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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봉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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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봉암사
(聞慶 鳳巖寺)
대표명칭 문경 봉암사
영문명칭 Bongamsa Temple, Mungyeong
한자 聞慶 鳳巖寺
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건립시기 879년
창건자 도헌(道憲)
경내문화재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 문경 봉암사 일주문,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 문경 봉암사 극락전, 문경 봉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정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에 위치한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1]

내용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로 879년(신라 헌강왕 5) 지증(智證:智詵) 국사(國師) 도헌(道憲)이 창건하였으며 헌강왕이 봉암사라는 사찰명을 하사했다. 이후 봉암사는 퇴락하였다가 고려시대에 들어와 정진국사(靜眞國師) 긍양(兢讓)이 사찰을 중수하였고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파(曦陽山派)의 본거지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74년(현종 17) 신화(信和)가 중건하였다. 1915년 세욱(世煜)이 법당을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보물 제169호인 삼층석탑 ·보물 제137호인 지증대사 적조탑(寂照塔) ·보물 제138호인 지증대사 적조탑비 ·보물 제171호인 정진대사 원오탑 ·보물 제172호인 정진대사 원오탑비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참선승방으로, 사찰을 초파일에만 개방하고 있다. [두산]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宗刹)로서, 879년(헌강왕 5)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지선(智詵:智證國師)이 창건한 이래 현재까지 선도량(禪道場)으로 일관해 온 선찰(禪刹)이다.

창건 당시 지선은 희양산 중턱의 봉암용곡(鳳巖龍谷)에 선궁(禪宮)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전통적 선사상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지만, 선가(禪家)의 토착화를 위한 한 방편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881년 나라에서 봉암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기화(己和)가 1431년(세종 13)에 절을 중수한 뒤 오랫동안 머물면서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宜)』를 저술하였다. 그 뒤 1674년(현종 15) 화재로 소실된 뒤 신화(信和)가 중건하였고, 1703년(숙종 29) 불전과 승료가 불탔으나 바로 중건하였다. 1915년에는 세욱(世煜)이 다시 퇴락한 당우를 중건하였으며, 1927년 지증국사의 비각(碑閣)과 익랑(翼廊)을 세웠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신라 경순왕이 한때 피신한 것으로 전해지는 극락전이 있는데, 건물의 가구방법(架構方法)이 이채롭고 천장 꼭대기에 석탑 상륜부의 모양으로 보주(寶珠)를 얹고 있음이 특이하다. 그리고 사문(寺門)과 나란히 있는 요사채 이외에는 모두가 신축된 건물로서 절 중앙 상부에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오른쪽에는 규모가 큰 선원(禪院)이 있으며, 넓은 경내 도처에는 수채의 건물이 서 있으나 다른 절과는 달리 편액을 걸고 있지 않다.

이 절의 오른쪽에는 보물 제137호인 지선의 사리부도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과 보물 제138호인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가 있다. 그리고 절 앞 뜰에는 지선이 세운 것이라고 전해지는 보물 제169호의 봉암사3층석탑이 있는데, 기단구조에서 특이함을 보이며, 상륜부가 완존함으로써 주목되는 탑이다.

그 뒤 이 절은 935년(태조 18)에 정진대사(靜眞大師)가 중창하였는데 보물 제171호로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이 지정되어 있으며 보물 제172호로 봉암사정진대사탑비가 지정되어 있다. 정진국사탑비는 규모가 지증대사탑비와 같으며, 일주문을 100m 앞둔 곳에서 오른쪽으로 계곡을 건너가면 밭 가운데 있다.

희양산 산정에는 40m 정도의 벼랑을 이룬 암봉에 다섯 줄이 파여져 있는데 이것은 명나라의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의 흥기를 막기 위하여 칼로 혈도(穴道)를 끊은 것이라는 전설이 얽혀 있다. 또한 봉암사의 용바위에서는 가뭄이 계속될 때 기우제(祈雨祭)가 행하여졌는데, 특이한 것은 삶은 돼지머리로 지내지를 않고 산 돼지를 몰고 올라가서 바위 위에서 찔러 피를 흘리게 하여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용이 피 묻는 것이 싫어서 비를 내린다는 속신에서 유래한다.

이 밖에도 희양산에는 대궐터라고 불리우는 석성(石城)과 군창지(軍倉址)가 있고, 산록에는 홍문정(紅門亭)·배행정(拜行亭)·태평교(太平橋) 등 임금과 관련된 명칭을 가지는 곳이 많아 신라 후기의 난세 때에 경순왕의 행궁(行宮)이 있었던 곳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또한 봉암사 주변 계곡에는 기생이 세상을 비관하여 몸을 던졌다는 용연(龍淵)을 비롯하여 최치원(崔致遠)이 낚시를 즐겼다는 취적대(取適臺), 야유암(夜遊巖), 백송담(柏松潭), 백운대(白雲臺) 등의 소(沼)들이 있다.

또한 사찰에서 서쪽으로 300m 떨어진 계곡에 위치한 옥석대(玉石臺)는 암석에 조각된 불상 아래 넓게 깔린 암반에서 목탁소리가 난다는 명승지이다. 이 옥석대에는 바위의 북벽을 다듬고 7∼10㎝ 정도의 깊이로 감형(龕形)처럼 판 곳이 있는데, 그 안에 높이 약 6m의 좌상(坐像)이 양각되어 있다.

산내 부속암자로는 절 북쪽 중턱에 백련암(白蓮庵)이 있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1871년(고종 8)에 유겸(裕謙)이 중수하였다.[민백]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각자료

영상

주석

  1. 김위석, "봉암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