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진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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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진싸움(鼎巖津싸움)
River battle.png
대표명칭 정암진싸움
한자표기 鼎巖津싸움
이칭 정암진전투
유형 전투
시대 조선
날짜 1592년(조선 선조 25)
관련인물 곽재우,김성일
관련장소 정암진 (경상북도 의령군 정암나루)


정의

임진왜란 때 곽재우가 의병을 이끌고 정암나루에서 왜군을 맞아 물리친 싸움이다.

내용

토적으로 몰린 의병장

임진왜란 초기 왜군은 바닷길을 통해 곡창지대인 전라도의 점령을 시도하였으나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에게 연패하였다. 바닷길이 막히자 이번에는 육로를 통해 전라도를 점령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휘하의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는 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인 경상도 의령으로 진격하였다.
한편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는 지방관이 도주하여 비어 있는 초계성(草溪城)에 들어가 병기와 군량을 수습하고 의병의 군비로 충당하였는데 합천군수에 의해 토적으로 몰려 의병을 해체하고 지리산으로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초유사 김성일은 곽재우의 의병 창의를 크게 평가하고 활동 재개를 촉구하며 의령의 관군에 대한 지휘권까지 맡겼다.

정암진 매복 작전

함안을 점령한 안코쿠지(安国寺恵瓊)의 부대는 정찰대를 보내 강을 건너기 위해 수심이 얇은 곳에 나무 푯말을 꽂아 표시를 해두었다. 이에 곽재우는 한밤중에 이 나무 푯말들을 늪지대로 옮겨두고 정암나루 여러 곳에 군사를 매복시켰다. 푯말을 따라 늪지대로 들어간 안코쿠지의 선봉대는 곽재우 부대에의해 거의 전멸되었다. 겨우 남강을 건넌 안코쿠지의 본대 역시 기다리고 있던 곽재우 군의 기습을 받아 패하여 도주하였다.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의 저지로 남강을 건너는 것이 여의치 않자 왜군은 성주(星州)로 퇴각하였다. 이들은 금산에 주둔하고 있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부대와 합류하여 재차 전라도 침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전라도와 충청도의 의병들과 전열을 수습한 관군의 계속된 항쟁으로 왜군은 전라도 진입에 실패하였다.

기록상의 정암진 전투

정암진 전투의 구체적인 전황은 전해지지 않으나 곽재우의 장인인 이로(李魯)의 『용사일기(龍蛇日記)』에 의병 창의 과정과 초기 의병활동 내용이 전해진다. 정유재란곽재우의 서기였던 배대유가 쓴 전(傳)에도 관련 내용이 있으며,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가장 정확한 기록으로 평가받는 『난중잡록(亂中雜錄)』에도 정암진을 거점으로 한 곽재우의 활약상이 기록되어 있다.


Quote-left.png 왜적의 배 18척이 쌍산역(雙山驛)으로부터 올라와 정승 안국사(政丞安國寺)의 행차라 자칭하고 가야산(伽倻山)을 탐승하려고 했는데, 이 자가 바로 전날 전라 감사를 칭하고 창원(昌原)에서 선문(先文)을 띄웠던 자이다. 정진(鼎津)에 이르러 곽재우(郭再祐)에 의해 퇴각당하고 영산(靈山)ㆍ창녕(昌寧)으로 해서 기강(岐江)을 건너려 할 때 전라 감사라 칭하고 호남으로 향하면서 또 선문을 보내 맞이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초계(草溪)ㆍ의령(宜寧) 등지의 사민들은 두려워서 혹은 산으로 도망하여 나오지 않기도 하고, 우매한 자는 혹 환영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곽재우는 또 왜적 앞에까지 달려가서 도망한 사민(士民)을 끌어내어 의리로 타이르고 창고를 풀어 군사를 먹이며 병졸을 엄격하게 다루어 방비를 갖추었다. 왜적이 곽의 병졸이 부오(部伍)가 엄정(嚴整)함을 보고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이는 틀림없이 정진의 홍의장군이니 도저히 건너갈 수 없다.” 하고 퇴각하여 쌍산(雙山)으로 해서 성주(星州)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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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난중잡록", 『한국고전DB』, online한국고전번역원.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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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