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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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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조선 고종|고종]] 31) 1월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격분한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이 농민들을 규합하여 일으킨 농민 봉기.<ref>김의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3613 고부민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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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조선 고종]] 31) 1월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이 농민들을 규합하여 일으킨 농민 봉기이다.<ref>김의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3613 고부민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내용'''==
 
=='''내용'''==
1892년 말 고부군수로 부임해 온 [[조병갑|조병갑(趙秉甲)]]은 기회있는 대로 갖가지 명목으로 수탈을 자행하였는데, 후일 [[전봉준]]이 술회한 공초(供草)에 의하면, [[조병갑]]의 침학(侵虐)의 세목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ref>김창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865 동학운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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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갑]]의 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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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조선 고종|고종]] 29) 말 고부군수로 부임해 온 [[조병갑|조병갑(趙秉甲)]]은 기회있는 대로 갖가지 명목으로 수탈을 자행하였다. 후일 [[전봉준]]이 술회한 공초(供草)에 의하면, [[조병갑]]의 침학(侵虐)의 세목은 다음과 같다.<ref>김창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865 동학운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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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민보(民洑)를 축조한다는 명목 아래 백성의 노동력을 함부로 징발하였을 뿐 아니라, 보를 이용하는 민간에 대하여 상답 1두락에 2두세를, 하답은 1두세를 거두어 도합 700여 석을 착복하였다. 그리고 황무지를 백성들이 개간하면 문권을 주어 징세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뒤 추수할 때 수세하였다.<br/>
 
첫째 민보(民洑)를 축조한다는 명목 아래 백성의 노동력을 함부로 징발하였을 뿐 아니라, 보를 이용하는 민간에 대하여 상답 1두락에 2두세를, 하답은 1두세를 거두어 도합 700여 석을 착복하였다. 그리고 황무지를 백성들이 개간하면 문권을 주어 징세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뒤 추수할 때 수세하였다.<br/>
둘째 부유한 백성들로부터 2만냥을 강제로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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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백성들에게 불효·불목·음행·잡기 등의 죄로 무고하여 재물을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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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백성들을 불효·불목·음행·잡기 등의 죄로 무고하여 재물을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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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창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865 동학운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김창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865 동학운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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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12월 농민들은 우선 억울한 사정을 민소(民訴)의 형식으로 군수에게 진정하기로 하고,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로 삼아 군수 [[조병갑]]에게 두 차례에 걸쳐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ref>김창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865 동학운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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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12월 농민들은 우선 억울한 사정을 민소(民訴)의 형식으로 군수에게 진정하기로 하고,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로 삼아 군수 [[조병갑]]에게 두 차례에 걸쳐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ref>김창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865 동학운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이에 전봉준은 1월 10일 새벽 고부읍의 3문을 부수고 관아로 쳐들어가자 [[조병갑]]은 달아났다.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옥을 파괴하여 억울한 죄인을 석방하고, 불법적으로 약탈해 간 수세미를 농민들에게 반환하고, 민원의 대상이 된 만석보도 파괴하였다. 약 1주일간에 걸쳐 관아의 폐정을 처리한 뒤, 주력부대를 마항장으로 옮기고 일부는 읍에 잔류시켰다. 그 뒤 1월 25일 전군을 요새지인 [[백산성]]으로 옮겼다. 소식을 들은 각 처의 농민군이 [[전봉준]]의 휘하에 집결하여 전면전쟁으로 전환될 기세였다.<ref>정숭교,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97 동학 농민 운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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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한 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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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전봉준은 1월 10일 새벽 고부읍의 3문을 부수고 관아로 쳐들어가자 [[조병갑]]은 달아났다.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옥을 파괴하여 억울한 죄인을 석방하고, 불법적으로 약탈해 간 수세미를 농민들에게 반환하였으며, 민원의 대상이 된 만석보도 파괴하였다. 약 1주일간에 걸쳐 관아의 폐정을 처리한 뒤, 주력부대를 마항장으로 옮기고 일부는 읍에 잔류시켰다. 그 뒤 1월 25일 전군을 요새지인 [[백산성]]으로 옮겼다. 소식을 들은 각 처의 농민군이 [[전봉준]]의 휘하에 집결하여 전면전쟁을 벌일 기세였다.<ref>정숭교,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97 동학 농민 운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정부에서는 새로 [[박원명|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로 임명하고 [[이용태|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아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다. 하지만 안핵사 [[이용태]]는 사후처리를 동학교도 탄압의 기회로 삼아 온갖 악행을 자행하여 그들의 격분을 샀다.<ref>김창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865 동학운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그리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새로 [[박원명|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로 임명하고 [[이용태|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아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다. 하지만 안핵사 [[이용태]]는 사후처리를 동학교도 탄압의 기회로 삼아 온갖 악행을 자행하여 그들의 격분을 샀다.<ref>김창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865 동학운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그리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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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7일 (화) 00:13 판

고부민란(古阜民亂)
Joseon uibyeong.png
대표명칭 고부민란
한자표기 古阜民亂
유형 농민운동
시대 조선
날짜 1894년 1월
관련인물 전봉준, 조병갑
관련단체 동학
관련장소 고부


정의

1894년(조선 고종 31) 1월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이 농민들을 규합하여 일으킨 농민 봉기이다.[1]

내용

조병갑의 탐학

1892년(고종 29) 말 고부군수로 부임해 온 조병갑(趙秉甲)은 기회있는 대로 갖가지 명목으로 수탈을 자행하였다. 후일 전봉준이 술회한 공초(供草)에 의하면, 조병갑의 침학(侵虐)의 세목은 다음과 같다.[2]

Quote-left.png

첫째 민보(民洑)를 축조한다는 명목 아래 백성의 노동력을 함부로 징발하였을 뿐 아니라, 보를 이용하는 민간에 대하여 상답 1두락에 2두세를, 하답은 1두세를 거두어 도합 700여 석을 착복하였다. 그리고 황무지를 백성들이 개간하면 문권을 주어 징세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뒤 추수할 때 수세하였다.
둘째 부유한 백성들로부터 2만 냥을 강제로 빼앗았다. 셋째 태인 군수를 지낸 아버지의 비각을 건조한다는 명목으로 백성들로부터 1,000여 냥을 거두었다.
넷째 대동미 16두씩을 좋은 쌀로 거둬들인 후 나쁜 쌀로 바꾸어 상납하고 그 이익을 착복하였다.
그밖에 백성들을 불효·불목·음행·잡기 등의 죄로 무고하여 재물을 빼앗았다.

Quote-right.png
출처: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3]


1893년 12월 농민들은 우선 억울한 사정을 민소(民訴)의 형식으로 군수에게 진정하기로 하고,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로 삼아 군수 조병갑에게 두 차례에 걸쳐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

폭발한 민심

이에 전봉준은 1월 10일 새벽 고부읍의 3문을 부수고 관아로 쳐들어가자 조병갑은 달아났다.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옥을 파괴하여 억울한 죄인을 석방하고, 불법적으로 약탈해 간 수세미를 농민들에게 반환하였으며, 민원의 대상이 된 만석보도 파괴하였다. 약 1주일간에 걸쳐 관아의 폐정을 처리한 뒤, 주력부대를 마항장으로 옮기고 일부는 읍에 잔류시켰다. 그 뒤 1월 25일 전군을 요새지인 백산성으로 옮겼다. 소식을 들은 각 처의 농민군이 전봉준의 휘하에 집결하여 전면전쟁을 벌일 기세였다.[5] 정부에서는 새로 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로 임명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아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다. 하지만 안핵사 이용태는 사후처리를 동학교도 탄압의 기회로 삼아 온갖 악행을 자행하여 그들의 격분을 샀다.[6] 그리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전봉준 고부민란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조병갑 고부민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고부민란 동학농민운동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고부민란 백산성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가상현실


가상 현실 - 전체 화면 보기


갤러리

주석

  1. 김의환, "고부민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정숭교, "동학 농민 운동",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6.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김의환, "고부민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정숭교, "동학 농민 운동",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유용한 정보

  1. "고부민란",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동학운동",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