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명성황후(明成皇后) | |
대표명칭 | 명성황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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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明成皇后 |
생몰년 | 1851년-1895년 8월 20일(음) |
이칭 | 명성왕후(明成王后), 민비(閔妃)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여주목 근동면 섬락리 사저 |
사망지 | 경복궁 곤녕합 옥호루 |
시대 | 조선 |
대표직함 | 왕비, 추존 황후 |
배우자 |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高宗) |
부 |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 |
모 | 한창부부인 이씨(韓昌府夫人) 한산이씨(韓山李氏) 이규년(李圭秊)의 딸 |
자녀 | 4남 1녀, 순종(純宗) |
전임자 | 철인왕후 김씨(哲仁王后 金氏) |
후임자 |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 尹氏) |
능묘 |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홍릉(洪陵) 37.631906, 127.211094 |
성격 | 인물 |
유형 | 황후 |
목차
정의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의 정비이자 대한제국 추존 황후이다.
내용
고종의 비로, 순종의 어머니이다. 생전에 왕비였다가, 일본에 의해 살해당한 뒤 고종이 황제가 될 때 황후로 추존되었다. 1851년(철종 2)에 나서 1895년(고종 32)에 을미사변으로 시해당하였다.
생애
명성황후는 여주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본명은 민자영이다. 여덟살에 아버지가 죽은 뒤 외가인 서울 감고당(感古堂)에서 왕비가 될 때까지 살았다. 덕분에 어린 시절 도시와 농촌을 고루 체험하였다.[1] 16세인 1866년(고종 3)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비에 책봉되었다.[2] 고종이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하면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의 관계가 틀어졌다.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閔升鎬)의 집에서 폭약이 터져 어머니와 아들이 죽었는데 흥선대원군이 배후에 있다는 의혹이 떠돌았다. 이후에는 친척인 민겸호(閔謙鎬), 민규호(閔圭鎬) 등을 가까이 하여 민씨척족 세도의 원인이 되었다.[3] 명성황후는 개항으로부터 임오군란(壬午軍亂), 서구 열강과의 조약, 갑신정변(甲申政變), 동학운동 등 한국근대사의 중요한 순간에 주, 조연처럼 언급되었다.[4] 심지어 임오군란 등의 사건에서 공격의 표적이 되어, 죽은 것으로 처리되는 일도 있었다.[5] 일본과의 갈등 속에서 1895년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당하였는데,[6] 이때 폐서인이 되었다가[7] 다시 위호(位號)가 회복되었다.[8]
사후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뒤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하였는데, 이것이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9] 고종이 황제가 될 때 황후에 책봉되었다.[10]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에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洪陵)이 있다. 1970년 5월 26일 유릉(裕陵)과 함께 사적 제 204호로 지정되었다.[11]
거행 의례
지식 관계망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고종 | 명성황후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명성황후 | 왕비 | A는 B에 해당한다 | A dcterms:type B |
명성황후 | 책례 | A는 B를 거행하였다 | A ekc:participates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866년 3월 20일 | 명성황후의 왕비는 책례를 거행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579466 | 126.991026 | 명성황후의 왕비 책례를 거행하였다 |
시각자료
갤러리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13]
주석
- ↑ 한영우,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 효형출판, 2006, 22~23쪽.
- ↑ 『高宗實錄』 3년(1866) 3월 己卯: 「二十日詣仁政殿行冊妃禮」
- ↑ 한영우,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 효형출판, 2006, 29쪽.
- ↑ 이민원, 「근대의 궁중 여성 – 명성황후의 권력과 희생 -」, 『史學硏究』 77, 한국사학회, 2005, 85쪽.
- ↑ 『高宗實錄』 19년(1882) 6월 甲子: 「敎曰」
- ↑ 『高宗實錄』 32년(1895) 8월 戊子: 「二十日卯時王后崩逝于坤寧閤」
- ↑ 『高宗實錄』 32년(1895) 8월 庚寅: 「二十二日詔曰」
- ↑ 『高宗實錄』 32년(1895) 10월 丁丑: 「初十日詔曰」
- ↑ 『高宗實錄』 33년(1896) 2월 11일(양력): 「十一日上與王太子移蹕駐御于大貞洞俄國公使館」
- ↑ 『高宗實錄』 34년(1897) 10월 12일(양력): 「十二日行告天地祭」
- ↑ "남양주 홍릉", 문화재 검색,
『문화재청』online , 문화재청. - ↑ "고종명성황후가례도감의궤", 의궤 검색,
『규장각』online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 "홍릉", 문화재 검색,
『문화재청』online , 문화재청.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고종실록』
- 『매천야록』
- 강상규, 「명성왕후와 대원군의 정치적 관계 연구」, 『한국정치학회보』 40-2, 한국정치학회, 2006.
- 김영수, 「을미사변, 그 하루의 기록 -대원군의 침묵과 명성황후암살의 배후」, 『梨花史學硏究』 39, 이화여자대학교 사학연구소, 2009.
- 김창겸, 김선주, 권순형, 이순구, 이성임, 임혜련, 『한국 왕실여성 인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5.
- 민덕식,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어필(御筆)」, 『忠北史學』 25, 충북대학교 사학회, 2010.
- 박계리, 「「명성황후 발인반차도」와 발인 행렬」, 『美術史學報』 47, 미술사학연구회, 2016.
- 서영희, 「명성왕후 재평가」, 『역사비평』 60, 역사문제연구소, 2002.
- 이민원, 「근대의 궁중 여성 - 명성황후의 권력과 희생 -」, 『史學硏究』 77, 한국사학회, 2005.
- 이배용, 「개화기 명성황후 민비의 정치적 역할」, 『국사관논총』66, 1995
- 張暎淑, 「서양인의 견문기를 통해 본 명성황후의 정치적 위상과 역할」, 『한국 근현대사 연구』 35, 한국군현대사학회, 2005.
- 지두환, 『고종황제와 친인척』, 역사문화, 2009.
- 한영우,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 효형출판,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