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화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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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섭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29일 (화) 01:0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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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화변(壬午禍變)
대표명칭 임오화변
한자표기 壬午禍變
이칭 사도세자 사건
유형 사건
시대 조선시대
날짜 1762년 윤5월 13일-윤5월 21일
관련인물 영조 영빈이씨



정의

1762년(영조 38), 임오년에 발생한 정치적 화변으로 [[조선 영조|영조]가 대리청정(代理聽政) 중인 왕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이다.

내용

임오화변이 일어난 원인과 현재 학계의 분석

임오화변 일어나게된 복합적인 원인

경종대 이후 당쟁은 군주 혹은 예비 군주를 선택하는 상황과 결부되어 한층 파급력도 크고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영조는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탕평책을 실시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세자와 갈등을 일으켜 임오화변이 발생하였다. 임오화변영조사도세자의 성격적 갈등, 신임의리(辛壬義理)를 둘러싼 노·소론 당론의 대결 구도, 세자를 둘러싸고 궁중 세력과 연계된 당파 간 갈등 등 다양한 원인을 배경으로 한다.[1]

임오화변에 대한 다양한 분석 중 정조가 지은 지문을 근거로한 분석

  • 임오화변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서는 ·소론 당쟁설과 영조사도세자의 성격 갈등설이 대립하는 가운데 뚜렷한 설명이 제시되지 못하는 상태이다. 혜경궁(惠慶宮)의 『한중록(閑中錄)』 역시 양 극단의 설명을 오가고 있기 때문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정조는 현륭원(顯隆園) 「지문(誌文)」을 지어 임오화변을 종합적으로 설명하였지만, 이는 사도세자를 위한 사정(私情)에 치우쳐 서술되었다는 선입견 때문에 객관적 설명으로 인정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지문」은 그전까지 대립하고 있던 이설들을 궁중의 비사까지 두루 탐문하여 알고 있던 국왕 정조의 시각에서 종합한 것이므로, 결코 어느 일방에 치우친 저작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지문」의 시각에 따라 임오화변을 정리한다.[2]
  • 한편 1757년(영조 33)에 왕실 내에서 세자를 매우 아꼈던 조모 인원왕후(仁元王后)와 법모(法母)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연이어 사망하자, 세자는 이들의 상을 치르느라 건강이 손상되었을 뿐 아니라 왕실의 보호막이 사라짐에 따라 정치적으로도 매우 곤란에 빠졌다. 이 무렵 우물에 투신자살하는 소동을 벌인다든가 정신병 증세에 따라 심각한 과실을 저지르는 등 세자는 자질 면에서 심각한 결격 사유를 노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로는 궁중 내 무함 세력의 술책으로 인하여 세자영조를 알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는 등 부자간은 더욱 소원해졌고, 그 틈을 타 각종 무함이 난무하는 등 사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세자도 이제는 난국을 타개하기에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너무 많았고, ·소론 일부 대신들의 보호 노력만으로는 사태를 미봉하는 데에도 벅찬 상황이었다.[4]
  • 1761년(영조 37)에는 이천보(李天輔)·민백상(閔百祥)·이후(李 玉+厚) 등 보호론계 주요 대신마저 연이어 사망하였고, 세자는 평양까지 미행(微行)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중대 과실을 범하는 등 사태는 총체적 난국으로 치달았다. 영조는 이 모든 상황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결단의 방식을 궁리하였던 듯하다. 게다가 이제는 세자의 아들인 세손이 장성해 있었고, 1762년(영조 38)에는 혼례까지 무사히 마친 상태였다. 이해 5월에 홍계희의 겸종(傔從) 출신인 나경언(羅景彦)세자의 비행을 고발한 일을 계기로 하여, 결국에는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세자의 심각한 병증과 예측 불가능한 변란 위험을 실토하게 되었다. 그러자 영조는 결국 윤5월에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화변(禍變)의 방식으로 세자를 폐위하였다. 그 후에 영조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례를 직접 주관한 후, 그 아들인 세손에게 동궁(東宮)의 지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5]

임오화변의 의의

임오화변은 대리청정 중인 왕세자를 비상식적 방식으로 폐위한 사건이어서 당대에는 물론 오늘날까지 관심이 집중되었고, 이 사건을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새롭게 정파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더구나 정조임오화변에 대한 재평가를 탕평 정치의 핵심 과제로 삼기도 하였다. 임오화변영조대 후반부터 순조대에 이르기까지 주요 정치적 쟁점을 이해하는데 핵심이 되는 사건이었다.[6]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임오화변 사도세자 A는 B와 관련이 있다
임오화변 영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임오화변 노론 A는 B와 관련이 있다
임오화변 서론 A는 B와 관련이 있다
임오화변 문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임오화변 문성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임오화변 김상로 A는 B와 관련이 있다
임오화변 홍계희 A는 B와 관련이 있다
임오화변 나경언 A는 B와 관련이 있다
사도세자 이천보 A는 B와 관련이 있다
사도세자 민백상 A는 B와 관련이 있다
사도세자 이후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영조 영빈 이씨 A는 B의 남편이다
영조 사도세자 A는 B의 아버지다
영빈 이씨 사도세자 A는 B의 어머니다
사도세자 혜경궁 홍씨 A는 B의 남편이다
사도세자 정조 A는 B의 아버지다
혜경궁 홍씨 정조 A는 B의 어머니다
정조 지문 A는 B를 저술하였다
혜경궁 홍씨 한중록 A는 B를 저술하였다
지문 임오화변 A는 B를 언급하였다
한중록 임오화변 A는 B를 언급하였다
혜경궁 읍혈록 임오화변 A는 B를 언급하였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762년 윤5월 13일-윤5월 21일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주석

  1. 최성환, "임오화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최성환, "임오화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최성환, "임오화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최성환, "임오화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최성환, "임오화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최성환, "임오화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논문
    • 김영민, 「정조대 "임오화변" 논의의 전개와 사회적 반향」, 『朝鮮時代史學報』, Vol 40, 2007, 281-319쪽.
    • 김성윤, 「영조대 중반의 정국과 '임오화변' (임오화변(사도세자 폐사사건)의 발생원인에 대한 재검토를 중심으로)」, 『역사와 경계』, Vol 43, 2002, 57-94쪽.
    • 김문식,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문헌과 해석』, Vol 45, 2008, 49-63쪽.

유용한 정보

  • 최성환, "임오화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