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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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2월 23일 (목) 03:3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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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다(允多)()
대표명칭 윤다(允多)
생몰년 864(경문왕 4)-945(혜종 2)
시호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
법신(法信)
출신지 경주
승탑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
승탑비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생애

가계와 탄생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는 865년(경문왕 4)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박씨(朴氏)이며, 비문에서는 윤다의 출생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Quote-left.png 대사의 법휘는 윤다(允多)요, 자는 법신(法信)으로 경사(京師) 출신이다. 그의 조부모는 귀족으로서 고관(高官)을 역임하였으며, 효도와 의리를 소중히 여겨 충효의 본이 되었다. 이렇게 가문을 지켰지만, 난리가 나서 몰락하였다. 그러나 명성과 칭송은 많은 사람들의 귀와 귀로 들렸고, 입과 입으로 옮겨 자자하였다. 어머니는 박씨(朴氏)로 성품이 온화하여 사람됨이 정결하였다. 어릴 때부터 속되지 않았으며 未長 (결락) 經. 성심성의로 불사(佛事)를 닦아 산악(山岳)과 같은 정기를 받아 잉태하고 또 어려움 없이 분만하였으니, 효감(孝感)을 말미암아 순산함이 마치 가을에 서리를 맞은 씀바귀가 쉽게 뽑히듯 산고 없이 함통(咸通) 5년 4월 5일에 탄생하였다. 대사가 처음 봉시(蓬矢)를 쏘는 날에 쌍주(雙柱)가 절륜(絶倫)하였다.[1] Quote-right.png
출처:


출가수행

윤다는 7~8세에 이미 출가할 뜻을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가 심하였는데, 거듭된 설득 끝에 마침내 출가를 하게 되었다. 비문에서는 이와 같은 갈등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Quote-left.png 나이 겨우 7~8세에 이미 불교에 몸을 던져 수도할 뜻을 품었으니, 부모에게 와문(蝸門)을 이별하고 선교(禪敎)에 입문하기를 청하였다. 이 때 부모는 더욱 애절하여 倍 (결락) 前. 더욱 애정에 얽혀 허락하지 못하였다. 허락을 받지 못한 대사(大師)는 잠연(潛然)히 실망하였고, 이를 본 어버이는 설득하되 “출가 수도하는 것도 이익이 없지 않으나 옹자(翁子)인 주매신(朱買臣)의 금의출세(錦衣出世)하는 것이 어찌 산승(山僧)의 취납(毳衲)인 누더기로 고행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하면서, 슬피 울며 거듭 거듭 만류하여 뜻을 바꾸도록 하였으나, 어버이는 마침내 아들의 뜻이 굳고 굳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허락하였다.[2] Quote-right.png
출처:


활동

출가 이후 윤다는 가야갑신수(伽耶岬新藪)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주로 활동했던 곳은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桐裏山)의 태안사(泰安寺)였다. 윤다는 태안사의 상방화상(上方和尙)이었던 여(如) 선사를 만나 그의 법맥을 전해 받게 된다. 여(如) 선사는 혜철(慧徹)의 사법제자(嗣法弟子)로. 혜철은 도의(道義), 홍척(洪陟)과 함께 당 나라의 서당 지장(西堂 智藏)에게서 선을 배우고 귀국하여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동리산문(桐裡山門)을 개창한 승려이다. 즉 윤다는 서당 지장(西堂 智藏)으로부터 시작하여 혜철(慧徹)과 여(如)로 이어진 법맥을 이어받은 승려로, 비문에는 이러한 사실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Quote-left.png 서당 지장(西堂 智藏)은 혜철(慧徹)에게 전하였고, 혜철(慧徹)은 여(如) 선사에게 전하였으며, 여(如) 선사는 우리 대사에게 전하였으니, 즉 우리 대사께서는 서당 지장(西堂 智藏)의 증손(曾孫)이다.[3] 대사께서는 서당 지장(西堂 智藏)의 법을 이어받았으니, 수고롭게 서학(西學)을 하지 않고도 세상의 인연을 동성(東城)에 베풀었다. 참으로 실제(實際)가 본공(本空)한 줄 깨달았으며 (결락) 동인(東人)을 바른 길로 인도하였다.[4] Quote-right.png
출처:


윤다는 그의 명성으로 인하여 왕실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때에는 효공왕(孝恭王)이 윤다에게 복을 발원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Quote-left.png 효종대왕(孝宗大王)은 대사가 산곡(山谷)에서 드날리는 도풍(道風)을 흠모하여 윤한(綸翰)을 보내어 지혜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나라 또한 복되게 해주기를 발원하였다.[5] Quote-right.png
출처:


특히 고려 때에는 왕건(王建)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은 윤다를 궁궐로 초청하여 극진한 예로 대우하였는데, 당시의 군신들이 이를 보고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윤다는 흥왕사(興王寺)에서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 때 왕건의 아들인 왕욱(王旭) 왕자로부터 스승이 되어달라는 청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윤다가 본래 그의 거처인 태안사로 돌아가게 되자, 왕은 태안사가 속한 전라도의 관찰사에게 토지와 노비 등을 시주하여 지속적으로 후원할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Quote-left.png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대사의 명성을 널리 들었기에 낭관(郞官)으로 하여금 어찰(御札)을 가지고 스님이 계시는 동리산으로 보내어 청하되 “도덕을 앙모한 지 이미 오래되오니 스님의 거룩한 모습 뵙기를 원합니다”라 하면서 “스님께서는 이미 연로하셔서 보행하시기 힘들 터이오니, 말을 타고 구중(九重)으로 오신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사가 말씀하시되 “노승(老僧)이 출가한 이래로 이제 80세에 이르기까지 아직 말을 탄 적이 없습니다. 산승(山僧)도 역시 왕의 국민이니 어찌 감히 왕명을 거역하겠습니까”하고 석장망혜(錫杖芒鞋)한 보행으로 연하(輦下)에 도착하니 임금이 크게 기꺼워하여 의빈시(儀賓寺)에 모시고 며칠 동안 편안히 쉬시게 한 다음, 상전(上殿)으로 영입하였고 임금 스스로 상(床)에서 내려와 공손히 영접하여 빈객(賓客)의 예로써 대우하였다. 군신들이 이를 보고 그윽이 놀랐다.[6]

대사(大師) (결락) 삼배(三拜)를 하고 물러가면서 흥왕사에 모시도록 명하였다. 그 후 황주원(黃州院) 왕욱(王旭) 낭관(郞官)이 멀리서 스님의 청풍(淸風)을 앙모하고 편지를 보내 제자가 되어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자 희망한다고 하였다.[7]

이 같은 스님의 간청을 들은 왕은 허락하여 동리산(桐裏山)으로 돌아가게 하고 본도(本道)의 수상(守相)에게 명하여 전결(田結)과 노비를 헌납하여 향적(香積)을 제공토록 하였으며, 외호의 가풍(家風)을 잊지 아니하고 항상 팔연(八行)의 예를 펴서 돈독한 단월이 되어 불교의 보존과 유지의 의무를 받아서 각기 진뢰(陳雷)를 본받았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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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윤다의 사상적인 측면은 왕건과의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이를 통해 그는 선뿐만 아니라 교를 아우르는 선교일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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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입적

윤다는 945년(혜종 2) 82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그의 죽음의 장면은 다음과 같이 비문에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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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 이지관, "곡성 대안사 광자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45-346쪽.
  2. 이지관, "곡성 대안사 광자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47쪽.
  3. >이지관, "곡성 대안사 광자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38쪽.
  4. 이지관, "곡성 대안사 광자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49-350쪽.
  5. 이지관, "곡성 대안사 광자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52쪽.
  6. 이지관, "곡성 대안사 광자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53쪽.
  7. 이지관, "곡성 대안사 광자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55쪽.
  8. 이지관, "곡성 대안사 광자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