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국대장공주
Encyves Wiki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 |
대표명칭 | 노국대장공주 |
---|---|
한자표기 | 魯國大長公主 |
생몰년 | ?-1365년 |
이칭 | 보탑실리(普塔失里),승의공주(承懿公主), 인덕태후(仁德太后) |
시호 | 인덕공명자예선안휘의노국대장공주(仁德恭明慈睿宣安徽懿魯國大長公主) |
시대 | 고려시대 |
국적 | 원나라 |
대표직함 | 왕비 |
배우자 | 고려 공민왕 |
부 | 원나라 위왕 |
정의
고려 제31대 공민왕의 정비(正妃)이다.
내용
원나라 공주출신으로 위왕(魏王)의 딸이며 이름은 보르지긴 보타슈리[寶塔失里]이다.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는 그 시호(諡號)이다. 공민왕이 대군으로서 원나라에 있을 때 결혼하여 승의공주(承懿公主)로 책봉되었다.[1]
1349년(고려 충정왕 1) 원나라에서 공민왕과 결혼하였다.[2] 원나라의 강력한 후원으로 충정왕을 퇴위시킨 후 공민왕과 함께 귀국하였다. 홍건적(紅巾賊)의 난으로 복주(福州)에 피난하였다가, 1363년(공민왕 12)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흥왕사(興王寺)의 변이 일어나 화를 입을 뻔하였으나 침착하게 행동하여 공민왕이 위기를 모면하도록 하였다.[3]
노국대장공주는 1365년(공민왕 14)에 난산(難産)으로 죽었다. 공민왕은 그녀를 매우 사랑하여 그녀가 죽은 후로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으며, 친히 왕비의 진영(眞影)을 그려 벽에 걸고 밤낮 바라보면서 울었다. 또 그녀의 영(靈)을 위로해 주기 위해 혼제(魂祭)를 지냈으며, 그 진영을 모시기 위해 장려한 영전(影殿)을 지었다.[4] 또한 능을 호화스럽게 꾸며 장사지내고 '정릉(正陵)'이라 명칭하고, 영암사(靈巖寺)를 공주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삼았다.[5]
지식 관계망
- 고려 공민왕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고려 공민왕 | 노국대장공주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Son B |
노국대장공주 | 흥왕사의 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노국대장공주 | 노국대장공주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노국대장공주진 | 고려 공민왕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주석
- ↑ 김성준, "노국대장공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노국대장공주",
『두산백과』online . - ↑ 김성준, "노국대장공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노국대장공주",
『두산백과』online . - ↑ 김성준, "노국대장공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