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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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현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3월 15일 (수) 09:46 판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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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영(粲英)()
대표명칭 찬영(粲英)
영문명칭 Chanyeong
생몰년 1328(충숙왕 15)-1390(공양왕 2)
시호 대지국사(大智國師)
목암(木菴)
찬영(粲英)
탑호 지감원명(智鑑圓明)
고저(古樗)
성씨 한씨(韓氏)
본관 양주(楊州)
승탑비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忠州 億政寺址 大智國師塔碑)



정의

고려후기의 승려

생애

가계와 탄생

Quote-left.png 스님의 휘는 찬영(粲英)이고 字는 고저(古樗)이며, 호는 목암(木菴)이다. 속성은 한씨(韓氏)이며 아버지의 휘(諱)는 적(績)이니 양주(楊州) 사람으로 사복직장(司僕直長)[해설 1]을 역임하였고, 어머니는 곽씨(郭氏)이니, 청주(淸州) 출신으로 선관서승(膳官署丞)[해설 2]인 영번(永潘)의 딸이다. 태정(泰定) 무진년(戊辰年, 1328) 1월 8일에 탄생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충주 억정사 대지국사 지감원명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10-11쪽.


찬영 스님은 1328년 1월 8일에 태어났다.

출가수행

Quote-left.png 14살 때 서울로 유람차 왔다가 삼각산(三角山)의 삼봉(三峰)이 우뚝 서서 초연(超然)함을 바라보고, 출가(出家)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삼각산 중흥사(重興寺) 원증국사(圓證國師)를 은사로 하여 삭발하고 스님이 되어 법(法)을 배웠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충주 억정사 대지국사 지감원명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11쪽.


찬영 스님은 14세(1341년)에 삼각산 중흥사[해설 3]로 출가하여 원증국사 태고 의 제자가 되었다. 5년 후 정혜국사를 친견하고, 장흥 보림사의 제 2좌(座)가 되었다. 유점사(楡岾寺) 수자화상(守慈和尙)을 친견하고 그의 문하에서 수행하였다.


Quote-left.png 경인년(庚寅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승과고시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하였고, 계사년(癸巳年)에는 또 공부선과(功夫選科)에 으뜸으로 합격하였다. 그 당시 국일지엄존자(國一智嚴尊者)가 스님의 관상을 보고 이르기를 "이 사람은 반드시 왕의 스승인 왕사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충주 억정사 대지국사 지감원명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12쪽.


찬영스님은 22세의 나이에 승과시험에 상상과로 합격하고, 3년후 25세 때는 전국의 교종과 선종의 모든 스님을 모아 각기 스스로 얻은 바의 견해를 시험한 시험에 으뜸으로 합격하였다. 이미 승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두각을 나타낸 찬영을 두고 당시 고승 국일지엄존자(國一智嚴尊者)가 찬영이 왕사가 될 것이라 예언 하였다.

활동

Quote-left.png 을해년(乙亥年, 1359) 봄에 공민왕이 궁중으로 초치(招致)하여 스님의 법력(法力)을 공경하고, 그의 용모가 기이함을 찬탄해 마지않고 벽안달마(碧眼達磨)라고 칭하였다. ... (중략) ... 임자년(壬子年) 봄에는 공민왕이 내원(內院, 내불당)으로 맞아들여 정지원명 무애국일선사(淨智圓明 無碍國一禪師)라는 호를 올렸고 또 금란가사(金襴袈裟)와 바리대 및 묘필(妙筆)과 관음대사상(觀音大士象) 등을 선사하여 지극한 정성을 보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충주 억정사 대지국사 지감원명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13-14쪽.


찬영스님과 공민왕의 깊은 인연.


Quote-left.png 계해년(癸亥年, 1383) 3월 을축일에 왕사로 책봉하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정지원명 묘변무애 국일도대선사(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淨智圓明 妙辯無碍 國一都大禪師)”라는 칭호를 드리고, 예를 갖추어 사신을 보내어 충주 억정사(億政寺)로 맞이하였다. ...(중략)... 스님은 또 신왕에게 왕사의 사직서와 인장을 환납하였으나, 혼군인 창왕은 이를 다시 스님에게 돌려 보내고 다시 선왕이 섬기던대로 왕사로 섬겼다. ... (중략)... 공양군이 즉위한 다음해인 경진년(1390)에 겸손한 말로 편지를 써서 사신을 보내어 경성으로 맞이하고 국사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당시 대간으로부터 이단인 불교인을 국사로 모시는 것은 부당하다고 배척하는 상소가 있었다, 스님은 이 일을 알고 강력히 거절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충주 억정사 대지국사 지감원명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15-16쪽.


찬영은 우왕 9년에 왕사로 책봉되었다. 우왕 이후 창왕도 찬영스님을 계속해서 왕사로 맞이하였다. 공양왕 또한 즉위하자 찬영을 국사로 맞이하려 하였으나, 당시 대간으로부터 이단인 불교인을 국사로 모시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는 상소가 있는 것을 알고, 찬영은 국사직을 강력히 거절하게 된다.

입적

Quote-left.png 을해년(乙亥年, 1359) 봄에 공민왕이 궁중으로 초치(招致)하여 스님의 법력(法力)을 공경하고, 그의 용모가 기이함을 찬탄해 마지않고 벽안달마(碧眼達磨)라고 칭하였다. ... (중략) ... 임자년(壬子年) 봄에는 공민왕이 내원(內院, 내불당)으로 맞아들여 정지원명 무애국일선사(淨智圓明 無碍國一禪師)라는 호를 올렸고 또 금란가사(金襴袈裟)와 바리대 및 묘필(妙筆)과 관음대사상(觀音大士象) 등을 선사하여 지극한 정성을 보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충주 억정사 대지국사 지감원명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13-14쪽.


찬영스님과 공민왕의 깊은 인연.

주석

용어해설

  1. 사복(司僕)은 사복시(司僕寺)로서 고려와 조선 시대에 궁중의 수레, 마필, 목장 등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고려말의 직장(直長)은 종 7품이다.
  2. 선관서는 고려시대에 제사와 연회에 쓰이는 음식을 맡아보던 관서이다.
  3. 태고사 인근에 위치한 사찰이다.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최근 복원 작업이 이루어 지고 있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