 재신(宰臣) 윤방한흥일 등의 장계를 보이면서 독촉했다. 강화도의 함락 사실을 확인한 인조는 드디어 출성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호곡(號哭) 소리가 산성 안을 가득히 채운 채 서문으로 출성해 한강 동편 삼전도(三田渡)에서 성하(城下)의 맹(盟)의 예를 행한 뒤 한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왔다. 청은 왕자를 비롯한 강화의 부로(浮虜)를 일부 송환한 다음 군중에 유치하였던 조선의 세자·빈궁·봉림대군(뒤의 효종)을 볼모로 삼고 미리 유치했던 척화론의 주모자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을 잡아 제도의 군사를 거두어 심양으로 돌아갔다. 비록, 한달 남짓한 짧은 전쟁 기간이었으나 그 피해는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것이요 조선으로서는 일찍이 당해보지 못한 일대 굴욕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7]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병자호란 인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36년 12월-1637년 1월
병자호란 태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36년 12월-1637년 1월
정묘호란 인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27년 1월-3월
정묘호란 태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27년 1월-3월
병자호란 세자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36년 12월-1637년 1월
병자호란 마부태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36년 12월-1637년 1월
병자호란 임경업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36년 12월-1637년 1월
병자호란 김자점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36년 12월-1637년 1월
병자호란 최명길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36년 12월-1637년 1월
병자호란 김경징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36년 12월-1637년 1월
병자호란 남한산성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36년 12월-1637년 1월
병자호란 강화도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36년 12월-1637년 1월
인조 세자 A는 B의 아버지이다
세자 세자빈 강씨 A는 B의 남편이다
병자호란 을병연행록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36년 12월-1637년 1월
병자호란 고산유고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36년 12월-1637년 1월
병자호란 의복 목록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36년 12월-1637년 1월
병자호란 상례초언해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36년 12월-1637년 1월
병자호란 이륜행실도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36년 12월-1637년 1월
병자호란 산성일기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36년 12월-1637년 1월
병자호란 무목왕정충록 A는 B와 관련이 있다 1636년 12월-1637년 1월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627년 1월-3월 정묘호란이 발생하였다
1636년 12월-1637년 1월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478554 127.180369 병자호란 시기 인조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37.752417 126.485976 병자호란시기 조선의 왕족들은 강화도로 피신하였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이장희, "병자호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장희, "병자호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장희, "병자호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이장희, "병자호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이장희, "병자호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이장희, "병자호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이장희, "병자호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논문
    • 지두환, 「조선 병자호란 충신 열사에 대한 현창정책」, 『한국학논총』, Vol 34, 2010, 795-815쪽.
    • 남은경, 「병자호란과 그 후의 기록 『심양장계(瀋陽狀啓)』」, 『한국문화연구』, Vol 14, 2008, 35-62쪽.

유용한 정보

  • 이장희, "병자호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