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홍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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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21일 (월) 22:14 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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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척(洪陟)
BHST Monk1.png
대표명칭 홍척
한자 洪陟
생몰년 미상-미상
시호 증각(證覺)
홍직(洪直)
법호 난원(爛圓)
탑호 응료(凝寥)
이칭 실상화상(實相和尙), 남한조사(南韓祖師)
승탑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
승탑비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홍척(洪陟)은 실상산문(實相山門)의 개산조로, 당 나라에 가서 마조(馬祖)의 제자인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의 선법(禪法)을 전해 받고 826년(흥덕왕 1)에 귀국하여 지리산에 실상사(實相寺)를 창건하고 선풍(禪風)을 일으켰다.[1]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의 비문에서 "북산(北山)에는 도의(道義)요 남악에서는 홍척"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826년(흥덕왕 1)에 귀국한 홍척보다 5년 앞서 821년(헌덕왕 13)에 귀국한 도의는 설악산을 근거로 하여 신라의 북방에서 선법을 펴고 있었고, 홍척은 남쪽인 지리산에 자리잡고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2]

Quote-left.png 혹 중원에서 득도하고는 돌아오지 않거나, 혹 득법(得法)한 뒤 돌아왔는데, 거두(巨頭)가 된 사람을 손꼽아 셀 만하다. 중국에 귀화한 사람으로는 정중사(靜衆寺)의 무상(無相)과 상산(常山)의 혜각(慧覺)이니, 곧 선보(禪譜)에서 익주금(益州金) 진주금(鎭州金)이라 한 사람이며, 고국에 돌아온 사람은 앞에서 말한 북산(北山)의 도의(道義)와 남악(南岳)의 홍척(洪陟), 그리고 조금 내려와서 대안사(大安寺)의 혜철국사(慧徹國師), 혜목산(慧目山)의 현욱(玄昱), 지력문(智力聞), 쌍계사(雙溪寺)의 혜조(慧昭), 신흥언(新興彦), 통▨체(涌▨體), 진무휴(珍無休), 쌍봉사(雙峰寺)의 도윤(道允), 굴산사(崛山寺)의 범일(梵日), 양조국사(兩朝國師)인 성주사(聖住寺)의 무염(無染), 보리종(菩提宗) 등인데, 덕이 두터워 중생의 아버지가 되고, 도가 높아 왕자의 스승이 되었으니, 옛날에 이른바 “세상의 명예를 구하지 않아도 명예가 나를 따르며, 명성을 피해 달아나도 명성이 나를 좇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두들 교화가 중생세계에 미쳤고, 행적이 부도와 비석에 전하였으며, 좋은 형제에 많은 자손이 있어, 선정(禪定)의 숲으로 하여금 계림(鷄林)에서 빼어나도록 하고, 지혜의 물로 하여금 접수(鰈水)에서 순탄하게 흐르도록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11에 그의 법통을 이은 이로 흥덕대왕선강태자(宣康太子)가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왕족의 귀의를 받아 선풍을 크게 드날렸음을 알 수 있다. 문하에 수철(秀澈)이 있어 실상산문을 크게 일으켰다.[3]

시호는 증각(證覺), 탑명은 응료(凝寥)이다. 탑과 비는 실상사에 있으며, 각각 보물 제38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과 보물 제39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으로 지정되었다.[4]

시각자료

갤러리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각주

  1.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홍척",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 김영길, "홍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김영길, "홍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강정만, "홍척", 『디지털남원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