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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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김지선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29일 (화) 12:33 판 (조선 개국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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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덕부(沈德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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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심덕부
한자표기 沈德符
본관 청송(靑松)
시호 공정(恭靖), 정안(定安)
노당(蘆堂), 허당(虛堂), 허강(虛江)
득지(得之)
출생지 1328년
사망지 1401년
시대 고려
국적 조선
대표직함 좌승상
심용(沈龍)
자녀 심온(沈溫), 심종(沈淙)
성격 문신
유형 개국공신


정의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내용

활동과 업적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다섯째 아들인 심온(沈溫)조선 세종의 국구(國舅)였고, 여섯째 아들인 심종(沈淙)조선 태조의 부마가 되었다.
고려 충숙왕 복위년 말에 음직으로 사온직장동정(司溫直長同正)에 출사하였고, 고려 공민왕 말년에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고려 우왕 즉위 후 우상시(右常侍)를 거쳐 고려 우왕 원년에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승직되었다.[1]

진포대첩

1378년(고려 우왕 4)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서해도원수를 겸하여 여러 차례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다. 특히 1380년 도원수 나세(羅世)와 함께 최무선(崔茂宣)이 제조한 화포를 처음 실전에 사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2]

Quote-left.png 왜적의 배 5백척이 진포(鎭浦) 어귀에 들어와 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군사를 나누어 지키다가, 드디어 해안으로 올라 각 주(州)ㆍ군(郡)으로 흩어져 들어가서 마음대로 불사르고 노략질하니, 시체가 산과 들에 덮이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느라고 땅에 쏟아진 쌀이 한 자 부피나 되었다.

나세심덕부최무선 등이 진포에 이르러, 무선이 처음으로 만든 화포(火砲)를 써서 그 배를 불태우니,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넘쳤다. 왜적이 거의 다 타죽었고, 바다에 빠져 죽은 자도 또한 많았다. 왜적이 포로로 잡은 자녀를 모조리 죽여 시체가 산같이 쌓여서, 지나는 곳마다 피의 물결이었으며, 3백 30여 명만이 탈출하여 왔다. 죽음을 벗어난 적은 옥주(沃州)로 달아나서, 육지에 있던 적과 합세하여 이산(利山)ㆍ영동(永同)현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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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려사절요』 31권, 경신신우 6년(1380), 대명 홍무 13년. 온라인 참조: '고려사절요 제31권 / 신우 2(辛禑二)',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이성계와의 활동

1385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서 동북면상원수(東北面上元帥)를 겸하여 북청(北靑)에 침략한 왜구를 토벌하는 등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동북면에 침투한 왜구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8년의 요동 출병 때는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로서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좌군에 속하여 이성계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도와주었다. 또한 고려 창왕을 폐하고 고려 공양왕을 세우는 폐가입진(廢假立眞)에는 이성계·정도전(鄭道傳)·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주도적인 구실을 하여 이른바 9공신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고려말 업적

고려 공양왕 즉위 직후에 문하좌시중·경기좌우도·평양도통사(門下左侍中京畿左右道平壤都統使)에 올랐으며, 이듬해 청성군충의백(靑城君忠義伯)에 봉해졌다. 그러나 같은 해 말, 비어(飛語)에 따른 무고로 인해 일시적으로 황해도 토산(兎山)에 유배되었다.
그 뒤 1391년(고려 공양왕 3) 다시 문하좌시중에 복직되고, 하정사인 왕세자 이석(李奭)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성계·정몽주와 함께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다. 1392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조선의 개국을 맞아, 1393년(조선 태조 2) 회군공신(回軍功臣) 1등에 추록되며,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다.
1397년 판문하부사, 이듬해에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72세 때인 1399년(정종 1)에 좌의정이 되었다가 이듬해 치사하였다. 심덕부는 고려 말 정치제도의 개혁과 왜구 토벌에 업적을 남겼다. 고려 공양왕 때에 관찰사제를 폐지하고 안렴사제(按廉使制)를 부활시킬 것, 제사(諸司)의 서무를 도당(都堂)에 직접 보고할 것 등의 개혁을 건의하였다.

조선 개국 후 활동

조선 개국 후에는 신왕조 건설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394년에는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의 판사가 되어, 한양의 궁실과 종묘를 영건(營建)하는 일을 총괄하여 신도 건설에 큰 구실을 하였다.


조선이 개국한 이듬해인 1393년 회군공신(回軍功臣) 1등에 추록되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다. 1394년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의 판사가 되어 한양의 궁실과 종묘를 세우는 일을 총괄하여 1년동안 수도 한양의 성곽, 궁궐들을 모두 완성시켰다. 1399년(정종 1) 좌정승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73세의 고령으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Quote-left.png 좌정승 심덕부(沈德符)가 늙었다고 하여 전(箋)을 올려 사직하니, 그대로 따랐다. Quote-right.png
출처: "좌정승 심덕부가 늙었다고 하여 전을 올려 사직하니 그대로 따르다", 『정종실록』 3권, 정종 2년 3월 3일 무진 2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최무선 이원 A는 B와 관련이 있다
염초 이원 A는 B와 관련이 있다

시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심덕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심덕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사료
    • 『高麗史』 禑王 3년(1377) 10월. 온라인 참조: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을 설치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권 경도 하. 온라인 참조: '경도 하',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최대섭의 민족기록화 '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의 주요 인물 최무선, 원나라에서 귀화한 나세와 함께 진포해전을 이끌었다.
최무선이 제조한 화약과 화포를 실전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노드 및 관계 테이블

노드 관계 노드
최무선 ~와 관련된다 심덕부
나세 ~와 관련된다 심덕부
심덕부 ~을 지휘했다 진포대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