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달(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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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seo2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4년 2월 15일 (목) 12:39 판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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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달(徐達)

중국 명(明)의 공신. 자는 천덕(天德), 시호는 무녕공(武寧公). 호(豪)의 사람. 처음에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이었으나 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돌아와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략하였다. 누관중서 우승상(累官中書右丞相)에 이르러 위국공(魏國公)에 책봉되었으며, 중산왕(中山王)에 추봉되었다.

서달(徐達)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인물이다. 1332년에 태어났고, 안휘 봉양 사람이다.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주원장과 같은 고향사람이며 어릴 때부터의 친구이다. 주원장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서달(徐達)은 그를 처음부터 따랐고, 회서이십사장의 으뜸이며, 명나라군대 최초의 대원수이다.

서달(徐達)은 개국전에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으로 원나라를 멸망시키는 마지막 전투를 그가 승리로 이끌었다. 그가 이끄는 북벌군이 원나라의 대도를 점령했다. 건국후에는 주원장에 의해 우승상(右丞相)에 임명된다.그러나 2년도 되지 않아 내려온다. 이유는 직무조정이다. 서달(徐達)이 승상의 자리에서 내려온 것과 호유용(胡惟庸)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러나 호유용은 확실히 서달을 끌어내리려고 계획한 바 있다.

명나라 개국 공신 장군 서달(徐達)은 1332-1385년 53세 사망 1354년 22세 주원장과 동향으로 홍건적에 가담해 주원장의 수하가 된다.

야전 최고 사령관이 되어 전장에서 주원장 홍무제가 위기시 몇번을 구해 준다 명나라 3대 개국 공신으로는 서달(徐達), 유기, 이선장을 친다

1369년 37세 홍무제 2년 25만 대군을 이끌고 총사령관이 되어 원나라를 몽골 고원으로 쫓아 내는데 성공한다. 몽골 수도 카라코룸을 불 태우고 시베리아 동부까지 진출한다

말년에는 명나라 3대 영락제 주체의 장인이 되고 국구가 된다.

권력과 재물에 큰 욕심이 없는 그는 살벌한 홍무제의 숙청을 안 당한다. 등창이 악화되 사망한다 서달(徐達)의 아내 사씨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반역자 사재홍의 딸이다

이건 어찌된 일인가?

이것은 주원장의 서달(徐達)에 대한 태도변화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천하를 얻는 단계때, 주원장은 서달(徐達)을 포함한 형제들에게 큰형으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보여준다: 의리를 중시했다.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주원장은 빈한한 출신이다. 농민중에서도 하층농민이다. 그는 지식이 없었고, 돈도 없었다. 그래서 난세에 두각을 나타내기 위하여는 IQ와 EQ를 사용해야 했다. 이 두가지 점에서 그는 발군이었다. 주원장의 뛰어난 IQ는 그의 오성(悟性)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슬쩍 찔러주면 바로 알아차린다. 그의 뛰어난 EQ는 그의 인간적 매력으로 나타난다.

여러해가 지난 후, 황제가 된 주원장은 강호에서의 옛 일을 회고한다. 그리고 자신은 인의(仁義)에서 이겼다고 생각한다. 당시는 군웅이 할거하던 시기인데, 주원장은 거사가 비교적 늦은 편이었다. 그가 어느 정도 세력을 형성했을 때 원군은 이미 선배들에 의하여 거의 소멸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의 적수는 대부분 같은 류였다. 반란군의 우두머리. 그중 두 명의 적수가 가장 강했다. 하나는 장사성(張士誠)이고, 다른 하나는 진우량(陳友諒)이다. 장사성은 돈이 많고, 진우량은 병사가 많았다. 주원장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가진 것은 신의'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형제들과 '동심공제(同心共濟)'했다.

역사기록을 뒤져 보더라도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주원장은 가난뱅이로 처음에는 그도 큰형을 모셨다. 천하가 난세에 빠지자, 그는 홍건군(紅巾軍)의 우두머리인 곽자흥(郭子興)에게 의탁한다. 처음에는 친병이었다가 용맹하게 싸우면서 재능을 드러내자 큰형 곽자흥은 그에게 양녀를 주어 사위로 삼는다. 형제에서 장인사위로 관계가 바뀐 것이다.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비록 중용받았지만, 주원장은 곽자흥의 생각이 편협하고, 안목이 좁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혼자서 사업을 일으킬 것을 생각한다. 1353년, 25살의 주원장은 장인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창업한다. 24명의 형제들을 이끌고 별도 부대를 만들었고, 결국은 자신의 천하를 얻어낸다.

이 24명의 형제는 당초 주원장이 천하를 얻기 위하여 가진 모든 밑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으뜸은 바로 서달이다. 나머지 인물로는 탕화(湯和), 비취(費聚), 육중형(陸仲亨)등이 있다. 주원장은 먼저 이들 형제들과 동감공고(同甘共苦)하며, 좋은 큰형으로서의 자질을 보인다. 그는 통이 크고, 형제들에게 부족한 게 있으면 바로 주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과 쉽게 어울린다. 형제들과 하나가 되어 피차를 구분하지 않았다. 이들 형제들은 그와 무슨 명분을 따지지도 않았고, 그저 그를 우두머리로 여겼을 뿐이다. 의견이 서로 다를 때는 이치를 따지며 다투기도 했다.

예를 들어, 형제들 중 으뜸이자,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고, 그보다 4살이 어린 서달(徐達)에 대하여, 주원장은 공경했고, 형제로 대한다. 시미정 그의 생활이나 감정문제까지도 관심을 쓴다. 서달(徐達)은 자신에 엄격하여, 여색을 탐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이 비교적 늦었다. 주원장은 친히 나서서 미녀 사취아(謝翠娥)를 골라 그와 결혼하게 해준다. 이뿐 아니다. 나중에 서달의 장녀를 자신의 4남 주체(朱棣)와 결혼시켜서, 형제에서 사돈으로까지 발전한다. 이처럼 서로를 아끼는데 어찌 간담상조(肝膽相照), 출생입사(出生入死)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형제들 앞에서, 주원장은 은의를 베푸는 외에 수시로 앞장서서 모범을 보였다. 형제들에게 어떻게 큰형을 대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주원장의 '원래 큰형'이자 '나중에 장인'이 된 곽자흥이 호주에 갇혀 있을 때, 여러 장수들과의 불화로 부장이 곽자흥을 납치하고, 많은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주원장은 앞장서서 구해주러 나선다. 형제들은 그에게 위험한 일에 손대면 괜히 죽을 수도 있으니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주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곽공은 나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다. 그가 지금 어려운데, 내가 만일 가서 구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는 파벌다툼을 무마시키고 곽자흥을 구해낸다. 형제들 앞에서 주군을 구해냈다는 좋은 명성을 쌓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천하를 차지하는 단계에서 서달(徐達)은 대우를 받았다. 주원장의 여러 형제들 중에서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았다. 대명왕조가 건립된 후에는 24명의 형제들 중에서 3명의 공(公)에 봉해지고, 21명이 후(侯)에 봉해지는데, 그중 서달의 지위가 가장 높았다. 위국공(魏國公), 우중서우승상(中書右丞相), 참군국사(參軍國事), 태자소부(太子少傅)가 된다.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서달(徐達)은 원래 큰형 주원장과 함께 복을 누려야 했다. 누가 알았으랴.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않았고, 액운이 금방 닥친다.

홍무제가 된 후의 주원장은 얼마 후 개국황제의 안면바꾸기 철칙을 따르게 된다. 토사구팽(兎死狗烹). 계획적이고 대규모로 개국공신들을 도살하기 시작한다. 예전에 이들 24명의 형제들은 그를 황제의 보좌로 올려놓았다. 그를 하늘의 성인으로 받들고, 신단으로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 성인은 올라가자 내려오지 않는다. 그는 이미 신이 되었다. 그럼 형제들은 무엇인가. 이런 말이 있다. 한 사람이 득도하면 닭과 개들까지도 하늘에 오른다(一人得到鷄犬昇天). 이때 득도한 큰형은 정말 형제들을 개나 닭으로 본다. 이들 형제들도 확실히 하늘로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큰형의 가장 간단하고 거친 방법으로 하늘에 올라간다: 도살당한다.

사료를 보면, 황위에 오른 주원장은 전우들에게 사나운 면목을 드러낸다. 핑계거리를 찾아서, 이들 생사를 같이 넘나들던 전우들을 친다. 그는 더 이상 정이 있고 의리가 있던 좋은 큰 형이 아니다. 옛정을 전혀 생각지 않는 백안랑(白眼狼)이었다.

주원장의 첫번째 전우인 서달(徐達)도 큰형이 변화와 무서움을 확실히 깨닫는다. 그리하여 행동에 극히 조심했다.

사료 기재에 따르면, 칭제후의 주원장은 자주 서달(徐達)을 불렀다. 연회를 베풀어 먹고 마셨다. 겉으로는 매번 '포의형제'로 칭했지만, 실제로는 천자의 티를 드러낸다.

서달(徐達)은 어떠했는가? 그는 항상 겸허하고 조심했다. 군신의 존비질서를 넘지 않으려 애썼다.

조정의 예의제도에 따르면, 개국공신 서달(徐達)은 관직이 승상에 이르므로, 외출시 상당한 규모의 호위대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보통의 가마와 말을 타고 드나들었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검소한 생활을 한다. 전혀 사치, 낭비하지 않았다. 가무를 즐기거나 연회를 베풀어 자신의 고귀함을 자랑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주원장은 서달(徐達)을 시험해본 적도 있다. 자신이 살았던 집을 서달에게 넘겨준다. 서달은 극구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서달(徐達)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원장이 말한 집은 주원장이 오왕을 칭할 때의 오왕부(吳王府)였기 때문이다. 그 집에 들어가서 산다면, 칭황불신(稱王不臣)의 생각을 품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그래서 극구 받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시험은 계속되었다. 명사 기록에 따르면, 한번은 주원장이 서달(徐達)과 술을 마시는데, 주량이 센 서달을 일부러 취하게 만든다. 그리고 황상의 이불을 덮어준다. 서달(徐達)은 깨어나서 대경실색한다. "놀라서 계단 아래로 내려가서 바닥에 엎드려 죽을 죄를 졌다고 소리친다" 확실히 주원장은 고의로 서달(徐達)의 충성을 시험해 본 것이다. 서달(徐達)의 행동을 보고 주원장은 당연히 기뻐했다. 처벌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상을 내린다. 서달(徐達)은 대장군이다. 위풍당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원장의 앞에서 그는 이미 '조심해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를 보면 그는 주원장의 곁에서는 아주 조심해야한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것이다.

야사를 보면, 심지어 "승기루(勝棋樓)"의 고사까지 전해진다. 서달(徐達)은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것을 표명했다는 것이다. 서달은 바둑의 고수인데, 한번은 주원장이 서달(徐達)을 불러 바둑을 둔다. 그리고 서달(徐達)에게 절대로 양보하지 말고 제대로 두라고 명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바둑을 두기 시작했는데, 이번 판은 아침부터 정오까지 계속되었다. 그래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끝내기를 할 때 돌연 서달은 돌을 놓지 못한다. 주원장이 놀라서 묻는다: "장군은 왜 더 놓지 않는가?" 서달이 바닥에 닾드려 말한다: "황상께서는 판을 상세히 봐주십시오." 주원장은 그제서야 발견한다. 바둑판의 검은 돌이 이미 '만세(萬歲)'라는 두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주원장은 크게 기뻐하며 이 누각과 막수호 화원을 서달(徐達)에게 하사한다. 이것이 바로 '승기루'의 내력이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대명은 개국한 후 주원장이 여러 공신들을 강력하게 경게한다. 당연히 여기에는 공신들 자신의 원인도 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대신들은 훈구대신이 된 후에도 공을 내세워 오만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원인은 주원장의 변태적인 권력욕이다. 권력을 손에 쥐자, 남이 빼앗아갈 것을 겁낸다. 주원장의 후계자인 태자 주표는 성격이 나약하여, '당우지풍(唐虞之風)", "불기살륙(不嗜殺戮)"했다. 이는 더더욱 주원장의 우려를 강화시킨다. 주표가 장래 이들 숙부, 백부들을 억누르지 못한다면, 대명강산은 주인이 바뀔 수도 있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황위에 앉은 후 암중으로 살심을 품어 문호를 정리하기로 한다. 그렇게 하여 주씨의 명왕조정권을 반석처럼 굳게 하려 한 것이다.

나중에, 많은 형제들이 주원장에게 제거당한다. 그러나 오직 서달(徐達)만은 주원장이 손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옛정을 생각해서라기보다는 서달(徐達)의 잘못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서달(徐達)은 너무나 잘 행동했고, 그에게서는 거의 핑계거리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주원장의 서달(徐達)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명을 받아서 나가면 성공하여 개선했다. 그리고도 자랑하지 않고 겸손했다. 여색도 좋아하지 않고, 재물도 취하지 않았다. 가운데 바르게 하여 하자가 없다. 해와 달처럼 밝다. 이런 사람은 대장군 한 사람 뿐이다." 이 말은 서달에 대한 총체적 평가라 할 수 있고, 아주 높은 평가이다. 서달(徐達)은 백전백승이며 자만하지 않고, 호색하지 않고 재물을 탐하지 않으며 광명정대하고 정천입지의 사내대장부라는 것이다. 이런 완벽한 사람은 다시 찾기 어려울 것이다.

당연히 이런 장점들 외에, 홍무제 주원장에 있어서, 그가 서달(徐達)에게서 시험하고 싶었던 것은 단 한가지이다: 당파를 만들어 사욕을 도모하지않는지. 이것은 황권에 대한 최대위협이다.

서달(徐達)이 주원장의 앞에서 공손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한 사람에게 찍히게 된다.

그는 바로 황제의 총애를 받는 인물인 호유용이다.

호유용과 서달(徐達)의 투쟁이 시작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서달(徐達)은 조정에서 지위가 높았고, 호유용은 그의 명망을 이용하여 이익을 도모하려 한다. 그래서 서달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는데, 서달(徐達)은 다른 사람들과 지나치게 가까이 하지 않았다. 게다가 호유용의 품행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아, 무시한다.

당당한 황제의 총신인데, 서달(徐達)과 가까워지려 했으나 거절당한다. 그래서 호유용은 분노하게 된다. 오히려 살의를 품는다. 서달의 가족 복수(福壽)를 매수하여 서달(徐達)의 집안생활을 알아내고, 독을 넣어 죽이려고 한다.

다행히 이 복수는 양심이 남아 있어서, 이리저리 생각해본 다음에 주인에게 차마 손을 쓰지 못하고, 서달에게 솔직히 자백한다. 서달은 매우 화가나서 주원장에게 호유용의 행위를 알린다. 이 자는 입과 속이 다르다. 겉으로는 좋은 말을 하는데, 뒤에서는 독수를 쓰고 있다. 조심하시는 것이 좋겠다. 주원장은 그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호유용은 처벌받지 않고 지나간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서달(徐達)과 같은 초중량급의 개국공신을 주원장의 묵인이 없었다면 터럭하나 건드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이 개국공신은 비록 호유용에게 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주원장의 암산(暗算)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민간의 "사증아(賜蒸鵝)" 이야기이다. 서달(徐達)에게 독창이 생겨서 음식을 가려야 하는데, 주원장은 굳이 삶은 거위고기를 서달에게 내린다. 서달은 눈물을 흘리면서 씹어먹었고, 결과적으로 독창이 발작하여 죽고 만다. 이 민간전설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다만 믿지 않을 수도 없다. 결국 호유용이 서달(徐達)에게 감히 도전했다는 것은 누가 그에게 그런 담량을 주었겠는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서달(徐達)은 홍무18년 즉 1385년에 죽었다. 이때 주원장은 이미 호유용을 포함한 승상을 모조리 제거했을 때이다. 마지막으로 이 공적이 탁월한 서우상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주원장은 아주 비통해 했다. 명사에 따르면, "황제는 조정을 철(輟)하고, 장례때 비통해 마지 않았다. 중산왕(中山王)에 추봉하고, 시호를 무녕(武寧)이라 한다. 삼세의 왕작을 내리고, 중산의 북쪽에 매장하게 하며 신도비문을 황상이 짓는다. 태묘에 배향하고, 공신묘에 초상을 두는데 위치는 첫째로 하였다."

사후에 서달(徐達)은 최고의 영예를 얻는다. 왕에 봉해진다. 당연히 이때는 어떻게 상을 내려도 주원장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주원장의 아픈 마음과 비교하면 공신 서달(徐達)의 죽음이 황제에게 가져다준 가장 큰 수확은 철저히 안심해도 되겠다는 것이다. 민간에서 서달(徐達)의 죽음을 주원장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한편으로 서달(徐達)이 민간에서 높은 명망을 얻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중국의 백성들이 숭상하는 대표인물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폭군의 마음을 추측한 것이다. 주원장의 이런 마음을: "야심이 없다고? 명망이 너무 높으니, 나는 안심이 되지 않는다."

황룡(黃龍)

황룡(黃龍)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

곡창(鹄蒼)

곡창(鹄蒼)

세계 최초 개이름.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泰山(태산)=서산(徐山)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서귀포(西歸浦)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서불과차(徐不過此)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서복(徐福)과 서귀포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함양군 한·중·일 서복국제학술심포지엄

함양군은 산삼축제 기간동안 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에서 ‘2018년 한·중·일 서복 국제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한중일 서복연구협의회 창립

서복문화국제연구협의회 창립을 위한 준비위원회 2차 회의가 2015년 10월 16일 중국 강소성 연운항시에서 열렸다.

서복과 제주 한중일 불로초 장수문화 세미나

(사)제주서복문화국제교류협회(이사장 김형수)가 주관하고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와 공동주최하는 '제16회 한중일 제주서복문화 학술세미나'가 2017년 12월 12일 오후 1시부터 서귀포예술의전당 소극장에서 열렸다.

서복문화국제협의회

한·중·일 서복문화 세계문화유산 등재 공동노력 합의 가칭 서복문화국제연구협의회가 제주에서 태동을 준비하고 있어 주목된다. 한·중·일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2015년 9월 28일 서귀포시 소재 하얏트 리젠시 제주호텔에서는 한·중·일 대표, 서복 연구가 등 50여명이 한 자리에 모여 가칭 서복문화국제연구협의회(徐福文化國際硏究協議會)가 창립을 위한 준비위원회 1차 회의를 개최했다.

국제서복문화제(龍口 롱코우시)

서복국제동도문화절(舟山 저우산)

서복해양문화제 (连云港市 Liányúngǎng Shì 롄윈강시)

월병(月餠)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대장군 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 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

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

고려도경(高麗圖經)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책.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고군산군도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 중국 사신 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새만금 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역대 서국(徐國) 국왕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 분파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1]]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서귀포(西歸浦)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서불과차(徐不過此)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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