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철
수철(秀澈)() | |
대표명칭 | 수철(秀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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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 817년(헌덕왕 9)-893년(진성여왕 7) |
시호 | 수철(秀澈) |
탑호 | 능가보월(楞加寶月) |
성씨 | 김씨(金氏) |
승탑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 |
승탑비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碑) |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생애
가계와 탄생
수철(秀澈)은 815년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가 소판(蘇判)[1]을 지낸 진골(眞骨) 가문이었으나, 조부와 부친에 이르러서는 중앙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수철(秀澈)은 어릴 때 부모를 모두 여의었으며, 이로 인하여 일찍이 출가를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출가수행
수철(秀澈)은 15세경에 연허(緣虛) 율사에게 출가하고[2], 천종(天縱) 대덕에게 수학하였다. 이후 동원경(東原京) 복천사(福泉寺)에서 윤법(潤法) 대덕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나이 십오세 남짓에 불법을 배우고자 뜻을 두어 緣虛율사에게서 머리를 깎고 天宗대덕에게서 경전을 배우셨다. 얼마 있다가 …… 東原京 福泉寺에 가서 潤法대덕에게서 具足戒를 받으셨다. | ||
출처: 정병삼, "심원사 수철화상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제3책,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
활동
수철은 실상산문을 개창한 승려인 홍척(洪陟)의 제자가 되었다. 수철이 처음으로 홍척을 만난 장소에 대해서는 비문에 나타난 "실상선정(實相禪庭)"의 해석에 따라 실상사로 보는 견해와 강원도 설악산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실상선정"을 실상사라는 공간으로 해석하면 수철은 실상사에서 홍척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고[3], "실상선정"을 "실상선정국사"라는 홍척의 호칭으로 해석하면 수철은 설악산에서 홍척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4] 한편 홍척의 제자로서 수철의 행적은 당시의 왕이 홍척을 초청하자 홍척을 수행하여 함께 경주에 갔었다라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왕이 홍척을 초청하자 수철은 홍척을 수행하여 함께 경주에 간다.
수철은 명산 승지를 순례하였다.
이미 이치를 풀어냈으니 거처에 걸림이 있겠는가. 이로부터 名山 勝地의 탑에 예배하러 돌아다니시니 …… 參禪에서 꽃술을 드날리고 華嚴에서 향기를 모으셨다. | ||
출처: 정병삼, "심원사 수철화상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제3책,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
수철은 지리산 지실사를 창건하고 가르침을 펼쳤다.
수철은 서울에 가서 팔각당에서 경문왕의 교와 선의 같고 다름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하였다.
수철은 헌강왕과도 교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太傅를 추증받은 憲康大王께서 왕위를 이어 자주 서신을 보내시므로 거동을 옮겨 ……. | ||
출처: 정병삼, "심원사 수철화상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제3책,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
수철은 혜위법사와 천○법대덕 등의 승려들과 교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철은 진성왕과도 교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眞聖王께서 定康王이 나라를 다스림에 힘들어 하다가 돌아가자 이에 앞의 허물을 따라 …… 어찌 누추한 곳이라 하겠는가. 본래 …… 물들지 않음을 얻어 그윽한 도리가 끝까지 맑고 한가하니 일평생의 큰 인연이 임금의 스승이 되는데 한점의 흠도 없었다. | ||
출처: 정병삼, "심원사 수철화상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제3책,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
입적
관련항목
주석
- ↑ 신라시대의 관등. 17등 관계 중의 제3등 관계로, 진골만이 받을 수 있는 관등이었으며 공복(公服)의 빛깔은 자색(紫色)이었다. "잡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 비문에서는 이 시기를 지학(志學)이라고 표현하였다.("年餘志學學佛是圖落采於緣虛律師") 따라서 수철은 대략 829년 경에 출가한 것으로 보인다.
- ↑ 정병삼, "심원사 수철화상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제3책,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 ↑ 추만호, 「심원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의 금석학적 분석」, 『역사민속학』제1책, 한국역사민속학회, 1991, 2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