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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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와 탄생===
 
===가계와 탄생===
{{Blockquote|어머니는 김씨니, 어느날 밤에 홀연히 상서로운 징조의 꿈을 꾸었는데, 어떤 호승(胡僧: 인도 스님)이 방에 들어와 나무로 된 책상을 주었다. 문득 꿈을 깬 후 고침(藁砧: 점치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답하되, "반드시 보배로운 아들을 회임할 것이므로 미리 아들을 낳을 경사를 예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로부터 어머니의 거실에는 언제나 환한 불빛이 있었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3쪽.<br/>*원문(같은책 311쪽: 母金氏 魂交之夕 忽得休徵 見胡僧入房 擎玉案爲寄 ▨欻焉驚覺 尋報藁砧 答云必生懷寳之兒 先告弄璋之慶 ▨後▨於室內 每有鐙煇之▨▨)</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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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어머니는 김씨니, 어느날 밤에 홀연히 상서로운 징조의 꿈을 꾸었는데, 어떤 호승(胡僧: 인도 스님)이 방에 들어와 나무로 된 책상을 주었다. 문득 꿈을 깬 후 고침(藁砧: 점치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답하되, "반드시 보배로운 아들을 회임할 것이므로 미리 아들을 낳을 경사를 예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로부터 어머니의 거실에는 언제나 환한 불빛이 있었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3쪽.</ref>}}
 
형미(逈微)는 864년 지금의 광주 지방인 무주(武州)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최씨이고 그 선조는 박릉(博陵)<ref>박릉최씨는 하북(河北) 산동(山東)의 4개의 저명한 사족 가운데 하나이다. 피터 K.볼, 심의용 역, 『중국 지식인들과 정체성: 사문을 통해 본 당송 시대 지성사의 대변화』, 북스토리, 2008, 104쪽.</ref>의 귀족 출신이었다. 아버지 낙권(樂權)은 노장사상에 심취한 한편 스님들과도 친교하였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2쪽.</ref> 대사는 수승한 상호(殊相)를 타고 났으며, 어려서부터 함부로 아이들과 사귀지 않았다고 한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3쪽.</ref>
 
형미(逈微)는 864년 지금의 광주 지방인 무주(武州)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최씨이고 그 선조는 박릉(博陵)<ref>박릉최씨는 하북(河北) 산동(山東)의 4개의 저명한 사족 가운데 하나이다. 피터 K.볼, 심의용 역, 『중국 지식인들과 정체성: 사문을 통해 본 당송 시대 지성사의 대변화』, 북스토리, 2008, 104쪽.</ref>의 귀족 출신이었다. 아버지 낙권(樂權)은 노장사상에 심취한 한편 스님들과도 친교하였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2쪽.</ref> 대사는 수승한 상호(殊相)를 타고 났으며, 어려서부터 함부로 아이들과 사귀지 않았다고 한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3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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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유학===
 
===입당유학===
형미가 당시 [[가지산문]]을 열었던 [[체징]]의 법도를 받아 이었지만, 출가한지 2년만인 880년 체징이 입적하였다. 이에 형미는 당시 유명한 남종 선사인 [[도응|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을 찾아가 인가(印可)를 받고자 하였다.
 
 
{{Blockquote|대순(大順) 2년 초봄에 이르러 홀연히 입조사(入朝使)를 만나 몸을 의탁하여 서방(西方)으로 가서 피안(彼岸)인 당나라에 도달하였으니, 배를 경수(鏡水)에 메어 놓고, 곧바로 종릉(鍾陵)을 향해 가다가 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를 친견하고 법문을 들을 계획을 세웠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5쪽.</ref>}}
 
{{Blockquote|대순(大順) 2년 초봄에 이르러 홀연히 입조사(入朝使)를 만나 몸을 의탁하여 서방(西方)으로 가서 피안(彼岸)인 당나라에 도달하였으니, 배를 경수(鏡水)에 메어 놓고, 곧바로 종릉(鍾陵)을 향해 가다가 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를 친견하고 법문을 들을 계획을 세웠다.<ref>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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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미는 [[가지산문]]을 열었던 [[체징]]의 법도를 받아 이었지만, 출가한 지 불과 2년 만에 체징이 입적하였다. 이에 형미는 당시 유명한 남종 선사인 [[도응|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을 찾아가 인가(印可)를 받고자 하였고,<ref>EBS 기획 시리즈, "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 - 선각왕사 형미의 유적 (방송일: 2002.11.08)</ref> 891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운거도응 밑에서 수학한 사무외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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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형미를 비롯하여 [[경유|법경대사 경유(法鏡大師 慶猷)]], [[여엄|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 [[이엄|진철대사 이엄(眞澈大師 利嚴)]] 등 신라 출신의 승려 네 명이 운거도응대사 밑에서 동문수학하여 모두 인가를 받았고, 이들은 해동의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 즉 "두려울 게 없는 경지에 이른 네 명의 큰 스님"으로 일컬어졌다.<ref>EBS 기획 시리즈, "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 - 선각왕사 형미의 유적 (방송일: 2002.11.08)</ref> 이들 사무외대사는 이후 고려를 건국한 [[왕건|태조 왕건]]의 스승이 되었다.<ref>방학봉, 『중국을 뒤흔든 우리 선조 이야기』, 일송북, 2004, 255쪽.</ref>
형미, 법경대사 경유, 대경대사 여엄, 진철대사 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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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및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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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대중(四部大衆)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형미는 905년 무주로 돌아온 후, 무주의 실력자 왕지본(王池本)의 후원을 받으면서 무위갑사에서 8년간(905-912) 주석하였다.
  
===귀국 및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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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이때에 대왕께서는 일찍이 대사가 근래에 오월(吳越)에서 우리나라[秦韓]로 들어오셔서 마니보주(摩尼寶珠)를 바닷가에 감추고, 미옥(美玉)을 하늘 바깥에 감추고 계시다는 것을 들어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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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셨다. 그래서 먼저 글[丹詔]을 보내어 스님의 도간(道竿)에 공경을 표시하니, 대사는 왕명[制]을 받들어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거친 파도를 헤치고 달려왔다. ...(중략)... 그 후 군대를 돌이킬 때에 특별히 (스님에게) 함께 돌아갈 것을 청하였고, 2~3일 사이에 북쪽해안에 이르렀다.<ref>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8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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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912년 [[궁예]]가 [[왕건]]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금성(錦城: 지금의 나주)과 무주(지금의 광주) 등 전라도 남부 지역을 공략하였다. 궁예는 형미의 명성을 듣고 만나기를 청하여 친견하였고, 나주 지역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태봉(泰封)으로 회군할 때 형미를 태봉의 수도 철원으로 함께 모시고 갔다.<ref>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0쪽.</ref><ref>기존의 해석에서는 위에 인용된 비문의 "대왕(大王)"을 왕건으로 해석하여 형미를 태봉으로 초빙한 주체를 왕건으로 이해하였지만, 비문 전체의 내용으로 볼 때 "대왕"은 궁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0쪽.</ref>
  
 
===입적===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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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에서 궁예의 우대를 받던 형미는 917년 궁예 반대세력과의 연결을 의심받아 궁예에게 피살되었으니,<ref>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9쪽.</ref> 세속의 나이는 54세요, 승랍은 3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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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이때에 개울과 못이 갑자기 마르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으며, 도속(道俗)이 슬픔을 머금고, 인간과 하늘 세계의 빛이 변하였다.<ref>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9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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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왕위에 오른 후 형미를 기리기 위하여 산사(山寺)를 짓고 탑을 세우도록 명하였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시호를 선각대사(先覺大師), 탑명을 편광령탑(遍光靈塔)이라고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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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징(體澄)은 804년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 지방인 웅진(熊津)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그는 물을 관장하는 전설 속의 신(神)인 하백(河伯)과 같이 건장한 체격을 가진 금발 머리의 아이었다고 전해진다.<ref>비문</ref> 체징은 화산(花山) 권법사(勸法師)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827년(흥덕왕 2) 24세의 나이에 오늘날 충청남도 서산에 위치한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普願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주석하고 있던 [[염거|염거(廉居)]]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염거는 신라에 처음으로 선종(禪綜)을 도입한 승려인 도의(道義)의 제자로, 이러한 사실을 통해 체징은 도의부터 이어지는 법맥을 전해 받고자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ref>조범환, 新羅 下代 體澄 禪師와 迦智山門의 개창, 정신문화연구 Vol.28 No.3, 2005, 7쪽.</ref> 837년(희강왕 2) 체징은 동료들과 함께 당나라로의 유학을 떠났으나, 자신이 배웠던 선법이 중국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곧바로 귀국하였다.<ref>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포교연구실, ''불교사의 이해'', (주)조계종출판사, 2014, 171쪽.</ref> 이후 체징은 858년(헌안왕 2) 부터 무주(武州) 황학(黃壑)의 난약(蘭若)에 머물렀는데, 당시 왕인 헌안왕(憲安王)은 장사현(長沙縣) 부사(副使) [[김언경|김언경(金彦卿)]]을 파견하여 체징을 서울(경주)로 모시고자 하였다. 체징은 여러번 고사하였으나, 거듭된 왕의 요청에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옮겨 갔으며, 그곳에서 [[장흥 보림사|보림사(寶林寺)]]를 중건하였다. 체징은 880년(헌강왕 6) 77세의 나이로 입적할때까지 도의로부터 이어지는 선법(禪法)을 전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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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조범환, 「新羅 下代 體澄 禪師와 迦智山門의 개창」, 『정신문화연구』 Vol.28 No.3,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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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3-222쪽.
*최선희, 「체징과 가지산문 개창」, 『역사학연구』, 호남사학회 25, 2005, 1-27쪽.
 
*이계표, 「신라 하대의 가지산문」, 『역사학연구』, 호남사학회 7, 1993, 265-294쪽.
 
*곽승훈, 「김영의 보조선사비명 찬술」, 『신라사학보』 제27호, 신라사학회, 2013.4, 197-232쪽.
 
  
 
=='''각주'''==
 
=='''각주'''==

2017년 2월 21일 (화) 20:50 판


형미(逈微)()
Seongaktapbi.jpg
대표명칭 형미(逈微)
영문명칭 Hyeongmi
생몰년 864(경문왕 4)-917(경명왕 1)
시호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逈微)
탑호 편광(遍光)
성씨 최씨(崔氏)
본관 박릉(博陵)
출신지 무주(武州: 현재의 광주)
승탑비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생애

가계와 탄생

Quote-left.png 어머니는 김씨니, 어느날 밤에 홀연히 상서로운 징조의 꿈을 꾸었는데, 어떤 호승(胡僧: 인도 스님)이 방에 들어와 나무로 된 책상을 주었다. 문득 꿈을 깬 후 고침(藁砧: 점치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답하되, "반드시 보배로운 아들을 회임할 것이므로 미리 아들을 낳을 경사를 예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로부터 어머니의 거실에는 언제나 환한 불빛이 있었다.[1] Quote-right.png
출처:


형미(逈微)는 864년 지금의 광주 지방인 무주(武州)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최씨이고 그 선조는 박릉(博陵)[2]의 귀족 출신이었다. 아버지 낙권(樂權)은 노장사상에 심취한 한편 스님들과도 친교하였다.[3] 대사는 수승한 상호(殊相)를 타고 났으며, 어려서부터 함부로 아이들과 사귀지 않았다고 한다.[4]

출가수행

Quote-left.png 체징선사가 “처음 보는 순간 비록 초면이지만 문득 오래전부터 서로 잘 아는 것 같다”하고, “옛날 서로 이별한 지 오래전이거늘 어찌 그리 늦었는가”하며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5] Quote-right.png
출처:


878년 장흥 보림사로 출가하여 보조선사 체징의 제자가 되었으며, 882년 구례 화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Quote-left.png 중화(中和) 2년에 이르러 화엄사 관단(官壇)에서 비구계를 받을 때 대사가 계단에 올라가 제자리에 앉는 순간 백색 무지개 기운이 법당을 가득 덮었다.[6] Quote-right.png
출처:


891년

입당유학

Quote-left.png 대순(大順) 2년 초봄에 이르러 홀연히 입조사(入朝使)를 만나 몸을 의탁하여 서방(西方)으로 가서 피안(彼岸)인 당나라에 도달하였으니, 배를 경수(鏡水)에 메어 놓고, 곧바로 종릉(鍾陵)을 향해 가다가 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를 친견하고 법문을 들을 계획을 세웠다.[7] Quote-right.png
출처:


형미는 가지산문을 열었던 체징의 법도를 받아 이었지만, 출가한 지 불과 2년 만에 체징이 입적하였다. 이에 형미는 당시 유명한 남종 선사인 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을 찾아가 인가(印可)를 받고자 하였고,[8] 891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이때 형미를 비롯하여 법경대사 경유(法鏡大師 慶猷), 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 진철대사 이엄(眞澈大師 利嚴) 등 신라 출신의 승려 네 명이 운거도응대사 밑에서 동문수학하여 모두 인가를 받았고, 이들은 해동의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 즉 "두려울 게 없는 경지에 이른 네 명의 큰 스님"으로 일컬어졌다.[9] 이들 사무외대사는 이후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스승이 되었다.[10]

귀국 및 활동

사부대중(四部大衆)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형미는 905년 무주로 돌아온 후, 무주의 실력자 왕지본(王池本)의 후원을 받으면서 무위갑사에서 8년간(905-912) 주석하였다.


Quote-left.png 이때에 대왕께서는 일찍이 대사가 근래에 오월(吳越)에서 우리나라[秦韓]로 들어오셔서 마니보주(摩尼寶珠)를 바닷가에 감추고, 미옥(美玉)을 하늘 바깥에 감추고 계시다는 것을 들어 알고

계셨다. 그래서 먼저 글[丹詔]을 보내어 스님의 도간(道竿)에 공경을 표시하니, 대사는 왕명[制]을 받들어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거친 파도를 헤치고 달려왔다. ...(중략)... 그 후 군대를 돌이킬 때에 특별히 (스님에게) 함께 돌아갈 것을 청하였고, 2~3일 사이에 북쪽해안에 이르렀다.[11]

Quote-right.png
출처:


그러던 중 912년 궁예왕건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금성(錦城: 지금의 나주)과 무주(지금의 광주) 등 전라도 남부 지역을 공략하였다. 궁예는 형미의 명성을 듣고 만나기를 청하여 친견하였고, 나주 지역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태봉(泰封)으로 회군할 때 형미를 태봉의 수도 철원으로 함께 모시고 갔다.[12][13]

입적

철원에서 궁예의 우대를 받던 형미는 917년 궁예 반대세력과의 연결을 의심받아 궁예에게 피살되었으니,[14] 세속의 나이는 54세요, 승랍은 35세였다.

Quote-left.png 이때에 개울과 못이 갑자기 마르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으며, 도속(道俗)이 슬픔을 머금고, 인간과 하늘 세계의 빛이 변하였다.[15] Quote-right.png
출처: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왕위에 오른 후 형미를 기리기 위하여 산사(山寺)를 짓고 탑을 세우도록 명하였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시호를 선각대사(先覺大師), 탑명을 편광령탑(遍光靈塔)이라고 추증하였다.

동영상

  • EBS 기획 시리즈, "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 - 선각왕사 형미의 유적_#001~004 (방송일: 2002.11.08)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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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는 -를 위한 비이다 형미(逈微)
체징(體澄) 는 -의 스승이다 형미(逈微)
운거도응선사(雲居道膺禪師) 는 -의 스승이다 형미(逈微)
형미(逈微) 는 -에서 주석하였다 강진 무위사(康津 無爲寺)
형미(逈微) 는 -에서 수행하였다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
형미(逈微) 는 -에서 계를 받았다 구례 화엄사(求禮 華嚴寺)
궁예(弓裔) 는 -와 관련있다 형미(逈微)
왕건(王建) 는 -와 관련있다 형미(逈微)
왕건(王建) 는 -의 이름을 지었다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는 -에 있다 강진 무위사(康津 無爲寺)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는 -가 비문을 지었다 최언위(崔彦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는 -가 비문을 썼다 유훈율(柳勳律)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는 -가 비문을 새겼다 김문윤(金文允), 최환규(崔奐規)

참고문헌

  •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3-222쪽.

각주

  1.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3쪽.
  2. 박릉최씨는 하북(河北) 산동(山東)의 4개의 저명한 사족 가운데 하나이다. 피터 K.볼, 심의용 역, 『중국 지식인들과 정체성: 사문을 통해 본 당송 시대 지성사의 대변화』, 북스토리, 2008, 104쪽.
  3.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2쪽.
  4.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3쪽.
  5.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3-324쪽.
  6.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4쪽.
  7. 이지관,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4, 325쪽.
  8. EBS 기획 시리즈, "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 - 선각왕사 형미의 유적 (방송일: 2002.11.08)
  9. EBS 기획 시리즈, "최완수의 우리미술 바로보기" - 선각왕사 형미의 유적 (방송일: 2002.11.08)
  10. 방학봉, 『중국을 뒤흔든 우리 선조 이야기』, 일송북, 2004, 255쪽.
  11.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8쪽.
  12.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0쪽.
  13. 기존의 해석에서는 위에 인용된 비문의 "대왕(大王)"을 왕건으로 해석하여 형미를 태봉으로 초빙한 주체를 왕건으로 이해하였지만, 비문 전체의 내용으로 볼 때 "대왕"은 궁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0쪽.
  14.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19쪽.
  15.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 2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