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섭-정약용과 저술
정약용과 저술 | |
작가 | 정창섭 |
---|---|
제작연도 | 1979년 |
규격 | 300호(197x290.9cm) |
유형 | 학술 |
분류 | 유화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목차
정의
정약용이 다산초당 앞뜰에 서서 사색하는 모습을 담은 정창섭 화백의 민족기록화.
신유박해로 인해 전남 강진에 유배된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1808년에서 1818년간 머물며 머물며 제자들과 함께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권의 저서를 저술하였다.
설명
작품 소재
작품의 소재는 정약용으로, 해당 작품에서 다산초당 왼쪽에 서있는 ⑤ 다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다산은 1808년에서 1818년까지 이곳에서 양반 18명, 중인 6명의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닦고 500권의 저술활동을 하였다.
작품 배경
작품의 배경은 ⑤ 다산초당으로, 다산(茶山)은 초당이 있는 뒷산을 지칭하며 차나무가 많이 자생하였다고 한다.
해당 작품에서 다산초당은 기와집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다산이 거처했던 1808년~1818년에는 작은 초가집이었다고 한다.
1936년에 완전히 해체돼 폐허가 된 다산초당은,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가 출범하면서 해남 윤씨와 강진 관내 유지들의 성금으로 지금의 기와집으로 새롭게 지어졌다.
다산초당이 있던 곳에 세워진 기와집은 5칸 도리단층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초당뒤 석벽에는 다산이 직접 새긴 글씨인 정석(丁石)이 있고, 뒷담 밑에는 마르지 않는 샘물인 약천(藥泉)이 있으며, 다산초당 바로 앞에는 약천의 샘물로 앞 뜰에서 차를 달이던 바위인 ④ 다조(茶竈), 초당 동쪽 연못에 탐진강에서 가져온 돌로 가산을 쌓은 ⑧⑨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 위치해 있는데, 이 네 곳을 일컬어 다산사경(茶山四景)이라 한다.[1]
해당 작품에서는 오른편에 그려진 연지석가산과, 다산초당 앞에 그려진 다조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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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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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섭-정약용과 저술 | 정창섭 | A는 B가 그렸다 | A dcterms:creator B |
정창섭-정약용과 저술 | 정약용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A ekc:depicts B |
정창섭-정약용과 저술 | 다산초당 |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 A ekc:depicts B |
정창섭-정약용과 저술 | 인천시립박물관 | A는 B에 대여되었다 | A ekc:hasExhibitionAt B |
정창섭-정약용과 저술 | 한국학중앙연구원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979년 | 정창섭이 정창섭-정약용과 저술을 제작하였다. |
1991년 4월 18일-1992년 4월 17일 | 인천시립박물관이 정창섭-정약용과 저술을 대여하였다. |
1998년 12월 30일-현재 |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정창섭-정약용과 저술을 소장하고 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4205792 | 126.6512053 | 인천시립박물관이 정창섭-정약용과 저술을 대여하였다 |
37.3915557 | 127.0547403 |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정창섭-정약용과 저술을 소장하였다 |
34.579066 | 126.746974 | 다산초당은 정창섭-정약용과 저술의 배경이다 |
관련 민족기록화
1539-1615년 박득순-허준과 동의보감
?-1866년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주희춘, <광복70주년 기획시리즈> 우리 강진은 이렇게 살았다 15.50년대말 강진의 경제와 문화", 『강진일보』, 2015년 07월 09일.
- ↑ 민족기록화팀(2017년 4월 26일 촬영)
- ↑ 민족기록화팀(2017년 4월 26일 촬영)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단행본
- 정민, 『삶을 바꾼 만남(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2011년.
- 웹 자원
더 읽을거리
- 단행본
- 정민,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글항아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