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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봉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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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샘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9월 14일 (목) 00:42 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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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봉은사
(開城 奉恩寺)
대표명칭 개성 봉은사
한자 開城 奉恩寺
주소 경기도 개성시 태평동
건립시기 951년



정의

경기도 개성시 태평동에 있었던 절.

내용

‘대봉은사(大奉恩寺)’라고도 한다. 951년(광종 2)에 태조의 원당(願堂)으로 창건한 국찰(國刹)이다.[1]

Quote-left.png 〈신해〉 2년(951) 대봉은사(大奉恩寺)를 성의 남쪽에 창건하여 태조(太祖)의 원당(願堂)으로 삼고, 또 불일사(佛日寺)를 동쪽 교외에 창건하여 돌아가신 어머니 유씨(劉氏)의 원당으로 삼았다. Quote-right.png
출처: 『고려사』 세가 권제2, 고려 광종, 월미상.[2]


태조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곳으로 고려시대의 절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3]

창건 이후 1032년(덕종 1)과 1142년(인종 20)·1180년(명종 10) 등 세 차례에 걸쳐서 중수하였고, 1234년(고종 21)의 몽고의 병란으로 강화도로 천도하였을 때에는 차척(車倜)의 집을 봉은사로 쓰다가 환도한 뒤 다시 중건하였다.[4]

이 절에는 홍법(弘法)·도융(圖融)·혜소(慧炤)·지광(智光)·원경(元景)·담진(曇眞)·낙진(樂眞)·보우(普愚) 등 고려시대의 승려들이 이곳에 주석하면서 이름을 빛내었다. 그들은 이 절에서 국사(國師)·왕사(王師)의 직위를 받았으며, 이곳에 주석하면서 경을 설하고 선(禪)을 논하는 법회를 베품으로써, 이 절은 다른 절에서 볼 수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5]

보우가 이곳에 머물 때에는 공민왕노국공주가 친히 행차하고 승려 300여 명에게 백포(白布) 2필과 가사(袈裟) 1령씩을 하사하기도 하였다.[6]

Quote-left.png 3월 병술 왕과 공주가 태비(太妃)를 모시고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보우(普愚)의 선(禪)에 관한 설법을 듣고 정례(頂禮)한 후, 폐백(幣帛)과 은으로 만든 바리때, 수놓은 가사(袈裟)를 시주하여 〈시주한 물품이〉 산더미 같이 쌓였으며, 그 문하의 승려 300여 명에게도 모두 흰 베 2필과 가사 1령(領)을 시주하였는데, 사녀(士女)들이 파도처럼 달려와 여기에 미처 닿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고려사』 세가 권제39, 공민왕 5년, 3월.[7]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점차 퇴락하여, 중기 이후에는 그 위치조차 어딘지 모르게 되었다. 또한 절의 건축구조나 가람 배치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8]

주석

  1. 김위석, "봉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태조와 비 유씨의 원당을 짓다", 『고려사』 세가 권제2, 고려 광종, 월미상,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김위석, "봉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김위석, "봉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김위석, "봉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김위석, "봉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국왕 내외가 보우의 설법을 듣고 엄청난 재물을 시주하다", 『고려사』 세가 권제39, 공민왕 5년, 3월,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8. 김위석, "봉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