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포대첩
진포대첩(鎭浦大捷) | |
대표명칭 | 진포대첩 |
---|---|
한자표기 | 鎭浦大捷 |
이칭 | 진포해전 |
유형 | 전투 |
시대 | 고려 |
날짜 | 1380년 8월(우왕 6년) |
관련인물 | 심덕부, 나세, 최무선 |
목차
정의
1380년(고려 우왕 6) 고려 수군이 군산 앞바다에서 왜구를 상대로 크게 승리한 해전이다.[1]
내용
고려말 왜구의 침입
고려시대의 왜구는 1223년(고려 고종 10) 처음 고려를 침입하여 이후 5년에 걸쳐 7차례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지역에서 노략질을 저질렀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1350년(충정왕 2년)부터 왜구의 침입이 급격하게 늘어나 115회에 달했고, 우왕 연간(1375~1388)에는 278회에 이르렀다. 일본의 남북분단으로 전란이 지속됨에 따라 자신들의 생활환경이 피폐해지자, 눈을 고려로 돌려 노략질을 자행한 것이다.[2]
화포의 사용
1380년(우왕 6) 8월 진포에 왜구들이 500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거느리고 곡식을 노략질 하기 위해 군산 방면으로 침입해 왔다. 군사의 규모는 대체로 10,000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왜구는 약탈한 곡식들을 함선에 적재할 때 흔들리지 않도록 큰 밧줄로 배들을 서로 붙들어 매고, 일부 병력을 남겨둔 채 육지를 돌아다니며 곡식을 비롯한 재물을 약탈하기 시작하였다.[3]
고려 정부는 심덕부, 나세, 최무선의 지휘 하에 화약 무기를 적재한 신형 함선 100척을 출동시켜 왜선을 소탕하도록 하였다. 고려 함선들은 진포에 이르러 한 덩어리로 묶여있는 적함을 향해 일제히 화전과 화통, 화포를 사용해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화공을 통해 고려 함대는 적선 500척을 모조리 파괴·소각시키고 왜구들에게 붙잡혀 있던 330명의 고려 백성을 구출하였다.[4]
의의와 평가
진포대첩은 고려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 화포와 화통 등의 무기를 사용하여 공격한 최초의 해상전투로 이를 기반으로 왜구 토벌에 큰 기여를 하였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또한 진포대첩의 승리를 계기로 왜구의 침입이 점차 줄어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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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포대첩 | 진포 | A는 B에서 일어났다 | A edm:happenedAt B |
심덕부 | 진포대첩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나세 | 진포대첩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최무선 | 진포대첩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화포 | 진포대첩 | A는 B에 사용되었다 | A ekc:isUsedIn B |
화포 | 최무선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진포대첩 | 황산대첩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조선 태조 | 황산대첩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6.011226 | 126.756783 | 진포대첩 기념탑은 금강호시민공원에 위치한다 |
- 고려말 왜구의 침입 전자지도
시각자료
갤러리
진포대첩 기념탑[6]
영상
- Hyunmok Jo, 진포대첩, YouTube, 작성일: 2015년 12월 02일.
주석
- ↑ 김종수, "진포 대첩",
『디지털군산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진포대첩 기념탑",
『우리역사넷』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종수, "진포 대첩",
『디지털군산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종수, "진포 대첩",
『디지털군산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진포대첩 기념탑",
『우리역사넷』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진포대첩 기념탑", 영상이미지 속 우리 역사,
『우리역사넷』online ,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