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구례 연곡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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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는 1745년(영조 21)에 밤나무로 만드는 왕실의 신주목(神主木, 위패를 만드는 나무)을 봉납하는 곳으로 선정되었다. 이때 연곡사 주지가 도제조都提調로 임명되어 비로소 지방관 향리들의 경제적 침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ref>"[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ndex 연곡사]", 김위석,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1일</ref> 1895년쯤에도 여전히 왕가에 신주목을 봉납하였는데, 밤나무 남용으로 문제가 생겨 망할지경에 이르자 승려들이 절을 떠나 결국 절이 폐쇄되기에 이르기까지 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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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는 1745년(영조 21)에 밤나무로 만드는 왕실의 신주목(神主木, 위패를 만드는 나무)을 봉납하는 곳으로 선정되었다. 이때 연곡사 주지가 도제조都提調로 임명되어 비로소 지방관 향리들의 경제적 침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ref>"[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ndex 연곡사]", 김위석,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1일</ref> 1895년쯤에도 여전히 왕가에 신주목을 봉납하였는데, 밤나무 남용으로 문제가 생겨 망할지경에 이르자 승려들이 절을 떠나 결국 절이 폐쇄되기에 이르기까지 했다고 한다. 연기조사가 처음 이곳에 와서 풍수지리를 보고있을 때 현재의 법당 자리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을 유심히 바라보던 중 가운데 부분에서 물이 소용돌이 치더니 제비 한마리가 날아간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짓고 절 이름을 연곡사(燕谷寺)라 했다고 한다.<ref>"[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tour.jsp?cid=126363 연곡사]",관광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 최종확인: 2017년 04월 11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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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갤러리'''==

2017년 4월 11일 (화) 19:57 판


구례 연곡사
(求禮 鷰谷寺)
대표명칭 구례 연곡사
한자 求禮 鷰谷寺
주소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교구정보 대한불교조계종
창건자 연기
경내문화재 구례 연곡사 동 승탑, 구례 연곡사 북 승탑, 구례 연곡사 삼층석탑,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 구례 연곡사 동 승탑비,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



정의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지리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1]


개요

역사

연곡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연기(緣起)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남아있는 역사적 자료는 전해지지 않으며 일제시대 만우 정병헌 스님이 기록한 『지리산화엄사』말미에 '연곡사 사적'을 기술하고 있어 참고할 수 있을 뿐이다. 연곡사는 현재 남아있는 유적의 모양새나 명문 등을 살펴볼 때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는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그 뒤 연곡사는 임진왜란 때에 왜병에 의하여 전소된 뒤 태능(太能)이 중창하였다. 1907년에는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이 의병을 거느리고 일본군과 싸우는 과정에서 다시 불타버렸다. 그 뒤 1942년에 다시 중건을 하였으나, 6·25전쟁 때 피아골 전투로 다시 폐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 1981년 새 대웅전을 짓는 공사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중창을 시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사찰이름의 유래

연기조사가 처음 이곳에 와서 풍수지리를 보고있을 때 현재의 법당 자리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을 유심히 바라보던 중 가운데 부분에서 물이 소용돌이 치더니 제비 한마리가 날아간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짓고 절 이름을 연곡사(燕谷寺)라 했다고 한다.

지리

연곡사는 피아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직전리 조금 못미처 자리잡고있다. 피아골은 한국전쟁 직후 빨치산의 아지트였기에, 이들을 토벌하려는 군경과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피아골의 이름도 그렇게 죽어간 이들의 피가 골짜기를 붉게 물들였기에 붙여진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는 옛날 이곳에서 오곡의 하나인 식용 피[稷]를 많이 가꾸었기 때문에 피밭골이라 하였다가 바뀐 이름이라고 한다. [4]

특징

연곡사는 1745년(영조 21)에 밤나무로 만드는 왕실의 신주목(神主木, 위패를 만드는 나무)을 봉납하는 곳으로 선정되었다. 이때 연곡사 주지가 도제조都提調로 임명되어 비로소 지방관 향리들의 경제적 침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5] 1895년쯤에도 여전히 왕가에 신주목을 봉납하였는데, 밤나무 남용으로 문제가 생겨 망할지경에 이르자 승려들이 절을 떠나 결국 절이 폐쇄되기에 이르기까지 했다고 한다. 연기조사가 처음 이곳에 와서 풍수지리를 보고있을 때 현재의 법당 자리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을 유심히 바라보던 중 가운데 부분에서 물이 소용돌이 치더니 제비 한마리가 날아간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짓고 절 이름을 연곡사(燕谷寺)라 했다고 한다.[6]


갤러리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828년 홍척이 실상사를 창건했다.
1127~1130년 실상사가 대대적으로 중창되었다.
정유재란기 실상사가 폐허가 되어 이후 약 200년 동안 승려들이 백장암에 기거하였다.
1690년 300여명의 수도승들이 조정에 상소하여 실상사를 다시 중창하였다.
1882년 실상사에 방화가 일어나 사찰 건물들이 불에 타버렸다.
1912년 실상사가 합천 해인사의 말사로 편입되었다.
해방이후 실상사가 김제 금산사의 말사가 되었다.
1996~2005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실상사 창건 당시 가람의 규모와 역사적 변천을 확인하기 위해 발굴조사를 시행했다.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 남원 실상사 A는 B에 있다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남원 실상사 A는 B에 있다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 남원 실상사 A는 B에 있다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 남원 실상사 A는 B에 있다
남원 실상사 석등 남원 실상사 A는 B에 있다
남원 실상사 동서삼층석탑 남원 실상사 A는 B에 있다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남원 실상사 A는 B에 있다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 수철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수철 A는 B를 위한 비이다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 홍척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 홍척 A는 B를 위한 비이다
홍척 남원 실상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수철 남원 실상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남원 실상사 실상산문 A는 B에 포함된다
실상산문 선종 A는 B에 포함된다
홍척 도의 A는 B와 관련있다


참고문헌

주석

  1. "연곡사", 김위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1일
  2. 이태호,황호균,『월간 해인』, 통권 173호, 1993, 온라인참조: 지리산 연곡사 불교 유적 - 선사의 묘탑을 지고 비상하려는 극락조, 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3. "연곡사", 김위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1일
  4.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배게, 2009. 온라인 참조: "연곡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 2017년 04월 11일.
  5. "연곡사", 김위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1일
  6. "연곡사",관광지정보,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한국관광공사. 최종확인: 2017년 04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