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록화관 개관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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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김지선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4월 5일 (수) 02:11 판 (시각적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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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환의 자결순국
박기태-박승환순국(박승환)-1976s.jpg
작가 박기태
제작연도 1976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형 계몽/항일
분류 유화
소장처 독립기념관


개요

해당 작품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지사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이 1905년 11월 30일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

민영환은 조선왕조 고종때의 문신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될 때 의정 대신 조병세(趙秉世)와 조약의 폐기를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세 통의 유서를 남기고 1905년 11월 30일 새벽에 홀로 자결하였다.
유서는 작품 왼쪽 아래 위치한 앉은뱅이 책상 위에 그려져 있는데, 작은 명함에 쓰여진 유서 한 통이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訣告我大韓帝國二千萬同胞)>이고, 두루마기에 쓰여진 유서 두 통이 미국 공사관에 있는 친지에게 보낸 유서로,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요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또 다른 한 통의 유서는 고종 황제에게 올린 글이다.

작품 속 민영환은 훈장과 견장을 단 서구식 예복을 입고 있고, 왼손 근처에 작은 칼이 놓여져 있다.
작품에 묘사된 배경은 승려와 마당의 석등[1] 등을 고려하였을 때 조계사 뒤편에 있던 민영환 자택으로 추정되며 유해가 갈무리되지 않고 자결할 당시의 상태 그대로 그려져 있다.
현재 이완식의 집 터는 민영환 자결터로서 추모 조형물이 세워져 있으며, 민영환자택이 위치했던 조계사 경내에는 민영환의 동상과 함께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시위대 재1대대장이던 선생이 자결 순국하자 분개한 한국군이 일본군을 공격하는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


고려 공민왕이 원·명 교체기의 공백상태를 이용하여 고려의 전통적인 북진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동녕부정벌을 일으켰는데, 해당 작품은 그 일환으로, 1370년 1월에 이성계 지휘하의 고려군이 고구려의 도읍지였던 동녕부 우라산성(于羅山城)을 함락시키는 장면을 재현하였다.
이 작품은 정확한 인체묘사와 인물들의 표정, 의상과 배경에 대한 작가의 세심한 배려 등이 돋보이는 수작들 가운데 하나이다.[2]


남달리 반일 민족의식이 강했던 선생은 8월 1일 아침 일본군사령관 관저로 집합하라는 긴급 소집 연락을 받자, 병을 핑계로 고참 중대장인 김재흡을 대리 참석시켰다. 그런데 부대로 돌아온 김재흡 중대장의 보고를 통해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사실을 알게 된 선생은, “군인은 국가를 위하여 경비함이거늘 이제 외국이 침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군대를 해산하니 이는 황제의 뜻이 아니오 적신이 황명(皇命)을 위조함이니 내 죽을지언정 명을 받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대성통곡하였다. 그러면서 선생은 평소 품어 왔던 충군애국의 신념과 반일 국권회복을 실현하기 위해 살신성인의 길을 택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는 일찍부터 선생이 존경하였고, 또 서로 의기투합하여 선생을 지지 후원하다가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민영환의 뒤를 따르는 길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라는 유서를 남기고, ‘대한제국만세’를 외친 다음 차고 있던 권총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선생이 단행한 이와 같은 살신성인의 길은 죽음으로써 부하 장병들의 반일 무장투쟁을 명령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따라서 선생의 순국 사실을 전해 들은 휘하의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일제히 대대장과 함께 죽을 것을 맹세하고 봉기하여 반일 무장투쟁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웃에 위치한 시위 제2연대 제1대대 장병들도 이에 호응, 봉기하여 일본군과 남대문에서 치열한 총격전과 백병전을 전개함으로써 대한제국 군대의 기상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선생의 순국으로 폭발된 중앙 시위대의 봉기는 곧 이어 지방 진위대로 파급되어 원주 진위대, 수원 진위대 산하의 강화 분견대 장병들의 봉기와 반일 무장투쟁을 촉발하였다. 따라서 선생의 순국은 해산 군인들이 반일 의병운동에 투신하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병운동을 전국적인 국민적 대중운동으로 확산시켜 간 기폭제가 되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9&contents_id=5501

설명

작품 소재

작품 왼편에서 백마를 탄 흰색 갑옷의 장군이 이성계이고, 오른편에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이 동녕부 동지(東寧府同知) 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이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가, 태조가 온다는 말을 듣고서 우라산성(亐羅山城)으로 옮겨 보전하여 험준한 곳에 웅거해 막으려고 하였는데, 태조가 야돈촌(也頓村)에 이르자, 이오로첩목아가 와서 도전(挑戰)하다가 잠시 후에 갑옷을 버리고 재배(再拜)하며 말하기를,
"나의 선조(先祖)는 본래 고려 사람입니다. 신복(臣僕)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는, 3백여 호(戶)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3]

해당 작품은 위와 같은 장면을 담고 있다.

작품 배경

작품의 배경인 오녀산성오녀산의 북쪽과 동쪽에 연결되어 있는 높고 낮은 여러 산봉우리 가운데서 가장 높고 험한 800m의 산마루를 중심으로 그 둘레에 축조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작품의 오른편에 그려진 오녀산성과 작품 뒤쪽에 배치된 높고 낮은 산봉우리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작품 구도

해당 작품은 승자와 패자의 극명한 대립, 즉 대각선으로 나뉘는 화면 상단과 하단이라는 위치선정, 아래를 내려다보고 위를 올려다보는 시선의 대립, 기세등등한 포즈와 무릎을 꿇은 굴욕적인 포즈의 대립, 완전한 정면상은 아닐지라도 정면을 보여주고 있는 아군과 등을 보이고 있는 적군이라는 전통적인, 또는 도식화된 이분법을 그대로 따름으로써 승리라는 메시지를 일차원적으로 전달할 따름이다.[4]

시각적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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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이오로첩목아오녀산성김태 「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 1975
이 그림에 대한 정보

관련 민족기록화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박기태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 A는 B를 그렸다 1975년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 박승환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 [[ ]]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전쟁기념관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 A는 B를 소장하고 있다
국회사무처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 A가 B를 대여하였다 1991년 1월 8일-1992년 1월 7일
이성계 동녕부정벌 A는 B를 지휘하였다
이성계 오녀산성 A는 B를 공격하였다 1370년 1월
이성계 공민왕 A는 B의 신하이다
이성계 이오로첩목아 A는 B와 대립하였다 1370년 1월
오녀산성 동녕부 A는 B에 있었다
동녕부 쌍성총관부 A는 B와 관련이 있다
동녕부 탐라총관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이오로첩목아 오녀산성 A는 B와 관련이 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975년 김태가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를 제작하였다.
1991년 1월 8일-1992년 1월 7일 국회사무처가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를 대여하였다.
1370년 1월 이성계오녀산성을 공격하였다.
1370년 1월 이성계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가 대립하였다.
중심 시간정보명 시간값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 국립현대미술관 대여연도 1979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532103 126.914133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이 국회사무처에 대여되었다.
37.532103 126.914133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이 전쟁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중심 연결정보 공간정보이름 경도 위도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 前 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37.4930829 127.0005288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 現 소장처 독립기념관 36.7861847 127.2242915

그래프

참고문헌@

  • "동녕부정벌, 『두산백과 온라인 서비스』online, 두산백과. 2017년 04월 04일 확인
  • "환인오녀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04일.

주석

  1. "현재까지의 유물조사에 의하면 석등은 주로 사찰·능묘, 그리고 그 유적지에 주로 남아 있으며, 궁궐이나 저택 등의 유적지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다."- "석등",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비스(2017년 3월 2일 확인)
  2. 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년, 92쪽.
  3. "태조실록 1권, 총서 47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온라인 서비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4월 04일.
  4. 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년, 92쪽.
  5. "민족기록화구국위업편15", 『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online, 국가기록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0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