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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신본(信本). 담주임상(潭州臨湘:후난성) 출생. 진(陳)나라의 광주자사(廣州刺史)였던 아버지 흘(紇)이 반역자로 처형된데다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는 등 어릴 적부터 불행한 환경을 참고 견디며 자랐다. 그러나 머리는 유난히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를 익혔으며, 수양제(隋煬帝)를 섬겨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었다. 그후 당나라의 고종(高宗)이 즉위한 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발탁되고, 태자솔경령(太子率更令)·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를 거쳐 발해남(渤海男)에 봉해졌다.<ref>"ㅔ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6304&cid=40942&categoryId=33394 구양순]",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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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신본(信本). 담주임상(潭州臨湘:후난성) 출생. 진(陳)나라의 광주자사(廣州刺史)였던 아버지 흘(紇)이 반역자로 처형된데다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는 등 어릴 적부터 불행한 환경을 참고 견디며 자랐다. 그러나 머리는 유난히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를 익혔으며, 수양제(隋煬帝)를 섬겨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었다. 그후 당나라의 고종(高宗)이 즉위한 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발탁되고, 태자솔경령(太子率更令)·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를 거쳐 발해남(渤海男)에 봉해졌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6304&cid=40942&categoryId=33394 구양순]",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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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7일 (일) 12:04 판

구양순(歐陽詢)
대표명칭 구양순
한자표기 歐陽詢
생몰년 557년-641년
신본(信本)
출생지 진(陳)나라 담주(潭州) 임상(臨湘, 후난성)
시대 당나라
국적 중국
대표직함 태상박사(太常博士), 급사중(給事中), 태자솔경령(太子率更令),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 발해남(渤海男)
구양흘(歐陽紇)
자녀 구양통(歐陽通)
유형 서예가



정의

중국 당(唐)시대의 서예가.

내용

생애

자 신본(信本). 담주임상(潭州臨湘:후난성) 출생. 진(陳)나라의 광주자사(廣州刺史)였던 아버지 흘(紇)이 반역자로 처형된데다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는 등 어릴 적부터 불행한 환경을 참고 견디며 자랐다. 그러나 머리는 유난히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를 익혔으며, 수양제(隋煬帝)를 섬겨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었다. 그후 당나라의 고종(高宗)이 즉위한 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발탁되고, 태자솔경령(太子率更令)·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를 거쳐 발해남(渤海男)에 봉해졌다.[1]

필체

구양순은 우세남과 더불어 홍문관에서 귀족 자제들에게 글씨를 가르쳤다. 그는 특히 서예를 좋아하여 거의 탐닉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한 번은 말을 타고 외출한 그가 우연히 서진 시대의 서예가 소정(索靖)이 쓴 비석을 보게 되었다. 그는 말 위에서 비석을 한참 보았지만 주목할 만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갈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아 그는 일대의 서예가였던 소정의 글씨에는 분명 그만의 특색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을 돌려 되돌아왔다. 그는 말에서 내려 반복해서 몇 번을 보고나서야 그곳에서 정교함과 절묘함을 발견했다. 결국 그는 비석 옆에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아 소정의 필획을 사흘 밤낮으로 연구한 후 비로소 떠났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소정의 필체를 통해 붓을 놀리는 취지를 깨달았으며, 이로 인해 더욱 완벽하고 아름다운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2]

처음에 구양순은 왕희지의 서체를 모방했으나 후에 독자적인 서체를 완성해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해서, 예서, 초서 등에 모두 조예가 깊었는데, 그중 해서가 으뜸이라고 여겨진다. 그의 해서 작품의 글씨체는 세로로 길며, 구조가 독특하고, 필력에 힘이 느껴지고, 웅장하며, 엄정한 규범을 따르고 있어 후대 서예가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의 서체는 ‘구체(歐体)’라고 불린다. 해서 작품으로는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행서는 〈몽촌첩(夢奠帖)〉과 〈장한첩(張翰帖)〉 등이 유명하다.[3]

당대의 평가

당 대 서예가 장회관(張懷瓘)은 《서론서(書論書)》 〈서단〉에서 그의 서체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전서체는 우아하고 정교하며 글씨가 하늘을 나는 듯 절묘하다. 그 모습이 마치 용과 뱀의 전투처럼 얽혀 있고, 운무가 가볍게 감싼 기세에 번개가 치듯 휘몰아치고 있어 신선이 붓을 휘두르면 이와 같을 것이다. 한편 행서는 무기고의 창과 비늘처럼 매섭다. 비록 갈고 다듬어진 것은 오세남보다는 덜하지만, 풍채는 수대의 서예가 지영(智永)보다 엄격하다. 또한 그의 초서는 막힘없이 자유분방하여 이왕(二王, 왕희지와 왕헌지 부자를 일컬음)을 엿볼 수 있으며, 가히 생동적이다.”[4]

예서

더불어 그는 예서에도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는데, 예서 작품으로는 631년에 쓴 〈서주도독방언겸비(徐州都督房彦謙碑)〉가 전해진다. 그는 붓의 쓰임을 연구하여,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고 당찬 기세를 겸비하여 “마치 풀 속에서 뱀을 놀라게 하고, 구름 사이에서 전기가 이는 듯하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눈을 부릅뜬 것 같으며, 장사가 주먹을 휘두르는 듯하다.”라는 평을 받았다. 그의 〈화도사읍선사사리탑명(化度寺邑禪師舍利塔銘)〉, 〈오공공온언박비(虞恭公溫彦博碑)〉, 〈황포탄비(皇甫誕碑)〉 등은 해서 작품이지만 그중 세로, 구부린 선, 삐침, 아래에 삐침이 있는 세로획 등의 필획은 예서로 쓰였다. 오세남은 그의 글씨를 보고 “지필을 고르지 않아도 모두 뜻대로 할 수 있다.”라고 극찬했다.[5]

구양순 팔법

또한 구양순은 오랫동안 서예를 연구하여, 후학들이 서예를 연습하고 글씨를 배울 수 있도록 자신만의 서법 이론을 만들었는데 이를 ‘구양순 팔법(八法)’이라고 칭한다. 그의 팔법에 따르면 “점(点)은 높은 봉우리에서 돌이 떨어지듯, 삐침 있는 가로획(橫戈)은 긴 하늘의 갓 나온 달처럼, 가로(橫)는 천 리를 가르는 구름처럼, 세로(竪)는 만 년 된 마른 등나무처럼, 삐침 있는 세로(竪戈)는 힘 있는 소나무가 쓰러져 부러져 떨어지다 돌벼랑에 걸린 듯, 꺾는 획(折)은 만 근의 활을 당기듯, 비스듬히 왼쪽으로 내려오는 가로획(丿撇)은 날카로운 칼이 코끼리의 상아를 자르듯, 파임은 한 획에 세 번의 파도가 치는 듯” 쓸 것을 요구했다. [6]

저서

구양순은 《전수결(傳授訣)》, 《용필론(用筆論)》, 《팔결(八訣)》, 《삼십육법(三十六法)》 등의 서예 이론서를 저술했는데, 이것들은 그의 서예 경험이 총결된 것으로 서법과 붓 사용법, 결체, 장법 등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의 서예 이론서들은 서예에 필요한 형식 기교와 미학을 한데 묶은 것으로 중국 서예 이론의 귀중한 유산이다. 전해지는 친필 작품으로는 〈복상첩(蔔商帖)〉, 〈장한첩〉 등이 있으며, 비석에 새긴 글로는 〈구성궁예천명〉, 〈황포탄비〉 등이 있다. 그의 아들 구양통(歐陽通) 또한 서예가로 유명하여 후세는 그들 부자를 ‘대소구양(大小歐陽)’이라고 부른다. [7]</ref>

한국에서의 평가

구양순은 국내외 서예 애호가들의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고구려 시대에는 특별히 장안으로 특사를 파견해 구양순의 서예를 배워 오게 할 정도였다. 이에 당 고조 이연은 감탄하며 “구양순의 명성이 멀리 오랑캐들까지도 알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했구나. 그들은 구양순의 필적을 보고는 그가 분명히 우람한 체구의 인물일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8]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과의 관련성

한편 일본인은 구양순의 서예를 존경하여, 1879년 〈아사히신문〉을 창간할 때 한자 제목 네 글자를 구양순의 서체로 쓰고 싶어 했다. 일본 내의 유명한 서예가들로 구성된 기획준비위원회는 구양순의 작품 〈종성관기(宗聖觀記)〉를 토대로 ‘조(朝)’, ‘일(日)’, ‘문(聞)’ 세 글자를 골라내 쌍구법(雙鉤法)을 사용해 진본(眞本)을 그려 냈다. 그러나 서첩 속에서 ‘신(新)’ 자를 찾을 수 없어 ‘친(親)’ 자와 ‘석(析)’ 자를 찾아, ‘견(見)’ 자와 ‘목(木)’ 자를 빼내 ‘신(新)’ 자를 만들어 냈다. 이리하여 4개의 풍만하면서도 가늘고 힘 있는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이라는 글자가 만들어졌다.[9]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왕희지 구양순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구양통 구양순 A는 B의 아들이다 A ekc:hasSon B
구양순 우세남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구양순 장회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구양순 전수결 A는 B를 저술하였다 A ekc:writer B
구양순 용필론 A는 B를 저술하였다 A ekc:writer B
구양순 팔결 A는 B를 저술하였다 A ekc:writer B
구양순 삼십육법 A는 B를 저술하였다 A ekc:writer B
구양순 복상첩 A는 B를 저술하였다 A ekc:writer B
구양순 장한첩 A는 B를 저술하였다 A ekc:writer B
구양순 구양순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각주

  1. "구양순", 두산백과online.
  2. 홍문숙, 홍정숙, 『중국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 2011. 온라인 참조: "구양순", 『다음백과』online.
  3. 홍문숙, 홍정숙, 『중국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 2011. 온라인 참조: "구양순", 『다음백과』online.
  4. 홍문숙, 홍정숙, 『중국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 2011. 온라인 참조: "구양순", 『다음백과』online.
  5. 홍문숙, 홍정숙, 『중국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 2011. 온라인 참조: "구양순", 『다음백과』online.
  6. 홍문숙, 홍정숙, 『중국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 2011. 온라인 참조: "구양순", 『다음백과』online.
  7.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미술대사전(인명편)』,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 참조: "구양순", 『네이버지식백과』online.
  8. 홍문숙, 홍정숙, 『중국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 2011. 온라인 참조: "구양순", 『다음백과』online.
  9. 홍문숙, 홍정숙, 『중국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 2011. 온라인 참조: "구양순", 『다음백과』online.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