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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운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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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5월 19일 (금) 17:3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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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운문사
(淸道 雲門寺)
대표명칭 청도 운문사
한자 淸道 雲門寺
주소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
교구정보 대한불교조계종
건립시기 557년
경내문화재 청도 운문사 금당 앞 석등, 청도 운문사 동호,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청도 운문사 석조여래좌상, 청도 운문사 석조사천왕상, 청도 운문사 동서 삼층석탑,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 청도 운문사 비로자나삼신불회도,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 관음보살・달마대사 벽화, 청도 운문사 처진소나무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虎踞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1]


내용

역사

557년(진흥왕 18)에 한 신승(神僧)이 대작갑사(大鵲岬寺)[2] 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에 네 개의 작은 절(가슬갑사, 대비갑사, 천문갑사, 소보갑사)[3]을 창건하고 이를 오갑사(五岬寺)라 불렀는데 그 중 대작갑사가 지금의 운문사다.[4][5]

600년에는 원광국사가 절을 제 1차 중창하였고[6], 동쪽에 있는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귀산추항 등 두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전수하였다.[7][8] 930년에는 보양국사가 제 2차 중창하고 절 이름을 작갑사(鵲岬寺)라 하였다. 이후 보양의 계책에 힘입어 산적을 토벌고려 태조는 이에 보답하기 위해 973년, '운문선사'라는 사액을 내렸다.[9][10] 1105년에는 원응국사 학일(學一)이 제 3차 중창하였고 이후 제 2의 선종사찰이 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11][12] 1193년에는 운문사 일대를 중심으로 김사미난 등 농민항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1277년에는 일연이 5년간 주지로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집필을 시작했다.[13]

임진왜란 때는 건물들이 불에 타 소실되었는데, 1718년에 설송대사가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 1954년 이후에는 비구니 중심의 도량으로 변모하면서 비구니 전문 강원이 개설되었다.[14]

가람배치

운문사는 '연꽃의 화심'에 비유되기도 한다. 남쪽의 운문산, 북동쪽에 호거산, 서쪽의 억산과 장군봉, 그리고 여러 높고 낮은 봉우리가 돌아가며 절을 감싸안고 있기 때문이다. 운문사는 평평한 대지에 위치한 평지가람으로서 그 앉음새가 특이하다. 산을 등지고 앞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산을 바라보며 등을 내보이고 있다. 산세를 따르다 보면 모든 건물을 북향으로 앉혀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호거산은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운문사로 향하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로인해 발생할 수 있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기도 한다.[15][16]

특징

비구니 사찰

운문사는 '비구니 사관학교'라는 별칭이 있다. 운문사가 비구니들의 주석, 수행 사찰이 된 것은 1954년에 발발한 불교정화운동의 산물이었다. 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한 비구니들의 공로에 대한 인정하여 1955년 일단의 비구니들이 동화사에 입주하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본사급 사찰이면서, 대구불교의 중심이었던 동화사에 비구니들의 입주는 대구지역의 비구 및 신도들에게는 수용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결국 종단의 조치에 따라 동화사에 입주했던 비구니들은 운문사로 이전하였고 이로인해 운문사가 비구니 사찰로 전환된 것이다. 이후 1977년 주지로 취임한 명성은 1987년 운문승가학원을 승가대학으로 개칭, 1997년에는 비구니 강사를 배출하는 승가대학원을 개설하면서 운문사를 비구니 사찰로 일신하는 주역이 되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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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 비구니

운문사 비구니들이
모두 한 자리에 둘러 앉아
메주를 빚고 있다
입동 무렵
콩더미에선 더운 김이 피어오르고
비구니들은 그저
묵묵히 메주덩이만 빚는다
살아온 날들의 덧없었던 내용처럼
모두 똑같은 메주를
툇마루에 가즈런히 널어 말리는
어린 비구니
초겨울 운문사의 햇살은
그녀의 두 볼을 발그레 물들이고
서산 낙조로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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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동순,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


청도 운문사 처진소나무

만세루 옆에 서식하는 이 소나무는 천연기념물 180호로 지정되어있다. 수령이 500년에 이르며 주변의 인공적인 압력이 없이도 늘어져서 넓게 자란다.[18] 가지가 밑으로 자라기 때문에 많은 받침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19] 나무와 관련해서는 500여 년 전 한 고승이 시든 가지를 꺾어다 심었다는 유래와 임진왜란 당시 사찰건물이 불탔을 때 칡덩굴이 감싸 안아 화를 면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있다. 운문사에서는 매년 음력 3월 3일, 영양공급을 위해 12말의 막걸리를 뿌려주는 행사를 한다.[20]

이목소와 이무기

운문사 맞은편에는 이목소라는 조그만 웅덩이가 있는데, 이목소에는 한 가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21] 이목소에 살고 있는 이목은 서해 용왕의 아들이다. 이목은 보양을 도와 불법을 전파하고 가뭄이 든 마을에 비를 내려 사람들을 도왔다. 하지만 비를 내리게 한 것이 천제의 미움을 사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다행히 이목은 보양의 도움으로 위기를 면한다.[22]

김사미난

김사미난은 1193년(명종 23)에 청도·밀양 등 경상도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이다. 항쟁 초기 농민군을 이끌었던 김사미는 운문사에 있던 김씨 성을 쓰는 재가승(在家僧)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23][24]

운문의 김사미는 초전의 효심과 연합전선을 펴면서 10년이 넘도록 끈질기게 항쟁을 지속했지만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이 항쟁기간 동안 숱한 사찰들이 공격의 대상이었으며 운문사는 그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있었다. 농민항쟁 와중에 운문사에 전해지던 4비 가운데 토지와 노비를 절에 예속시키는 내용이 담긴 위답노비비(位畓奴婢碑)와 중창사액비(重創賜額碑)가 파괴되었다.[25]

옛문헌 속 운문사

보양이 작갑사를 창건하다

Quote-left.png 조사(祖師) 지식(知識)이 중국에서 법을 전해 받고 돌아오는데 서해 중간에 이르니 용이 맞이하여 용궁에 들여서 경전을 염송하게 하고 금라가사 1령을 베풀어주고 겸하여 아들 이목(璃目)을 시봉하여 쫒아가게 하면서 부탁하여 말하였다. “지금 삼국이 혼란하여 아직 불법에 귀의한 군주가 없었다. 만약 내 아들과 함께 본국에 돌아가서 작갑에 절을 세우고 거하면, 도적을 피할 수 있고 수년이 지나지 않아 또한 물리칠 수 있고, 반드시 불법을 지키는 어진 군주가 나와 삼국을 평정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서로 이별하고 돌아와서 이 골짜기에 이르니 홀연히 노승이 나타났는데 스스로를 원광이라 칭하였고, 인궤(印櫃) 품에 안고 있다가 꺼내주고 사라졌다.

이에 보양이 장차 폐사를 일으키려 북쪽 고개에 올라 바라보니 뜰에 5층의 황색 탑이 있었다. 내려와 그것을 찾으니 곧 흔적이 없었다. 다시 가서 바라보니 까치 무리가 땅을 쪼고 있으므로 이에 해룡이 한 작갑의 말을 기억하고는 그곳을 파보니 과연 남겨진 벽돌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있었고 그것을 모아 높게 쌓아 탑을 이루고 남긴 벽돌이 없었으니 이곳이 전시대의 가람터인 것을 알았다. 절을 창건하는 것을 마치고 주석하고 인하여 작갑사라 이름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삼국유사』 권 제4, 제 5의해,「보양이목」.[26]


보양이 태조를 도와 산적을 토벌하다

Quote-left.png 처음 법사가 당에 갔다 돌아와 먼저 추화군(推火郡) 봉성사(奉聖寺)에 머물렀다. 마침 태조가 동쪽을 정벌하여 청도(淸道)의 경계에 이르렀는데, 산적이 견성(犬城)에 모여 있었는데 교만하여 격살하지 못하였다. 태조가 산 아래에 이르러 법사에게 쉽게 제압하는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답하여 말하였다. “무릇 개의 본성은 밤의 일은 맡고 낮의 일은 맡지 않아서 앞을 지키고 그 뒤를 잊고 있으니 마땅히 낮에 그 북쪽을 쳐야 합니다.” 태조가 그를 따르니 과연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 신통한 지략을 가상히 여겨 해마다 가까운 현(縣)의 조(租) 50석을 지급하여서 향화(香火)를 이바지하게 했다. 이로써 절에 이성(二聖)의 진용(眞容)을 안치하였고 인하여 봉성사(奉聖寺)라 이름하였다. 후에 작갑사로 옮겨가서 절을 크게 세우고 죽었다. Quote-right.png
출처: 『삼국유사』 권 제4, 제 5의해,「보양이목」.[27]


보양이 이목을 구하다

Quote-left.png 이목(璃目)은 항상 절 옆의 작은 못에 있으며 남몰래 교화를 도왔고, 문득 어느 해에 가뭄이 들어 밭의 곡식이 말라 타들어가자 보양이 이목에게 비를 내리게 했더니 한 지역에서 족함을 고하였다. 천제(天帝)는 직무를 수행하지 못했다고 장차 주살하고자 하니 이목이 법사에게 위급함을 고하였다. 법사가 책상 아래에 숨겨주니 조금 뒤에 천사가 뜰에 와서 이목을 내어놓기를 청하였다. 법사가 뜰 앞의 배나무(이목(梨木))를 가리키자 이에 그것에 벼락을 치고 하늘로 올라갔다. 배나무가 꺾여 넘어졌는데 용이 그것을 쓰다듬자 곧 살아났다. Quote-right.png
출처: 『삼국유사』 권 제4, 제 5의해, 「보양이목」.[28]


남쪽 지방에 김사미 등 반적이 창궐하다

Quote-left.png 당시에 남쪽 지방에서 반란군[南賊]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극심한 것은 김사미(金沙彌)가 운문(雲門)을 근거지로, 효심(孝心)이 초전(草田)을 근거지로 삼아서 떠도는 자들을 불러 모아 주현(州縣)을 약탈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근심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고려사』 세가 권 제20, 명종 23년 7월.[29]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청도 운문사 금당 앞 석등 청도 운문사 A는 B에 있다
청도 운문사 동호 청도 운문사 A는 B에 있다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청도 운문사 A는 B에 있다
청도 운문사 석조여래좌상 청도 운문사 A는 B에 있다
청도 운문사 석조사천왕상 청도 운문사 A는 B에 있다
청도 운문사 동서 삼층석탑 청도 운문사 A는 B에 있다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 청도 운문사 A는 B에 있다
청도 운문사 비로자나삼신불회도 청도 운문사 A는 B에 있다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 관음보살・달마대사 벽화 청도 운문사 A는 B에 있다
청도 운문사 처진소나무 청도 운문사 A는 B에 있다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청도 운문사 A는 B를 위한 비이다
원광 청도 운문사 A는 B를 중창하였다 600년
보양 청도 운문사 A는 B를 중창하였다 930년
학일 청도 운문사 A는 B를 중창하였다 1105년
일연 청도 운문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1277년
연초 청도 운문사 A는 B를 중창하였다 1718년
고려 태조 청도 운문사 A는 B와 관련있다
화랑도 청도 운문사 A는 B와 관련있다
삼국유사 청도 운문사 A는 B와 관련있다
청도 운문사 대구 동화사 A는 B의 말사이다
김사미난 청도 운문사 A는 B와 관련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557년 한 신승이 대작갑사를 창건했다
600년 원광대작갑사를 중창하고 세속오계를 전수하였다
930년 보양대작갑사를 중창하고 이름을 작갑사라하였다
937년 고려 태조가 운문선사라는 사액을 내려서 작갑사운문사라 부르게 되었다
1105년 학일청도 운문사를 중창하였다
1277년 일연청도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었다
1277년 일연삼국유사 집필을 시작하였다
1718년 설송대사가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
1958년 청도 운문사가 비구니 전문 강원이 개설되었다
1997년 청도 운문사에 비구니 강사를 양성하는 전문 교육기관으로는 최초로 승가대학원이 개설되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가상 현실 - 전체 화면 보기

갤러리

영상

주석

  1. 김위석, "운문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작갑(鵲岬)이란 이름은 까치가 찾아준 벽돌로 탑을 조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순천,「청도 운문사의 나한신앙 고찰」, 『정토학연구』, 26집, 한국정토학회, 2016, 175쪽.
  3. 대비갑사는 지금의 대비사로 이어져 오고 있으며 나머지 3갑사는 모두 폐사되어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다. 「청도 운문사의 나한신앙 고찰」, 『정토학연구』, 26집, 한국정토학회, 2016, 175쪽.
  4. "청도 운문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5. 당시 대작갑사가 창건된 목적은 흉맥을 진압하기 위하였다고 한다. 사찰문화연구원, 『전통사찰총서 17』- 경북의 전통사찰 Ⅳ, 사찰문화연구원, 2001, 429쪽.
  6. 채헌(彩軒)이 쓴 「호거산운문사사적」에는 원광이 운문사의 첫번째 중창자로 등장하지만, 일연은 이를 부정하면서 김척명(金陟明)이라는 사람이 거리에 떠도는 얘기를 잘못 듣고 보양의 사적과 뒤섞어 기록하는 바람에 원광이 운문사가 연관 있는 것처럼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8 - 팔공산 자락』,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배게, 1997. 온라인 참조: "운문사", 답사여행의 길잡이8 - 팔공산 자락,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7. 일연, 『삼국유사』「원광서학」. 온라인 참조: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된 원광의 활동",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8. 이 당시 운문산 일대에 화랑수련장이 만들어 졌다. 그것은 곧 신라가 서남일대 낙동강 유역으로 국력을 신장해가는 과정으로써 운문사 일대가 병참기지로서 당시 신라로서는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운문사 소개", 『호거산 운문사』online, 대한불교조계종.
  9. 진관스님, "운문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0. 그 출처는 바로 중국의 운문스님이다. 「운문어록」이라는 책을 남긴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은 운문산에 오래 머물던 스님으로 선종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절 이름을 내려줄 당시 중국에서 크게 선풍을 날리고 있었기에 태조가 과감히 살아있는 스님의 법호를 쓴 것이다, "청도 운문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11. "청도 운문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12. 원응국사비에서는 "운문사 산문(山門)의 융성함이 근고이래(近古已來)로 이 같은 적이 없었다."고 평했다. 운문사원응국사비(雲門寺圓應國師碑)", 『한국 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13. 진관스님, "운문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4.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8 - 팔공산 자락』,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배게, 1997. 온라인 참조: "운문사", 답사여행의 길잡이8 - 팔공산 자락,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15.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8 - 팔공산 자락』,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배게, 1997. 온라인 참조: "운문사", 답사여행의 길잡이8 - 팔공산 자락,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16. "청도 운문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17. 김광식, 「운문사의 寺格과 明星의 불교 인문정신」,『정토학연구』, 26집, 한국정토학회, 2016.
  18. "운문사 소개", 『호거산 운문사』online, 대한불교조계종.
  19. 염우섭, "경북 청도 운문사 처진 소나무, 『진주성지킴이회』online, 2008년 7월 23일.
  20. 배상원, 민숙, 「운문사(雲門寺) 처진 소나무」, 『숲과 문화』, 제15권 2호, 2006.
  21. 청도군에서 1981년에 발간한 『내 고장 전통문화』에 「이무기」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고, 1991년에 청도군에서 발간한 『청도 군지』에는 「이목소와 이무기」로 수록되어 있다, 박유미, "이목소와 이무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2. 박유미, "이목소와 이무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3. 유홍준, 「청도 운문사(하): 연꽃이 피거든 남매지로 오시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2』, 월간 사회평론 길, Vol.93 No.12, 1993, 163쪽.
  24. 이를통해 사원 내부의 상층세력과는 흐름을 달리하는 하부승려나 재가승들이 사원에 예속되어 수탈당하던 농민들과 합세하여 항쟁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해볼 수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8 - 팔공산 자락』,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배게, 1997. 온라인 참조: "운문사", 답사여행의 길잡이8 - 팔공산 자락,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5.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8 - 팔공산 자락』,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배게, 1997. 온라인 참조: "운문사", 답사여행의 길잡이8 - 팔공산 자락,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6. "보양이 작갑사를 창건하다", 『삼국유사』 권 제4, 제 5의해,「보양이목」,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7. "보양이 태조를 도와 산적을 토벌하다",『삼국유사』 권 제4, 제 5의해, 「보양이목」,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8. "보양이 이목을 구하다", 『삼국유사』 권 제4, 제 5의해, 「보양이목」,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9. "남쪽 지방에 김사미 등 반적이 창궐하다", 『고려사』 세가 권 제20, 명종 23년 7월,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 곽승훈, 「고려시대 운문사 창건연기와 변천과 역사적 의의」,『한국사학보』, 제 30권, 한국사학사학회, 2014.
  • 김광식, 「운문사의 寺格과 明星의 불교 인문정신」,『정토학연구』, 26집, 한국정토학회, 2016.
  • 박순천,「청도 운문사의 나한신앙 고찰」,『정토학연구』, 26집, 한국정토학회, 2016.
  • 배상원, 민숙, 「운문사(雲門寺) 처진 소나무」, 『숲과 문화』, 제15권 2호, 숲과문화연구회, 2006.
  • 사찰문화연구원, 『전통사찰총서 17』- 경북의 전통사찰 Ⅳ, 사찰문화연구원, 2001.
  • 안병우, 「운문사와 김사미란」, 『한국역사연구회회보』, 제2호, 한국역사연구회, 1989.
  • 유홍준, 「청도 운문사(상): 저 푸른 소나무에 박힌 상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0』, 월간 사회평론 길, Vol.93 No.9, 1993.
  • 유홍준, 「청도 운문사: 새벽 예불과 운문사 사적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1』, 월간 사회평론 길, Vol.93 No.10, 1993.
  • 유홍준, 「청도 운문사(하): 연꽃이 피거든 남매지로 오시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2』, 월간 사회평론 길, Vol.93 No.12, 1993.
  • 천혜숙, 「운문사 주변 '이무기' 전승의 실제와 지역사적 맥락」, 『실천민속학연구』, 제29호, 실천민속학회, 2017.
  • 김위석, "운문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염우섭, "경북 청도 운문사 처진 소나무, 『진주성지킴이회』online, 2008년 7월 23일.
  • 진관스님, "운문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8 - 팔공산 자락』,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배게, 1997. 온라인 참조: "운문사", 답사여행의 길잡이8 - 팔공산 자락,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청도 운문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 "운문사원응국사비(雲門寺圓應國師碑)", 『한국 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운문사 소개", 『호거산 운문사』online, 대한불교조계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