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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고달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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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4월 14일 (금) 19:1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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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고달사지
(驪州 高達寺址)
대표명칭 여주 고달사지
한자 驪州 高達寺址
주소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1-1
문화재 지정번호 사적 제382호
문화재 지정일 1993년 07월 23일
건립시기 764년
경내문화재 여주 고달사지 승탑,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



정의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통일신라~고려시대의 절터.[1]

내용

역사

고달사는 764년(경덕왕 23)에 창건되었던 사찰로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2] 신라 구산선문봉림산파를 열었던 현욱(玄昱)이 절을 중건하였고, 862년(경문왕 2) 훗날 진경대사(眞鏡大師)로 불리운 신라말의 고승 심희(審希)가 이곳에서 현욱의 제자가 되었다. 고려 광종 이후 역대왕의 비호를 받아 대찰(大刹)의 면모를 유지하였는데, 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璨幽)는 심희에게 법을 이어 받은 후 고달사에서 28년간 주석하며 중창하여 고려 초 3대 사찰 가운데 하나가 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그 뒤의 역사는 자세히 알 수 없고, 대략 17세기 후반 무렵에 폐사된 듯하다.[3] 오늘날의 고달사터 대부분은 논과 밭, 농가의 터전으로 변해 있다. 절터의 석물들 또한 논밭과 마을집의 석축으로 쓰여진 듯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4]

사찰 명칭의 유래

고달사에는 석조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모두 고달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고 한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절을 이루는데 혼을 바쳤다고 하는데, 절을 다 이루고 나서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어 큰 스님이 되니 이 절을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동영상

갤러리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754년 고달사가 창건되었다
신라시대 현욱이 고달사를 중건하였다
862년 심희가 고달사에서 현욱의 제자가 되었다
고려시대 찬유가 심희에게 법을 이어받아 고달사에 28년간 주석하면서 사세를 키웠다.

관련항목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 여주 고달사지 || A는 B에 있다 ||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여주 고달사지 승탑 여주 고달사지 A는 B에 있다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 여주 고달사지 A는 B에 있다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 여주 고달사지 A는 B에 있다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 찬유 A는 B를 위한 탑이다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찬유 A는 B를 위한 비이다
심희 찬유 A는 B의 스승이다
현욱 심희 A는 B의 스승이다

참고문헌

  • 김용선, 『玄昱ㆍ審希ㆍ璨幽와 여주 고달사』, 한국중세사연구 제 21호, 2006, 111~139

주석

  1. "여주 고달사지"『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4일
  2. "여주 고달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한국관광공사. 최종수정일: 2017년 7월 14일
  3. "여주 고달사지"『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4일
  4.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배게, 2012. 온라인 참조: "고달사터",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최종확인: 2017년 4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