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록화관 개관

"이인영-안융진 담판을 하는 서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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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3년 고려의 북진정책과 친송외교에 불안을 느낀 거란은 동경유수(東京留守) 소손녕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항복하자는 견해와 서경(西京 : 평양)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의하자는 할지론(割地論)이 우세하였으나 서희는 할지론을 반대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소손녕은 안융진(安戎鎭 : 평남 안주일대)을 공격하다가 중고려군에 패해 고려의 사신과 면대하기를 청해왔으므로 여기에 응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장흥진(長興鎭)·귀화진(歸化鎭)·곽주(郭州)·귀주(歸州)·흥화진(興化鎭) 등에 강동6주(江東六州)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고 고려의 영토를을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32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희, 2017년 2월 22일 확인]</ref><br/>
 
993년 고려의 북진정책과 친송외교에 불안을 느낀 거란은 동경유수(東京留守) 소손녕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항복하자는 견해와 서경(西京 : 평양)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의하자는 할지론(割地論)이 우세하였으나 서희는 할지론을 반대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소손녕은 안융진(安戎鎭 : 평남 안주일대)을 공격하다가 중고려군에 패해 고려의 사신과 면대하기를 청해왔으므로 여기에 응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장흥진(長興鎭)·귀화진(歸化鎭)·곽주(郭州)·귀주(歸州)·흥화진(興化鎭) 등에 강동6주(江東六州)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고 고려의 영토를을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32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희, 2017년 2월 22일 확인]</ref><br/>
거란 진영에 들어가 소손녕과 대등한 예로서 회견의 절차를 밟아 담판을 하고 있는 서희 앞에는 한 장의 지도가 놓여 있고, 거란 장수 소손녕은 호피가 덮여진 의자에 위압적인 자세로 앉아 회담에 임하고 있다. 그 주위를 포범 가죽위에 갑옷을 입고 무장을 한 거란군 장수들이 에워싸고 회담장 밖에도 거란군의 막사가 보이고 무장한 군사들이 대기하고 있어 문신 복장으로 침착하게 소손녕을 설득하고 있는 서희의 당당한 모습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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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진영에 들어가 소손녕과 대등한 예로서 회견의 절차를 밟아 담판을 하고 있는 서희 앞에는 한 장의 지도가 놓여 있고, 거란 장수 소손녕은 호피가 덮여진 의자에 위압적인 자세로 앉아 회담에 임하고 있다. 그 주위를 포범 가죽위에 갑옷을 입고 무장을 한 거란군 장수들이 에워싸고 회담장 밖에도 거란군의 막사가 보이고 무장한 군사들이 대기하고 있다. 문신 복장으로 침착하게 소손녕을 설득하고 있는 서희의 당당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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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3일 (목) 00:29 판


안융진 담판을 하는 서희
이인영-안융진담판(서희)-1976s.jpg
작가 이인영
제작연도 1976년
규격 300호(290.9x197cm)
유형 군사
분류 유화
소장처 미상



개요

이인영-안융진담판(서희)-1976s.jpg

고려 성종 12년(993년) 거란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였을 때 거란 군영에 들어가 소손녕과 담판하는 서희

민족기록화 작품 시각화 예시

내용

993년 고려의 북진정책과 친송외교에 불안을 느낀 거란은 동경유수(東京留守) 소손녕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항복하자는 견해와 서경(西京 : 평양)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의하자는 할지론(割地論)이 우세하였으나 서희는 할지론을 반대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소손녕은 안융진(安戎鎭 : 평남 안주일대)을 공격하다가 중고려군에 패해 고려의 사신과 면대하기를 청해왔으므로 여기에 응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장흥진(長興鎭)·귀화진(歸化鎭)·곽주(郭州)·귀주(歸州)·흥화진(興化鎭) 등에 강동6주(江東六州)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고 고려의 영토를을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1]
거란 진영에 들어가 소손녕과 대등한 예로서 회견의 절차를 밟아 담판을 하고 있는 서희 앞에는 한 장의 지도가 놓여 있고, 거란 장수 소손녕은 호피가 덮여진 의자에 위압적인 자세로 앉아 회담에 임하고 있다. 그 주위를 포범 가죽위에 갑옷을 입고 무장을 한 거란군 장수들이 에워싸고 회담장 밖에도 거란군의 막사가 보이고 무장한 군사들이 대기하고 있다. 문신 복장으로 침착하게 소손녕을 설득하고 있는 서희의 당당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관련 민족기록화

고려시대 왜적의 침입과 관련한 민족기록화


추출정보

작품정보 연결망

관련항목

노드 관계 노드
이인영-안융진 담판을 하는 서희 ~에 의해 그려지다 이인영

시간정보

중심 시간정보명 시간값
이인영-안융진 담판을 하는 서희 제작연도 1976년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남부연수원 소장처 1991년
전쟁기념관 소장처 2016년


참고문헌

주석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희, 2017년 2월 22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