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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옥룡사 동진대사탑비 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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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주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화쟁국사비부|분황사화쟁국사비부(芬皇寺和諍國師碑趺,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가 남아있다. 이 비는 [[원효]]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고려 숙종]]이 '화정(和靜)'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가 주석하였던 [[경주 분황사|분황사]]에 건립한 것으로, 조선 중기 이후에는 비신이 파괴되어 비좌만 전해져 내려오다가 조선 말기에 [[분황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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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은 [[김정희]]가 이를 발견하고 자신의 글씨를 새겨둔 것으로 유명하다. 이 비의 찬자와 관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이 찬술한 화쟁국사(和諍國師)의 비석이 있는데, 비석의 재료는 오금석(烏金石)이다."라고 기록하여 한문준(韓文俊)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비석 건립과 가까운 시기에 지어진  「최유청묘지명(崔惟淸墓誌銘)」에는 화쟁국사비명을 최유청이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ref>이강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4898 분황사 화쟁국사 비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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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은 [[김정희]]가 이를 발견하고 자신의 글씨를 새겨둔 것으로 유명하다. 이 비의 찬자와 관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한문준|한문준(韓文俊)]]이 찬술한 화쟁국사(和諍國師)의 비석이 있는데, 비석의 재료는 오금석(烏金石)이다."라고 기록하여 [[한문준|한문준(韓文俊)]]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비석 건립과 가까운 시기에 지어진  「최유청묘지명(崔惟淸墓誌銘)」에는 화쟁국사비명을 최유청이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ref>이강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4898 분황사 화쟁국사 비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7년 4월
 
20일.</ref><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0970000,37 분황사화쟁국사비부]",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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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4일 (금) 15:13 판

최유청(崔惟淸)
대표명칭 최유청
한자표기 崔惟淸
생몰년 1093년(선종 10)-1174년(명종 4)
본관 창원(昌原)
시호 문숙(文淑)
직재(直哉)
시대 고려



정의

고려 중기의 문신.

내용

가계

최유청(崔惟淸)의 6세조 최준옹(崔俊邕)은 태조를 도운 공신(功臣)이며, 아버지 최석(崔奭, 崔錫)은 문종·순종·선종 3조(三朝)를 섬긴 중신이다. 고려 가요인 정과정곡(鄭瓜亭曲)으로 유명한 정서(鄭敍)는 최유청의 처남이다.[1] 또한 현재까지 연대를 알 수 있는 목불상으로는 최고(最古)의 불상인 서울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서울 守國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보물 제1580호)은 복장유물을 통해 최종준(崔宗峻)의 시주로 개금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최종준은 바로 최유청의 손자이다.[2]

활동

예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으나 인종이자겸(李資謙)의 간계로 파직당하였다가 이자겸 몰락 후 다시 출사(出仕)했다. 좌사간(左司諫)·시어사(侍御使) 등을 역임하고, 1132년(인종 10)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때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다. 1142년 간의대부(諫議大夫)로서 금나라에 가 책명(冊命)을 사(謝)하고 돌아와 호부시랑(戶部侍郞)이 되고, 이어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승선(承宣)이 되었다. 1149년(의종 3) 참지정사판상서형부사(參知政事判尙書刑部事) 등을 거쳐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3] 1151년 판병부사(判兵部事)를 겸직했으나, 처남인 내시낭중(內侍郎中) 정서(鄭敍)와 왕의 동생 대령후 왕경(大寧侯 王暻)이 참소를 입은 사건에 연루되어 남경유수사(南京留守使)로 좌천되었다. 1157년 대령후 왕경이 천안부(天安府)로 유배될 때 다시 충주목사(忠州牧使)·광주목사(廣州牧使) 등으로 좌천되었다. 1161년 봉원전대학사(奉元殿大學士)가 되었으나, 반대하는 자들이 있어 중서시랑평장사로 치사(致仕)하였다. 1170년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여러 무인들의 보호로 화를 면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다시 중서시랑평장사로 제수되고, 1172년(명종 2) 수사공 집현전대학사 판예부사(守司空集賢殿大學士判禮部事)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4]

저술 및 작품

최유청은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밝았고 불경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학생과 사문들이 모여와 질문하는 자가 많았고 글씨도 잘 썼다. 저서로 『남도집(南都集)』, 『최문숙집(崔文淑集)』 등이 있고, 『이한림집주(李翰林集註)』, 『유문사실(柳文事實)』 등을 편찬하였다. 『동문선(東文選)』에 6수의 시와 45편의 문이 실려 있다.[5]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비 찬자

최유청은 1173년(명종 3)에 건립된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비의 비문을 지었다. 그의 처남인 정서(鄭敍)는 이 비의 비문을 썼다.[6]

분황사 화쟁국사비의 찬자

현재 경주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화쟁국사비부(芬皇寺和諍國師碑趺,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가 남아있다. 이 비는 원효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고려 숙종이 '화정(和靜)'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가 주석하였던 분황사에 건립한 것으로, 조선 중기 이후에는 비신이 파괴되어 비좌만 전해져 내려오다가 조선 말기에 분황사를 찾은 김정희가 이를 발견하고 자신의 글씨를 새겨둔 것으로 유명하다. 이 비의 찬자와 관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이 찬술한 화쟁국사(和諍國師)의 비석이 있는데, 비석의 재료는 오금석(烏金石)이다."라고 기록하여 한문준(韓文俊)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비석 건립과 가까운 시기에 지어진 「최유청묘지명(崔惟淸墓誌銘)」에는 화쟁국사비명을 최유청이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7][8]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최유청 이자겸 A는 B와 대립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최유청 정서 A는 B의 친척이다 A ekc:isLineageKinOf B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비 최유청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분황사화쟁국사비부 최유청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주석

  1. 박성봉, "최유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8월 30일.
  2. 문명대, "서울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최유청",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박성봉, "최유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8월 30일.
  5. 이성호, "최유청", 『디지털충주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옥룡사선각국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7. 이강근, "분황사 화쟁국사 비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7년 4월 20일.
  8. "분황사화쟁국사비부",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참고문헌

  • 박성봉, "최유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8월 30일.
  • "최유청",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이성호, "최유청", 『디지털충주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