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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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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유(璨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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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찬유
한자 璨幽
생몰년 869년(경문왕 9)-958년(광종 9)
시호 원종(元宗)
탑호 혜진(慧眞)
도광(道光)
성씨 김씨(金氏)
출신지 경상남도 하동
승탑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
승탑비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정의

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璨幽)는 869년(경문왕 9) 계림(鷄林) 하남(河南: 현재의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金氏)이다. 아버지의 휘는 용(容)인데, 장사현(長沙縣: 현재의 전북 고창)의 현령(縣令)을 지냈다고 한다.

Quote-left.png 대사(大師)의 존칭(尊稱)은 찬유(璨幽)요 자(字)는 도광(道光)이며 속성(俗姓)은 김씨(金氏)로서 계림 하남(河南) 사람이다. 자자손손 드러난 족속이요, 대대로 유명한 가문인데, 조상을 드높이는 깨끗한 규범과 종족을 공경하는 꽃다운 자취는 삭제하여 기록하지 않겠으니, 이는 불문(佛門)의 종지를 따르는 것이다.

아버지의 휘는 용(容)인데, 흰 무지개의 빼어난 기운과 단혈의 기이한 자태로 저녁 노을의 남은 빛을 머금고 새벽종의 청아한 소리를 진동시키는 듯하였다. 마침내 가문을 일으켜 창부낭중이 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나가 장사현령이 되었다. 백 리 고을에서는 봄에 순행하는 교화로 꽃 고을에서 더욱 향기로웠으며, 구중궁궐에서는 해를 향한 마음으로 해바라기 동산에서 두드러지게 아름다웠으니, 조야가 따라서 의지하고 백성들이 우러러 의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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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40-41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탄생설화

어머니 이씨(李氏)는 꿈에서 신인(神人)을 만나고 대사를 잉태하였다.

Quote-left.png 어머니 이씨는 아내로서의 덕을 잘 닦고 어머니로서의 자세를 풍성히 지녔는데, 꿈에 한 신인이 있어 고하기를, "어머니의 아들이 되고 부처님의 자손이 되는 까닭에 묘한 인연에 의탁하여 삼가 자비로운 교화를 펴고자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특별한 꿈을 꾸었다고 여겼는데, 인하여 잉태를 하였다. 행동거지를 삼가고 태교를 받들어 행하였다. 함통(咸通; 唐 懿宗의 연호) 12년(869, 경문왕 9) 세차 기축년 4월 4일에 태어났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41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출가수행

찬유는 13세에 상주(尙州) 삼랑사(三郞寺) 융제(融諦)에게 출가하고, 융제의 지시에 따라 여주 혜목산(慧目山) 고달사(高達寺)에 가서 심희(審希)를 스승으로 모셨다.[1] 890년(진성여왕 4) 22세에는 양주(楊州)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Quote-left.png 나이 겨우 13세 때 아버지께 말씀드리기를,

"비록 지혜의 가지는 모자라지만 깨달음의 나무가 되고자 합니다."

"내 비록 보는 눈은 없으나 일찍이 너의 선근(善根)을 보았다. 너는 의당 부지런히 배양하여 좋은 과보를 닦도록 하여라."

대사는 다행히 소원대로 아버지의 승낙을 얻어 곧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상주 공산 삼랑사의 융체선사(融諦禪師)가 도를 강론함이 깊고 사람을 교화함이 밝다는 소식을 삼가 듣고 그의 제자가 될 생각으로 멀리 선사를 찾아갔다 선사가 말하였다.

"이리 오너라 오늘 너의 오는 모습을 보니 장차 훌륭한 사람을 만난 것을 알겠다. 우리 종의 선화상(禪和尙)은 법호가 심희(審希)인데 진짜 한 부처가 세상에 출현하여 동국을 교화한 주인이시다. 지금 혜목산(慧目山)에 계시니 너는 마땅히 찾아가서 그 분을 스승으로 섬겨라"

대사는 '나의 스승임에 틀림없으니 나의 소원을 이루었다. 지체 말고 가는 것이 좋겠다.'라 생각하고, 곧 혜목산을 찾아가 정성껏 섬기면서 도를 배우는 마음을 더 닦고 선을 익히는 뜻을 한층 가다듬었다. 얼마 되지 않아 묘리를 정밀히 탐구하고 현기(玄機)를 높이 깨달았으며, 깨달음의 길을 걸어 관통하였으면서도 계율을 준수하고 벗어나지 않았다.

22세 때 양주(楊州) 삼각산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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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41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구법유학

찬유의 스승인 심희는 888년부터 송계산(松溪山)에 머물면서 좌선에 몰두하였는데[2], 찬유는 스승을 따라 광주 송계선원(松溪禪院)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찬유는 심희에게 구법 유학의 뜻을 밝혔고, 마침내 892년(진성여왕 6) 중국으로 들어가는 상선(商船)을 타고 입당(入唐)하였다.

Quote-left.png 때마침 대사의 스승이 광주(光州) 송계선원(松溪禪院)으로 옮겨가 있었는데, 대사는 멀리 행장을 꾸려 특별히 송계로 찾아가 예족(禮足)의 정성을 표하고 스승의 가르침의 은혜에 감사하였다. 스승이 말하였다.

"흰구름은 천 리 만 리 깔려 있어도 모두가 같은 구름이고, 밝은 달은 앞시내와 뒷시내에 비춰도 일찍이 다른 날이 아니다. 그래서 정신과 정신에 따르고 마음과 마음에 있을 뿐이다."

대사는 '무릇 도에 뜻을 둔 사람에게 어찌 일정한 스승이 있겠는가'하는 생각에, 멀리 유학하여 두루 관람하겠다는 뜻을 아뢰었다. 스승이 이르기를 타인의 마음은 멈출 수 없고 빠른 발은 머무르기 어렵다고들 하는데, 너에게서 그것을 징험한다."라 하고. 웃으면서 떠나는 것을 허락하였다. 대사는 길이 멀다고들 하지만 걸어가면 곧 닿는다는 생각에, 마침내 산을 나와 바닷가로 가서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갈 기회를 살렸다.

드디어 경복(景福; 唐 昭宗의 연호) 원년(892, 진성왕 6) 봄에 때마침 중국으로 들어가는 상선을 만나 그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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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41-42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서주(舒州) 동성현(桐城懸)의 적주산(寂住山)으로 간 찬유는 석두희천(石頭希遷)의 문하인 투자대동(投子大同, 819-914)의 선법(禪法)을 전해 받고,[3] 고승과 명승을 찾아 유람한 뒤 921년(경명왕 5)에 강주(康州) 덕안포(德安浦)로 귀국하였다.

Quote-left.png 경복(景福; 唐 昭宗의 연호) 원년(892, 진성왕 6) 봄에 때마침 중국으로 들어가는 상선을 만나 그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갔다. 그리하여 정처 없이 운수를 바라보고 마음을 맡기며 저녁 노을을 향하여 발길을 내디뎠는데, 참 스님은 반드시 찾아보고 옛 자취는 반드시 답사하였다. 드디어 서주(舒州) 동성현(桐城懸; 지금의 安徽省 桐城) 적주산(寂住山)으로 가서 투자선화상(投子禪和尙)을 예방하였다. 화상은 법호가 대동(大同)으로 석두산(石頭山)의 법손인 취미무학대사(翠微無學大師)의 정통이었다. 대사의 특이한 눈 모습과 남다른 옥호의 상을 보고 말하기를, "불법이 동으로 흘러간다는 말과 서쪽의 학문을 구하려는 자가 있기는 하지만, 함께 도를 말할 만한 사람은 오직 그대뿐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이리하여 혀 밑에서 미묘한 말을 깨닫고 몸 가운데서 진짜 부처를 체득하였으니, 어찌 부처의 밀전(密傳)을 계승하고 유마(維摩)의 묵대(黙對)를 받드는 것에 그칠 뿐이겠는가 대사가 장차 투자화상을 하직하려 하니, 화상이 일렀다.

"멀리 가지도 말고 가까이 가지도 말라"

"비록 멀거나 가까이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한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마음으로 전한 것을 알았는데 눈으로 말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 후 널리 뛰어난 벗을 찾고 두루 고명한 스승을 예방하여 혹은 천태(天台)에서 숨은 것을 찾고, 혹은 강좌(江左)에서 현묘한 것을 더듬음으로써, 진여(眞如)의 성해(性海)에 들고 들어가서 마니의 보주를 얻었다.

이에 붕새는 반드시 천지에서 변하고 학은 요해에 돌아가기 마련이라고 생각하여, 애초부터 끝까지 돌아갈 것을 잊지 않다가, 때마침 귀국하는 본국의 배를 만나 동쪽으로 노질하여, 정명(貞明;後梁 末帝의 연호) 7년(921, 경명왕 5) 가을 7월 강주 덕안포(德安浦)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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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42-43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활동

찬유는 921년(경명왕 5) 귀국하여 봉림사심희를 찾아갔다. 심희는 찬유에게 삼랑사(三郞寺)에 머물 것을 명하였고, 찬유는 3년 동안 삼랑사에 주석하였다.[4]

Quote-left.png 정명(貞明;後梁 末帝의 연호) 7년(921, 경명왕 5) 가을 7월 강주 덕안포(德安浦)에 닿았다.

곧장 봉림(鳳林)으로 가서 진경대사(眞鏡大師)를 찾아뵈었다. 스승이 말하기를, "오늘에 와서 서로 만나다니 너무도 기쁘다."라고 하였다. 따로 선당(禪堂)을 꾸며 설법하는 자리에 오르게 하고, 서쪽에서 탐방한 진법(眞法)을 듣고 동국으로 돌아온 묘한 인연을 경하한 다음, 조용히 이르기를, "사람은 노소가 있으나 법에는 선후가 없다. 너는 여래의 밀인(密印)을 차고 가섭의 비종(秘宗)을 깨쳤으니, 마땅히 삼랑사(三郞寺)에 머물러 선백(禪伯)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그 뜻을 받들어 그 곳에 머물렀다.

겨울을 세 번 보낸 뒤에 생각하기를, '이 절은 진실로 도를 즐길 만한 청아한 집이며 선에 안주할 만한 좋은 장소이나, 새도 나무를 가려서 깃드는데 나라고 어찌 무익하게 한 곳에 얽매어 있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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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43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찬유는 삼랑사에 주석하다가, 고려 건국 후 태조의 명에 따라 광주(廣州) 천왕사(天王寺)의 주지가 되었다.[5]

Quote-left.png 삼가 듣자하니, 우리 태조 신성대왕(神聖大王; 고려 태조 王建)이 꿈에 북두성을 품에 안아 천운에 부응하고 순임금처럼 포(褒)자를 손안에 쥐어 왕통을 열므로써, 하(夏)나라를 고쳐 하늘이 돌보는 명을 받고 주(周)나라를 이어 해가 뜨는 나라를 일으켰다고들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조각달이 허공에 떠가듯 외로운 구름이 산봉우리에 나오듯 마음이 움직였다. 저 창룡(蒼龍)이 물결을 헤쳐 나갈 때는 본디 뗏목에 의지할 마음이 없으나, 단봉(丹鳳)이 허공을 날 때는 오히려 오동나무에도 깃들 뜻이 있는 법이므로, 멀리 명아주 지팡이를 들고 곧장 개성으로 가서 마침내 태조대왕을 배알하였다.

대왕은 대사가 현도(玄道)를 원만히 행하고 법신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하여, 광주(廣州) 천왕사(天王寺)에 머물기를 청하므로 그 곳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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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43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이후 찬유는 혜목산(慧目山)으로 이주하였으며, 그 곳에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대선림(大禪林)을 이룩하였다.[6] 이때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정종은 찬유에게 가사(袈裟)와 법의(法衣)를 하사하는 등 예로써 대우하였다.

Quote-left.png 혜목산은 노을진 뫼가 강연하는 자리에 너무도 적절하고 구름 낀 계곡이 선승의 거처로서는 매우 흡족하기 때문에, 그 곳으로 옮겨 머물렀다. 그러자 먼 사방에서 나루를 묻는 자들이 천 리 길을 반걸음으로 보았으며 구름처럼 몰려오는 자들을 바다처럼 받아들이니, 선의 길로 그리워하며 몰려들고 그윽한 문으로 왕성히 출입하지 않음이 없었다. 태조는 마침 그 무렵 인연을 표시하고자 하납의(霞衲衣)와 좌구(座具)를 보냈다. 얼마 안되어 태조가 기(杞)나라의 하늘이 무너지듯 우천(虞泉)으로 해가 지듯이 붕어하자, 애초의 아름다운 인연을 좋게 생각하여 마지막을 장식하는 저승길을 인도하였다.

혜종대왕(惠宗大王)이 왕위에 올라 공손한 마음으로 조상을 받들고 효성을 펴며, 어진 정사를 일으켜 풍속을 교화하고 부처를 높이고 승려를 존대하여, 대사에게 향기 고운 차와 비단 법의로 선물하였다. 대사는 불심으로 마음을 열어 주고 신통력을 베풀었다. 3년이 지나(945년 9월) 혜종이 승하하고 정종대왕(定宗大王)이 왕통을 이어받아 진풍(眞風)을 존경하여, 운납가사(雲衲袈裟)와 마납법의(磨衲法衣)를 보냈다. 대사는 정종이 불사를 일으킨 것을 매우 기뻐하였는데, 어찌 정종이 갑자기 대궐을 떠나가시고 문득 인간세상을 하직할 줄이야 알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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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43-44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광종은 찬유를 왕사(王師)로 책봉하고 '증진대사(證眞大師)'라는 호를 내렸다. 또한 광종은 찬유를 개경 사나원(舍那院)에 머무르게 한 뒤 3일 만에 중광전(重光殿)에서 설법하게 하고 국사(國師)로 삼았으며, 은병·은향로·수정염주·법의 등을 내렸다.[7]

Quote-left.png 임금께서는 믿어 향하는 마음이 깊고 공경하여 받드는 뜻이 지극하여, 마침내 대사를 받들어 증진대사(證眞大師)라 호를 내렸다. 이어 도인과 속인의 두 사자를 보내어 조서를 내리고 궁궐로 불렀다. 대사는 '도가 행하여지려고 하는데 이 때를 놓칠 수 없다. 석가모니의 부촉을 생각하여 나는 가야겠다.'하고 마침내 호계를 나와 대궐로 나아갔다. 이리하여 눈썹이 하얀 장로의 깨끗한 무리와 조정 신하의 뭇 영웅들이 법안(法眼)을 바라보느라 함께 모이고 자안(慈顔)을 대하여 에워싸고 우러르면서, 왕성(王城) 사나원(舍那院)으로 보내 주었다. 다음날 임금은 사나원에 거동하여 사례하기를, "제자가 동쪽 숲을 바라보며 목을 늘이고 남쪽 시내를 향하여 마음을 기울였는데, 스님께서는 근기(根機)를 따르기를 골짜기를 스치는 폭풍 소리와 같고 느낌에 부응하기는 못에 비친 달 그림자와 같습니다. 귀의하는 마음 다시 간절하고 배우고 싶은 소원은 더욱 깊습니다."라고 하였다. 3일 후 중광전(重光殿)에서 법연을 열었는데 금란자락을 끌고 자전(紫殿)에 오르니, 임금은 대사의 도톰한 입술을 보고 선에 들어 기뻐하고 둥글고 맑은 눈을 받들기를 정성껏 하였다. 온 세계를 위하여 자리를 피하는 예우를 바치고 온 나라를 위하여 말씀을 띠에다 쓰는 뜻을 베풂으로써, 삼귀(三歸)를 더욱 힘쓰고 십선(十善)을 더욱 닦았다. 그리하여 겨자씨로 채운 성 안이 비워지고 옷자락으로 간 돌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계속한다면, 반드시 성인을 알현할 좋은 인연이 쉬지 않고 스승을 위하는 아름다운 도가 끝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 자리에서 면복을 내려 국사로 받들어 모시면서 삼가 향화(香火)의 인연을 맺고 정성껏 사자(師資)의 예를 맺었으며, 이어 답납가사(踏衲袈裟)·마납오·좌구(座具)·은병·은향로·금테두리를 한 바리때·수정염주 등을 바쳤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44-4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찬유는 노쇠함을 이유로 하직하여 운산(雲山)에 머물렀다. 광종은 이를 매우 아쉬워하였으며, 사자를 통해 자주 편지나 송덕시(頌德詩)를 지어 보냈다.

Quote-left.png 대사가 임금에게 말하기를, "노승이 나아가 죽을 때에 임박하여 치아가 냇버들처럼 시들었으니, 단지 송문(松門)으로 돌아가서 발을 쉬며 대궐 쪽으로 마음을 보내기를 원할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비록 대사의 얼굴이 그립지만 그 뜻에 따라 수레를 바라보며 눈으로 전송하고 사찰을 향하여 마음을 기울였다. 그 후로도 사자를 보내어 정을 전하고 편지를 띄워 정성을 쏟았다. 그러면서 송덕시를 지어 바쳤다.

지혜의 해가 높이 걸려 바다 고을에 빛나고,

진신(眞身)은 고요히 화광(和光)을 드러낸다.

패엽 속에서 법을 베풀어 미혹된 길을 열고,

바리때 안에 연꽃이 피어 선정(禪定)의 도량에 든다.

한 마디 외침이 소리가 되어 안개를 깨끗이 걷고,

두 문이 상(相)을 떠나 티끌을 벗어나 청량하다.

현관(玄關)은 멀리 산천 밖에 떨어져 있고,

파도처럼 달려가 스님을 뵙지 못함을 한하네

이어 오정(烏程) 지방에서 나는 향기로운 차와 단요(丹徼) 지방에서 나는 유명한 향을 선물하면서, 믿는 마음을 표하고 멀리 법력을 빌었다. 대사는 임금을 하직하고 나서 구름 낀 산으로 돌아와 보니, 연라(烟蘿)는 노닐기에 적합하고 수석(水石)은 돌을 베개 삼고 시냇물에 양치질하기에 퍽이나 좋아, 마음에 한없이 애착이 가 그 곳에서 여생을 마칠 생각을 가졌다. 그리하여 중생들이 바람처럼 달려오고 배우려는 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대사는 색(色)과 공(空)을 다 멸하고 정(定)과 혜(慧)를 원만히 갖추어, 산 속에서 지극한 도를 행하고 우주 안에서 심오한 공덕을 베풀었으니, 부처가 도를 깨치면 신통력으로 세상을 교화한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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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46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입적

찬유는 958년(광종 9) 혜목산에서 나이 90세, 법랍 69세로 입적하였다.

Quote-left.png 현덕(顯德;後周 世宗의 연호) 5년(958, 광종 9) 세차 무오년 가을 8월 20일에 대사는 입적하고자 목욕을 마치고 방 앞에서 문생들에 명하여 모두 뜰 안으로 모이게 하고는 유훈을 하기를, "만법(萬法)은 다 공(空)한 것이라, 나 이제 떠나가련다. 한 마음(一心)은 곧 근본이니 너희는 힘쓰도록 하라 마음이 생기면 법도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법도 사라진다. 인자한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이니, 어찌 종자가 따로 있겠는가 여래의 올바른 계를 보전하고 힘쓸지어다."라고 하고는 말을 마친 다음, 방안으로 들어가 단정히 가부좌하고서 고달원 선당에서 입멸하였다.

아, 동방에 몸을 드러낸 지 90년, 승복을 입은 지 69년이었다. 호계의 물소리는 목이 메이고 곡수의 나무 빛은 근심을 머금었다. 문생은 의지할 데가 없어진 슬픔을 품고 불문(佛門)에서는 철인(哲人)이 사라진 탄식을 하였다. 불문과 세속의 사녀(士女)는 땅을 치고 발을 구르며 통곡하니 소리가 산골짜기를 울렸다. 다음날 신좌(神座)를 혜목산 감실로 받들어 옮겼는데, 얼굴빛을 보니 살아 계실 때와 같아 임시로 돌문으로 닫아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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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46-47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광종은 시호를 '원종대사(元宗大師)'라 추증하고, 탑호를 '혜진(慧眞)'이라 하였으며, 대사의 진영 1위를 조성하도록 하였다. 사리탑은 혜목산(慧目山) 서북쪽 산기슭에 조성되었다. 흔홍(昕弘) 등 찬유의 제자들이 탑비의 건립을 청하자, 광종김정언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고, 975년(광종 26) 탑비가 건립되었다.

Quote-left.png 임금은 대사가 입적하였다는 말을 듣고 선월(禪月)이 빨리 사라지고 각화(覺花)가 먼저 진 것을 슬퍼하여, 사자를 보내어 곡서(鵠書)로 조문하였다. 시호를 원종대사(元宗大師)라 추증하고 탑호를 혜진(慧眞)이라 하였으며, 영정 한 벌을 삼가 만들었다. 이어 국공(國工)에게 돌을 다듬어 여러 층으로 된 사리탑을 만들게 하였다. 문인들은 소리쳐 울며 시신을 받들어 혜목산 서북 언저리에 탑을 세우니 불법에 따른 것이다.

대사는 마음의 등은 활활 불탔고 선정의 물은 파랑이 없었다. 지혜는 바다처럼 깊고 자비는 구름처럼 덮었다. 부처를 배우고 선을 깨치는 덕이 행하여졌고 마귀를 굽히고 세속을 진압하는 위력이 날카로웠다. 서쪽으로는 찬란한 공적을 드러내고 동쪽으로는 드높은 법을 펴서, 마침내 반도(盤桃)의 색깔이 윤택해지고 약목(若木)이 빛나게 하였으니, 그 성스런 공은 지혜로도 알 수 없고 그 신묘한 교화는 알음알이로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오히려 법신(法身)은 모습이 없는 것이 반드시 모습을 통하여 공을 베풀고 도의 본체는 말이 소용없는 것이 반드시 말을 통하여 가르침을 보이는 법이니, 어찌 묘유(妙有)로 인하여 진공(眞空)을 징험하지 않을 것인가.

대제자 양가승총(兩街僧摠) 삼중대사(三重大師) 흔홍(昕弘) 등은 불가의 큰 종이자 선문의 모법으로 스승의 지난 자취를 좇고 가르침의 남은 빛을 계승하였다. 길게 탄식하기를, "비록 (스님의) 비밀스런 말씀을 마음에 새겼다 하나, 만약 기이한 자취를 돌에 새겨 두지 않는다면, 어떻게 한결같이 진실된 법을 드러내어 길이 전수할 수 있을 것인가" 하였다. 이에 대사의 행실을 엮어 임금의 은전을 바라면서, 훌륭한 문장으로 우리 대사의 덕업을 기록해 줄 것을 청하였다.

임금께서 명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시고, 이어 한림학사 신 김정언(金廷彦)에게 명하기를, "돌아가신 국사 혜목대사는 행실은 구름 밖에 드높고 복은 인간세상을 흠뻑 적시었다. 너는 마땅히 큰 붓으로 공적을 써서 검은 빗돌에 넉넉히 기록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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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47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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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찬유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 찬유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A ekc:isStupaOf B
찬유 상주 삼랑사 A는 B에서 출가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융제 찬유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심희 찬유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찬유 여주 고달사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찬유 서울 장의사 A는 B에서 계를 받았다 A edm:isRelatedTo B
찬유 광주 송계선원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대동 찬유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찬유 창원 봉림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찬유 상주 삼랑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찬유 광주 천왕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찬유 고려 태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찬유 고려 혜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찬유 고려 정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찬유 고려 광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찬유 왕사 A의 유형은 B이다 A dcterms:type B
찬유 국사 A의 유형은 B이다 A dcterms:type B
찬유 개성 사나원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찬유 흔홍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869년 찬유 출생.
881년 찬유는 상주 삼랑사(三郞寺) 융제(融諦)에게 출가하였다.
890년 찬유는 삼각산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892년 찬유는 당나라로 구법 유학을 떠났다.
921년 찬유는 당나라에서 강주(康州) 덕안포(德安浦)로 귀국하였다.
958년 찬유는 혜목산에서 입적하였다.
975년 찬유의 탑비가 건립되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찬유",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 김위석, "심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찬유",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김위석, "찬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 참조: "찬유", 종교학대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6. 김위석, "찬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김위석, "찬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이지관, "여주 고달원 원종대사 혜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2,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5, 18-55쪽.
  •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33-50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찬유",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김위석, "찬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 참조: "찬유", 종교학대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김위석, "심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