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엔닌이 신라 장보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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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재형 기자(법보신문)

일본 엔닌이 신라 장보고에게

Quote-left.png 아직껏 귀하를 직접 뵈옵지는 못했으나 높으신 이름을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기에 우러러 존경하는 마음이 더해갑니다. 봄이 한창이어서 이미 따사롭습니다. 바라옵건대 대사의 존체에 만복이 깃들이기를 기원합니다. 저 엔닌은 대사의 어진 덕을 입었기에 삼가 우러러 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품어온 뜻을 이루기 위해 당나라에 왔습니다. 부족한 이 사람은 다행히 대사께서 발원하신 적산원(赤山院)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와 기쁨 이외에는 달리 표현해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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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0년 2월, 엔닌(圓仁, 794-864)이 처한 상황은 절박했다. 당나라 땅을 밟은 지 두 해가 되어 가는데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여행허가서가 없으면 불법을 배우기는커녕 순례도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이미 일본 유학승을 불허한 상황에서 이를 돌이키기란 쉽지 않았다. 이제 그가 의지할 곳은 장보고(張保臯, ?-846)와 그를 따르는 신라인들뿐이었다. 하지만 엔닌은 확신했다. 그동안 자신이 보아온 신라인들이라면 어떻게든 당 관청에서 여행허가서를 받아 내리라는 것을.

좌충우돌, 고난의 당나라 여행

현장(玄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과 더불어 세계 3대 여행기 중 하나로 꼽히는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저자 엔닌. 평민 출신이었던 그는 9살 때 절 생활을 시작해 15살 때 천태종 초대 좌주(座主) 사이초(最澄, 767-822)의 제자가 됐다. 엔닌은 엄격한 스승 밑에서 천태사상을 비롯해 선, 계율, 밀교를 차근차근 익혀나갔다. 밀교가 일본불교의 흐름을 주도할수록 천태종이 비주류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천태종의 상황도 이해할 수 있었다.

822년, 스승 사이초의 쓸쓸한 입적을 지켜봐야 했던 엔닌천태종의 중흥을 이루리라 다짐했다. 엔랴쿠지(延曆寺)에 머물며 법을 설하고 수행을 지속하던 엔닌이 구법승에 선출되어 견당선에 오른 것은 43살 때였다. 숱한 생사의 기로에 서야만 하는 고난의 시작이었다. 엔닌은 태풍으로 인해 연거푸 두 번이나 실패하고, 세 번째 당나라에 도착했지만 거센 파도로 물건 대부분을 잃고 겨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잃어버린 것 중에는 지쿠젠국(筑田國) 태수가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에게 편의를 부탁하는 추천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엔닌은 크게 낙담했다.

견당사 일행은 당의 수도 장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엔닌은 양주 개원사에 머무르며 교류를 넓혀나갔다. 대부분 승려들이었지만 상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중에는 신라 무역상인들도 여러 명 있었다. 그는 성지를 순례할 수 있는 여행허가서를 얻으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엔닌과 견당사 일행은 839년 2월 운하를 따라 장안으로 갔다. 엔닌은 그곳에 미리 도착해 있던 일행들에 이끌려 귀국하려는 배에 올랐다.

엔닌의 마지막 기대, 장보고

하지만 엔닌은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제자 등 일행 3명과 산동에서 몰래 내렸다. 일단 당에 남아 순례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엔닌은 그때 초주(楚州)로 목탄을 수송하던 신라인들을 만나 그들의 마을까지 갔지만 당의 관리에게 발각돼 다시 견당선으로 이송됐다.

엔닌은 모든 걸 체념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운명이었을까. 때마침 부는 역풍으로 배가 산동반도로 되돌아왔다. 이 무렵 엔닌의 열정을 안 적산 법화원(法華院) 주지 법청과 최훈, 장영 등은 그가 무사히 당에서 구법활동을 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이미 일본 유학승 불허가 결정된 탓에 번복이 쉽지 않았다. 마지막 결정을 가름할 그 무엇이 필요했다.

엔닌장보고를 떠올렸다. 엔닌에게 장보고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일본을 떠나기 전부터 장보고는 당, 신라, 일본의 해상을 장악한 국제적인 인물로 잘 알려졌다. 엔닌법화원에 머무르며 장보고라는 인물에 대한 세세한 얘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장보고, 중국에서 청해진으로

당시 신라는 중앙집권체제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왕위계승쟁탈전이 치열했다.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졌고 스스로 살 길을 모색해야 했다. 장보고도 그런 백성들 중 하나였다. 젊은 시절 장보고는 중국으로 건너가 서주 무령군에서 장교로 근무했다. 뛰어난 무예에 지략까지 갖춘 그는 30살 때 군사 1000명을 거느리는 지휘관이 되었다. 엄격한 골품제도가 시행되는 신라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장보고는 824년 무렵 안정된 삶과 출세를 포기하고 귀국했다. 신라인을 약탈해 노예로 팔아넘기는 중국인 노예무역선을 소탕하기 위해서였다. 완도지역에서 자신의 세력기반을 구축한 그는 828년 흥덕왕을 만나 청해(淸海)에 진(鎭)을 설치할 것을 요청했다. 흥덕왕장보고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그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했다. 병사와 토착주민 1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했다. 장보고는 출몰하는 해적선을 직접 소탕하고 노예무역과 연결된 해상세력들을 엄격히 단속했다. 그의 활약이 두드러질수록 서남해안 일대의 도적들이 설 곳이 없었고 노예무역도 점차 근절됐다.

장보고는 당과의 교역을 위해 수시로 교역사절단을 파견했다. 또 등주 적산포를 거점으로 당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라인들을 규합해 조직화했다. 그는 당의 물품을 구입해 일본에 판매하는 중개무역을 본격화했다. 교역은 대성공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최고 실권자들도 장보고와 줄을 놓으려 노력했다.

비로소 중국 불교를 섭렵한 엔닌

840년 2월17일, 엔닌장보고에게 편지를 쓸 무렵은 장보고의 전성기였다. 신라 최고의 실력자였을 뿐 아니라 당에서 일본에 이르는 바다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엔닌은 편지에서 오래 전부터 대사를 존경했으며 대사가 세운 적산원에서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주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여행허가서 얘기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법화원의 신라인들에게 벌써 전해 들었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엔닌장보고에게 편지를 보내고 며칠 뒤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일어났다. 당 관청이 그에게 여행허가서를 발급한 것이다. 그 배경에 장보고의 배려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엔닌에게 장보고는 관세음보살의 화신과 같았다.

그는 중국의 불교 성지인 오대산으로 향했다. 800km가 넘는 험난한 길이었다. 엔닌은 그 여정에서도 신라인 사찰인 신라원(新羅院)에 자주 머물렀다. 오대산에 도착한 그는 3개월 간 그곳에 머물렀다. 여러 선지식을 만나 오랫동안 일본 천태종이 풀지 못했던 난제들에 대한 답을 얻었고, 중대를 비롯한 오대산 다섯 봉우리를 모두 올라 참배도 했다.

840년 7월1일 엔닌은 다시 장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가장 큰 관심은 밀교였다. 엔닌은 자성사에 머물며 유명한 밀교 승려들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고 중요한 경전을 필사했다. 특히 당시 최고의 밀교 고승이었던 원정(元政)에게서 ‘금강계대법’을, 의진(義眞)에게서는 태장·소번지대법을 익힐 수 있었다.

불교 탄압에 휩쓸린 귀국길

그렇게 장안에서 1년을 보낸 엔닌은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는 관청에 귀국을 허가해달라는 문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좀처럼 허가가 나지 않았다. 엔닌은 초조해졌다. 불교를 대하는 황실의 태도도 악화되어 갔다.

842년 중국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불교탄압 중 하나인 회창폐불(會昌廢佛)이 시작됐다. 갈수록 탄압은 거세졌고, 수많은 사찰들이 사라졌다. 845년에는 50세 이하의 승려들을 모두 환속시켰고, 그 법은 외국인 승려였던 엔닌에게도 적용됐다. 그는 속복을 입고 머리를 기를 수밖에 없었다. 그와 친분 있는 당나라 고위 관리자들도 더 이상 그를 도울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신라인들을 떠올렸다.

엔닌은 장안을 떠나 신라인들이 있는 초주(楚州)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난 신라인들은 엔닌의 귀국을 도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무렵 엔닌장보고가 신라의 왕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엔닌은 통탄했다. 위대한 인물이 정략에 휘말려 목숨을 잃어야 하는 현실세계가 혐오스러웠다.

엔닌이 입당한지 10년 째 되던 847년 9월2일, 그는 마침내 적산포에서 신라인 해상업자 김자백, 흠양휘, 김진 등의 도움을 얻어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다시 삭발을 하고 승복도 입었다. 배는 한반도 서남해를 거쳐 9월18일 무사히 하타카항에 도착했다. 10년에 걸친 험난한 여정이 막을 내린 것이다.

이후 엔닌은 일본 최고의 승려로 받들어졌다. 854년 4월, 엔랴쿠지 3대 좌주가 된 그는 천태사상과 밀교를 선양하는 데 주력했다. 또 틈틈이 집필도 하여 『입당구법순례행기』 외에도 『금강정경소』, 『현양대계론』 등 여러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864년 1월 14일 72살로 엔닌이 입적하자 일본 조정은 ‘자각대사(慈覺大師)’라 칭했다. 엔닌장보고에게 보낸 편지는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수록돼 있다.

같이보기

  • 일본 엔닌과 신라 장보고 지식관계망

주석

  1. 안정애,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12. 온라인 참조: "9세기 중국의 생활상 - 엔닌, 일기 형식의 동방 여행기를 남기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 "입당구법순례행기, e뮤지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법화원", 『우리역사넷』online국사편찬위원회.
  4. 검은돌, "산동성 '적산 법화원', 『네이버 블로그 - 검은돌의 하루하루』online, 작성일: 2011년 10월 22일.
  5. 검은돌, "산동성 '적산 법화원', 『네이버 블로그 - 검은돌의 하루하루』online, 작성일: 2011년 10월 22일.

참고문헌

  • 엔닌 저, 신복룡 역,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 김문경, 「당·일에 비친 장보고」, 『동양사학연구』 제50집, 동양사학회, 1995, 145-165쪽.
  • 정청주, 「장보고의 생애와 활동」, 『여수대 논문집』 제14집, 여수대학교, 1999, 61-73쪽.
  • 정순모, 「장보고의 법화원 건립과 그 기능」, 『중국학논총』 Vol.18, 고려대학교 중국학연구소, 2005, 191-210쪽.
  • 이병노, 「일본에서의 신라신과 장보고」, 『동북아 문화연구』 Vol.10,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06, 319-341쪽.
  • 이유진, 「엔닌의 여행과 동아시아세계 인식」, 『동양사학회 학술대회 발표논문집』, No.2, 동양사학회, 2009, 1-20쪽.
  • 변인석, 「7세기 재당 신라원의 분포와 성격에 대하여」, 『한국고대사탐구』 Vol.9,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1, 43-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