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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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높이 158cm, 너비 91cm, 두께 22cm.
 
전체 높이 158cm, 너비 91cm, 두께 22cm.
  
1832년 청나라 고증학자 유희해(劉喜海)가 우리나라 금석물을 모아 편집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의 기록에는 이 탑 비신(碑身)의 높이 5.2척, 너비 3척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비신이 깨져 오른쪽 상부와 하부가 결실된 잔편이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사이에 놓여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비문은 손소(孫紹)가 지었으며 쓴 사람은 불명이다.<ref>[네이버 지식백과]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谷城泰安寺廣慈大師塔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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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귀부(龜趺)]] 위에 [[이수|이수(螭首)]]만 얹혀져 있는 상태로, 비신(碑身)은 파괴되었다. 945년 대사가 입적한 후, 사리탑이 조성되고 950년(광종 1)에 탑비가 조성되었다.
  
탑비는 입적한 지 5년 후인 950년(광종 1)에 세웠으며, 조형은 목이 짧은 귀부와 귀두(龜頭) 및 앞면의 구성이 사실적이고 조문(彫文)은 유려하며 귀배비좌(龜背碑座)의 네 둘레에는 연속와(連續渦)무늬를 장식하였다. 그리고 이수의 네 모서리에는 반룡(蟠龍)을, 제액(題額) 상부 중심에는 가릉빈가(迦陵頻伽:극락조)를 부각(浮刻)하였다. 이는 종전의 석비 기본형식에다 일찍이 미약하게 다루어진 부분의 장식과 장엄함을 더해 다양화한 새로운 예이다.<ref>[네이버 지식백과] 대안사 광자대사비 [大安寺廣慈大師碑] (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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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임금이 본산(本山)에 대사의 탑을 세우게 하되, 경비는 모두 국고에서 부담하게 하고 역부(役夫)로는 부근 주민을 동원토록 하였다. 공사를 마치고 나니 장엄이 주밀(周密)하고 조탁(彫琢)도 매우 우아하였다. 상수문인(上首門人)들이 다시 조정에 건의하되 “선사신(先師臣) 아모가 다행하게 임금님의 도움을 입어 탑을 세웠으니, 국은(國恩)이 망극하여 생전과 사후에 걸쳐 함께 영광이오나 아직 탑에 따른 비명(碑銘)이 없어 선사께서 생전에 쌓은 도행(道行)이 점차로 (결락) 윤몰(淪沒)할까 두렵사오니 비를 세우도록 윤허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왕은 수비(樹碑)를 허락하시고 미신(微臣)인 저에게 비문을 지어 스님의 선화(禪化)를 의양(宣揚)토록 하라 명하셨으나, 소(紹)는 칠보시(七步詩)를 지을 만한 재주도 못되며 학문(學問)도 오거(五車)의 책도 읽지 못한 변변치 아니한 선비이므로 굳게 사양하였지만 마지못하여 주생(朱生)과 같이 근부(斤斧)를 잡고, 예씨(禰氏)를 칭찬하는 것이니 부득이하여 억지로 엮어 비문을 지었다. ..... 광덕(光德) 2년 세차 경술 10월 15일 세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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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文旻)이 글자를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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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적인 특징은, [[이수]]의 네 귀퉁이마다 이무기의 머리조각이 돌출되어 있고, 앞면에는 [[가릉빈가|극락조(極樂鳥)]]로 보이는 새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이러한 새 종류의 조각은 [[구례 연곡사 동 승탑|구례 연곡사 동 승탑(求禮 鷰谷寺 東 僧塔, 국보 제53호)]]이나, [[구례 연곡사 북 승탑|구례 연곡사 북 승탑(求禮 鷰谷寺 北 僧塔, 국보 제54호)]]에서 잘 나타나 있다.<ref>문화재청</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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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비문의 글씨는 줄을 친 후 새겨 놓았는데, 전체적으로 건강한 힘이 느껴지고 은은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 통일신라에 비하여 서예가 훨씬 발전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ref>문화재청</ref>
 
비문의 글씨는 줄을 친 후 새겨 놓았는데, 전체적으로 건강한 힘이 느껴지고 은은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 통일신라에 비하여 서예가 훨씬 발전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ref>문화재청</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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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 청나라 고증학자 유희해(劉喜海)가 우리나라 금석물을 모아 편집한 [[해동금석원|『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의 기록에는 이 탑 비신(碑身)의 높이 5.2척, 너비 3척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비신이 깨져 오른쪽 상부와 하부가 결실된 잔편이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사이에 놓여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비문은 손소(孫紹)가 지었으며 쓴 사람은 불명이다.<ref>[네이버 지식백과]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谷城泰安寺廣慈大師塔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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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2일 (수) 23:44 판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谷城 泰安寺 廣慈大師塔碑)
Yoondastele.jpg
대표명칭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한자 谷城 泰安寺 廣慈大師塔碑
이칭 대안사광자대사비(大安寺廣慈大師碑)
주소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산18-1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275호
문화재 지정일 1963.01.21
찬자 손소(孫紹)
서자 미상
각자 문민(文旻)
승려 윤다(允多)
승탑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

정의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안사(泰安寺)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광자대사 윤다(廣慈大師 允多)의 탑비.


탑비

전체 높이 158cm, 너비 91cm, 두께 22cm.

귀부(龜趺) 위에 이수(螭首)만 얹혀져 있는 상태로, 비신(碑身)은 파괴되었다. 945년 대사가 입적한 후, 사리탑이 조성되고 950년(광종 1)에 탑비가 조성되었다.


Quote-left.png 임금이 본산(本山)에 대사의 탑을 세우게 하되, 경비는 모두 국고에서 부담하게 하고 역부(役夫)로는 부근 주민을 동원토록 하였다. 공사를 마치고 나니 장엄이 주밀(周密)하고 조탁(彫琢)도 매우 우아하였다. 상수문인(上首門人)들이 다시 조정에 건의하되 “선사신(先師臣) 아모가 다행하게 임금님의 도움을 입어 탑을 세웠으니, 국은(國恩)이 망극하여 생전과 사후에 걸쳐 함께 영광이오나 아직 탑에 따른 비명(碑銘)이 없어 선사께서 생전에 쌓은 도행(道行)이 점차로 (결락) 윤몰(淪沒)할까 두렵사오니 비를 세우도록 윤허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왕은 수비(樹碑)를 허락하시고 미신(微臣)인 저에게 비문을 지어 스님의 선화(禪化)를 의양(宣揚)토록 하라 명하셨으나, 소(紹)는 칠보시(七步詩)를 지을 만한 재주도 못되며 학문(學問)도 오거(五車)의 책도 읽지 못한 변변치 아니한 선비이므로 굳게 사양하였지만 마지못하여 주생(朱生)과 같이 근부(斤斧)를 잡고, 예씨(禰氏)를 칭찬하는 것이니 부득이하여 억지로 엮어 비문을 지었다. ..... 광덕(光德) 2년 세차 경술 10월 15일 세우고,

문민(文旻)이 글자를 새기다.

Quote-right.png
출처:



조형적인 특징은, 이수의 네 귀퉁이마다 이무기의 머리조각이 돌출되어 있고, 앞면에는 극락조(極樂鳥)로 보이는 새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이러한 새 종류의 조각은 구례 연곡사 동 승탑(求禮 鷰谷寺 東 僧塔, 국보 제53호)이나, 구례 연곡사 북 승탑(求禮 鷰谷寺 北 僧塔, 국보 제54호)에서 잘 나타나 있다.[1]


비문

비문의 글씨는 줄을 친 후 새겨 놓았는데, 전체적으로 건강한 힘이 느껴지고 은은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 통일신라에 비하여 서예가 훨씬 발전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2]


1832년 청나라 고증학자 유희해(劉喜海)가 우리나라 금석물을 모아 편집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의 기록에는 이 탑 비신(碑身)의 높이 5.2척, 너비 3척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비신이 깨져 오른쪽 상부와 하부가 결실된 잔편이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사이에 놓여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비문은 손소(孫紹)가 지었으며 쓴 사람은 불명이다.[3]



가상현실

답사 이후 추가 예정


갤러리

답사 이후 추가 예정


그래프

관련항목

각주

  1. 문화재청
  2. 문화재청
  3. [네이버 지식백과]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谷城泰安寺廣慈大師塔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