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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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 높이 322㎝, 너비 115.5㎝, 두께 20.5㎝. 석재는 화강암으로, 개석은 없고 네모난 대석(臺石)과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 앞면의 하단부와 뒷면의 상단부가 파손되었으며 여러 부분이 마멸되었다. 1394(조선 태조 3)년에 문인(門人)인 [[희진|희진(希進)]]이 탑비를 세웠다. 비문은 [[권근|권근(權近)]]이 짓고 글씨는 승려 [[천택|천택(天澤)]]이 썼으며,  각자의 이름은 마멸되어 알 수 없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419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비신 높이 322㎝, 너비 115.5㎝, 두께 20.5㎝. 석재는 화강암으로, 개석은 없고 네모난 대석(臺石)과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 앞면의 하단부와 뒷면의 상단부가 파손되었으며 여러 부분이 마멸되었다. 1394(조선 태조 3)년에 문인(門人)인 [[희진|희진(希進)]]이 탑비를 세웠다. 비문은 [[권근|권근(權近)]]이 짓고 글씨는 승려 [[천택|천택(天澤)]]이 썼으며,  각자의 이름은 마멸되어 알 수 없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419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글씨는 북위의 묘지명과 왕희지(王羲之), 그리고 우세남(虞世南) 등의 서풍들을 잘 융합하여 썼는데 필력이 뛰어나고, 결체가 조밀하여 빈틈이 없다. 또한 고박(古朴: 옛 풍미가 있어 질박함)과 신운(神韻: 신비롭고 고상한 운치)이 함께 어우러진 것으로서,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한 서격(書格)을 지니고 있다. 또한 전 조선시대에 걸쳐서도 이 비에 필적할 만한 글씨가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ref>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419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忠州靑龍寺址普覺國師塔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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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는 북위의 묘지명과 [[왕희지|왕희지(王羲之)]], 그리고 [[우세남|우세남(虞世南)]] 등의 서풍들을 잘 융합하여 썼는데 필력이 뛰어나고, 결체가 조밀하여 빈틈이 없다. 또한 고박(古朴: 옛 풍미가 있어 질박함)과 신운(神韻: 신비롭고 고상한 운치)이 함께 어우러진 것으로서,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한 서격(書格)을 지니고 있다.<ref>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419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忠州靑龍寺址普覺國師塔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관련항목'''==
 
=='''관련항목'''==

2017년 6월 5일 (월) 16:56 판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BHST Cheongnyongsaji Bogak stele.jpg
대표명칭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한자 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이칭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비(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碑)
주소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2번지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658호
문화재 지정일 1979.05.22
찬자 권근(權近)
서자 천택[1]
각자 미상
승려 혼수(混修)
승탑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청룡사지(靑龍寺址)에 있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승려 보각국사 혼수(普覺國師 混修, 1320-1392)의 탑비.

내용

개요

비신 높이 322㎝, 너비 115.5㎝, 두께 20.5㎝. 석재는 화강암으로, 개석은 없고 네모난 대석(臺石)과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 앞면의 하단부와 뒷면의 상단부가 파손되었으며 여러 부분이 마멸되었다. 1394(조선 태조 3)년에 문인(門人)인 희진(希進)이 탑비를 세웠다. 비문은 권근(權近)이 짓고 글씨는 승려 천택(天澤)이 썼으며, 각자의 이름은 마멸되어 알 수 없다.[2]

글씨는 북위의 묘지명과 왕희지(王羲之), 그리고 우세남(虞世南) 등의 서풍들을 잘 융합하여 썼는데 필력이 뛰어나고, 결체가 조밀하여 빈틈이 없다. 또한 고박(古朴: 옛 풍미가 있어 질박함)과 신운(神韻: 신비롭고 고상한 운치)이 함께 어우러진 것으로서,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한 서격(書格)을 지니고 있다.[3]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혼수 A는 B를 위한 비이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충주 청룡사지 A는 B에 있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권근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천택 A는 B가 비문을 썼다
조선 태조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A는 B의 이름을 지었다

참고문헌

주석

  1. 서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비문을 판독 번역한 이지관은 서자 이름 부분이 결락되어 알 수 없다고 하였으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재청 문화재검색의 설명에는 승려 천택이라 기술하고 있다.
  2.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忠州靑龍寺址普覺國師塔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