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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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9월 1일 (금) 04:43 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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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尹善道)
대표명칭 윤선도
한자표기 尹善道
생몰년 1587-1671
본관 해남(海南)
산(孤山), 해옹(海翁)
약이(約而)
출생지 한성 동부의 연화방(蓮花坊)
시대 조선
국적 조선
대표저서 고산유고
대표직함 동부승지
윤유심(尹唯深)



정의

고산 윤선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대표 저서는 『고산유고』이다.

내용

윤선도의 생애

출생 및 성장

고산 윤선도는 1587년(선조 20) 한성 동부의 연화방(蓮花坊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나 8세에 관찰공 유기(惟幾)의 양자가 되어 해남 윤씨의 종손으로 입적되었다. 해남 윤씨는 호남에서 몇 안되는 동인(東人) 가문이었는데 당시 정계청(鄭介淸) 옥사 사건으로 인해 그의 조부인 윤의중(尹毅中)이 휘말리게 되었고 이후 동인이 남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윤선도가 진사시에 합격한 1612년(광해군 4)은 정치적 열세에 몰린 남인들이 왕권 강화와 북인(北人), 서인(西人)의 타도를 주장하며 복권을 시도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이후 윤선도가 수없이 많은 유배를 겪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1]

관직활동

  • 「병진소(丙辰疏)」를 저술하여 정쟁에 뛰어들다

윤선도가 처음으로 정치 현실에 뛰어든 것은 광해군 시절 권신이던 이이첨의 전횡에 대해 비판적 상소를 올린 일에서 시작되었다. 1616년(광해군 8), 한갓 유생에 불과했던 서른 살의 윤선도가 당대의 권신이었던 이이참의 전횡을 탄핵한 「병진소(丙辰疏)」는 이후 고산의 삶을 결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예 관료로 정계에 갓 입문한 그가 권력의 정점에 선 인물과 직접적으로 대결한 이 사건은 당시에 큰 반항을 일으켰다. 고산의 강직한 성품과 투철한 사대부 의식을 알 수 있게 하는 사건임에는 틀림 없지만 이때문에 윤선도는 이이참과 그 세력들에 의해 경원(慶源)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는데 이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겪은 수많은 유배 경험의 시발점이 되었다. [2]

  • 서인과의 대립과 유배

또한 이 사건은 인조반정 이후 고산이 서인 정권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배경과 동시에 서인들로부터 배척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가 「병진소(丙辰疏)」에서 언급한 김제남 역모 사건이 서인들이 상당한 희생을 치루는 계기를 제공하는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윤선도가 유배에서 풀려난 것은 1623년 인조 반정 이후였다. 그러나 서인 중심의 정계에서 재제외어 출사의 기회를 잡지 못했고, 서인들의 견제로 인해 의금부 도사에 제수받자 이에 불만을 품고 해남으로 이향하였다. [3] 윤선도는 1628년(인조 6) 42세의 나이로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급제하여 다시 정계로 진출하였다. 그는 당시 이조판서였던 계곡 장유(谿谷 張維)의 도움을 받아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로 제수되고 이후 공조좌랑, 하성부 서윤, 시강원 문학 등의 요직을 거치게 되었다. 그러나 1634년(인조 12) 정적들의 견제에 의해 성산 현감(星山 縣監)으로 좌천되었고 이듬해 다시 퇴관하여 해남으로 물러났다. [4]

  • 보길도 입향

윤선도는 호란이 발발한 후 가솔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올라가다가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주도로 배를 돌린다. 이 일로 인해 윤선도는 '남한산성에서 왕을 알현하지 않고 돌아갔다(不奔問)'는 죄목으로 1638년 영덕으로 유배를 가는 등 서인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를 견제할 수 있는 명분을 주게 된다. 그러나 이 떄 제주도로 향하던 도중 잠시 들렸던 보길도에 매료되어 보길도로의 입향 및 은거를 결심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삶의 전환정이 되었다. [5]

  • 원두표를 탄핵하다

윤선도는 1649년 다시 복관된 이후로 끊임없는 정쟁으로 인한 복관과 삭탈을 반복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인재를 등용하기를 청원하는 「시무팔조소(陳時務八條疏)」와 당시 실력자인 원두표를 탄핵하는 「논원두표소(論元斗杓疏)」등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병진소(丙辰疏)」와 더불어 그의 강직하고 원칙주의적인 성품을 잘 나타내고 있다. [6]

  • 예송논쟁의 시발점을 제공하다

1659년에 효종이 승하하자 고산은 73세로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어 효종의 산릉을 간심(看審)하는 데 참여하게 되는데, 이때 그가 추천한 수원(水原)이 채택되었다가 취소되고 건원릉(健元陵) 안 건좌(乾坐) 언덕이 채택되면서 파직당한 것은 본격적인 예송논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듬해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 문제로 남인의 삼년설과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이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고산은 남인으로서 삼년설을 주장하는 장문의 소를 올려 기년설을 주장한 송시열(宋時烈을 배척한다. 이 논쟁에서 패한 그는 함경도 삼수(三水)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후 광양(光陽)으로 이배되는 등 약 8년간의 유배 생활을 겪는다. 삼수의 유배지에 도착한 그는 「예설(禮說)」 두 편을 지어 복제 문제를 소상히 밝히고 있는데, 이를 통해 끝내 타협하지 않는 그의 성격을 다시금 엿볼 수 있다.

  • 말년

1667년(현종8) 8월 해남으로 돌아온 윤선도는 9월에 다시 부용동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5년여간 유유자적하면서 보내다가 1671년에 85세로 별세한다.[7]

고산의 문학 활동

윤선도는 보길도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이 때 지어진 대표적인 작품이 「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이다. 「어부사시사」는 40수의 단가로, 작자와 창작연대를 알수 없는 고려후기 「어부가」를 재창작한 작품이다. 이외 윤선도는 이 시기에 「 산중신곡(山中新曲)」·「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고금영(古今詠)」·「증반금(贈伴琴)」 등을 지었다. 이후 효종대 예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한 윤선도는 경기도 양주(楊州)의 고산에서 생활하였다. 이 곳에서 윤선도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 몽천요(夢天謠)」를 지었다. 문집으로는 『 고산선생유고(孤山先生遺稿)』가 있다. 이 책은 서유린 정조의 명을 받고 간행한 것으로, 한시문이 실려 있고, 별집에는 한시문과 시조(35편), 「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이 밖에 친필로 된 가첩으로 『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 와 『산중신곡』이 전한다. 윤선도는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8]

주석

  1.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2.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3.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4.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5.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6.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7.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8. 전상욱"윤선도",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고미숙, 「미리 보는 <한겨레 고전 인물 평전 100> : 윤선도 평전; 고산 윤선도_정치와 미학은 어떻게 조우하는가?」, 『연보와 평전』 vol.2, 부산대학교 점필자연구소, 2009
    • 문영오, 「고산 윤선도의 한시 연구」, 『한국문학연구』vol.5,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1982
  • 단행본
    • 고미숙, 』윤선도 평전 : 정쟁의 격랑 속에서 강호미학을 꽃피운 조선의 풍류객』, 한겨례, 2013
    • 정명래, 『어부사시사 : 낚시꾼이 풀어쓴 孤山 尹善道』, 샘물,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