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섭-정약용과 저술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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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김지선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0월 14일 (토) 21:27 판 (관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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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섭-정약용과 저술 관련 기사()
김현승 일러스트레이터
대표명칭 정창섭-정약용과 저술 관련 기사



정의

민족기록화 정창섭-정약용과 저술 관련 기사 고증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은 기사

내용

다산초당 관련 오류

작품의 배경은 다산초당으로, 다산(茶山)은 초당이 있는 뒷산을 지칭하며 차나무가 많이 자생하였다고 한다.
해당 작품에서 다산초당은 기와집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다산이 거처했던 1808년~1818년에는 작은 초가집이었다고 한다.
1936년에 완전히 해체돼 폐허가 된 다산초당은,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가 출범하면서 해남 윤씨와 강진 관내 유지들의 성금으로 지금의 기와집으로 새롭게 지어졌다.
다산초당이 있던 곳에 세워진 기와집은 5칸 도리단층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곽재우는 그의 아버지인 곽월(郭越)이 명나라에 동지사(冬至使)로 갔을 때 황제가 하사한 붉은 비단의 철릭(帖裏)을 입고 정암진싸움에 임했다고 한다.

Quote-left.png 재우는 그 아비가 명나라 북경에 갔을 때에 황제가 하사한 붉은 비단 철릭을 입고서, 지금 장사(將士)들을 거느리고 의령현의 경내 및 낙동강 가를 마구 누비면서 왜적을 보면 그 수를 불문하고 반드시 말을 달려 돌격하니, 화살에 맞는 적이 많아서 그를 보면 바로 퇴각하여 달아나 감히 대항하지 못합니다. Quote-right.png
출처: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년) 6월 28일. 온라인 참조: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1]


철릭은 저고리와 치마가 연결되어 있는 형태로, 허리 아래를 넓게 한 치마에 잔주름이 잡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2] 그러나 김태의 <김태-홍의장군 곽재우> 속에 묘사된 곽재우철릭 형태의 군복을 입고 있지 않다.

정약용 관련 오류

왜군들은 붉은 옷을 입은 곽재우의 모습을 보고 그를 홍의 장군(紅衣將軍)이라 불렀는데, 곽재우는 이 점을 역이용하여 자신과 몸집이 비슷한 부하들을 가려 뽑아 붉은 옷을 입혀 자신으로 위장해 곳곳에 배치했다고 한다.[3]
그러나 실제 작품에는 모든 병장들이 붉은 군복을 입고 등장한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정창섭-정약용과 저술 관련 기사 정창섭-정약용과 저술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년) 6월 28일. 온라인 참조: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철릭",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3. "곽재우는 이 점을 역이용하여...배치했다고 한다." : "곽재우-홍의(紅衣) 장군, 민초들의 지킴이",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사료
  2. 웹 자원

유용한 정보

  1. 강신철, "민족기록화 대부분 사실과 달라", 『경향신문』, 작성일: 1980년 02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