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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었다. 그 해 8월 조방장(助防將)으로 평양 공략에 나섰으며, 싸움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워 평안도방어사에 승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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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었다. 그 해 8월 조방장(助防將)으로 평양 공략에 나섰으며, 싸움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워 평안도방어사에 승진되었다.
1593년 1월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원군과 함께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운 뒤,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도원수 권율(權慄)의 지시로 남원 등지에서 날뛰는 토적을 소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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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1월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원군과 함께 [[평양성전투|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운 뒤,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도원수 [[권율|권율(權慄)]]의 지시로 남원 등지에서 날뛰는 토적을 소탕하였다.
1595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을 때, 선조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이틀 만에 동래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송상현(宋象賢)의 관을 적진에서 찾아오라고 하자 그 집 사람을 시켜 일을 성사시켰다. 또한, 이홍발(李弘發)을 부산에 잠입시켜 적의 정황을 살피게 하고, 일본 간첩 요시라[要時羅]를 매수해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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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5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을 때, [[조선 선조|선조]]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이틀 만에 동래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송상현|송상현(宋象賢)]]의 관을 적진에서 찾아오라고 하자 그 집 사람을 시켜 일을 성사시켰다. 또한, [[이홍발|이홍발(李弘發)]]을 부산에 잠입시켜 적의 정황을 살피게 하고, 일본 간첩 [[요시라|요시라(要時羅)]]를 매수해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1597년 도원수 권율로부터 의령의 남산성(南山城)을 수비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불복해 강등되었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631 김경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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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도원수 [[권율]]로부터 의령의 남산성(南山城)을 수비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불복해 강등되었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631 김경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603년 충청도병마절도사로 군졸을 학대하고 녹훈(祿勳)에 부정이 있어 파직되었다가, 1604년 전공을 인정받아 포도대장 겸 도정(捕盜大將兼都正)이 되었다.
 
1603년 충청도병마절도사로 군졸을 학대하고 녹훈(祿勳)에 부정이 있어 파직되었다가, 1604년 전공을 인정받아 포도대장 겸 도정(捕盜大將兼都正)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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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원군 요청===
 
===명나라의 원군 요청===
명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하여 원병요청을 하자,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서 원수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출전하여, 이듬해 심하(深河)에서 크게 이겼으나 부차(富車)에서 패하였다. 강홍립이 전군을 이끌고 금나라 군대에 항복하여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비밀리에 적정을 기록하여 고국에 보내려 하였으나, 강홍립의 고발로 처형되었다.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우의정이 추증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1984&cid=40942&categoryId=33383 김경서]",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시호는 양의(襄毅)이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631 김경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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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하여 원병요청을 하자,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서 원수 [[강홍립|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출전하여, 이듬해 심하(深河)에서 크게 이겼으나 부차(富車)에서 패하였다. [[강홍립]]이 전군을 이끌고 금나라 군대에 항복하여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비밀리에 적정을 기록하여 고국에 보내려 하였으나, [[강홍립]]의 고발로 처형되었다.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우의정이 추증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1984&cid=40942&categoryId=33383 김경서]",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시호는 양의(襄毅)이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631 김경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김응서설화===
 
===김응서설화===
 
====역사====
 
====역사====
김응서는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다. 광해군 때 명(明)의 요구로 강홍립과 함께 출전했으나, 강홍립이 투항하는 바람에 투옥되었다. 끝까지 굴하지 않고 적정을 탐지하여 보고하였으나 강홍립의 고변으로 처형되었다. <김응서설화>의 핵심인 왜장 살해 이야기는 평양성 탈환 전투 때 있었던 사건을 내용으로 한다.<ref>임철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120647&cid=50223&categoryId=51051 김응서],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 국립민속박물관</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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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서는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다. 광해군 때 명(明)의 요구로 [[강홍립]]과 함께 출전했으나, [[강홍립]]이 투항하는 바람에 투옥되었다. 끝까지 굴하지 않고 적정을 탐지하여 보고하였으나 강홍립의 고변으로 처형되었다. <김응서설화>의 핵심인 왜장 살해 이야기는 [[평양성전투|평양성 탈환 전투]] 때 있었던 사건을 내용으로 한다.<ref>임철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120647&cid=50223&categoryId=51051 김응서],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 국립민속박물관</html>.</ref>
  
 
====줄거리====
 
====줄거리====
왜장의 수청을 들던 계월향이 김응서에게 왜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 주면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 김응서가 응하자 계월향은 김응서를 오빠로 속여 인사시킨 다음, 왜장의 용력과 습성을 일러주었다. 김응서가 왜장의 방으로 들어가자, 두 눈을 부릅뜬 채 쌍검을 쥐고 앉아서 자고 있었다. 목을 치자 목이 없는 왜장이 칼을 휘두르는데, 하나는 벽에 꽂히고 또 하나는 기둥에 박혔다. 김응서가 왜장의 목을 가지고 나오려 하자 계월향이 따라 나섰다.<ref>임철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120647&cid=50223&categoryId=51051 김응서],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 국립민속박물관</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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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장의 수청을 들던 [[계월향]]이 김응서에게 왜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 주면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 김응서가 응하자 [[계월향]]은 김응서를 오빠로 속여 인사시킨 다음, 왜장의 용력과 습성을 일러주었다. 김응서가 왜장의 방으로 들어가자, 두 눈을 부릅뜬 채 쌍검을 쥐고 앉아서 자고 있었다. 목을 치자 목이 없는 왜장이 칼을 휘두르는데, 하나는 벽에 꽂히고 또 하나는 기둥에 박혔다. 김응서가 왜장의 목을 가지고 나오려 하자 [[계월향]]이 따라 나섰다.<ref>임철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120647&cid=50223&categoryId=51051 김응서],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 국립민속박물관</html>.</ref>
  
김응서는 둘 다 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계월향을 죽이고 돌아왔다. 구비설화에는 문헌설화에 없는 다양한 이야기가 전승된다. 김응서가 뱃속에 있을 때 일본에서 영웅이 태어날 것을 알고 국록을 먹여 키운 호랑이를 보냈다. 중으로 변신하여 김응서 모친을 죽이러 갔으나, 팔문금사진이 쳐 있어 그냥 돌아갔다. 김응서가 태어나자 이번에는 평수길이 죽이러 왔다. 김응서가 자고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베개를 빼 보았으나 움직임이 없었다. 죽은 영혼은 잡을 수 없다고 하면서 그냥 돌아갔다.<ref>임철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120647&cid=50223&categoryId=51051 김응서],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 국립민속박물관</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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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서는 둘 다 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계월향]]을 죽이고 돌아왔다. 구비설화에는 문헌설화에 없는 다양한 이야기가 전승된다. 김응서가 뱃속에 있을 때 일본에서 영웅이 태어날 것을 알고 국록을 먹여 키운 호랑이를 보냈다. 중으로 변신하여 김응서 모친을 죽이러 갔으나, 팔문금사진이 쳐 있어 그냥 돌아갔다. 김응서가 태어나자 이번에는 [[도요토미히데요시|평수길]]이 죽이러 왔다. 김응서가 자고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베개를 빼 보았으나 움직임이 없었다. 죽은 영혼은 잡을 수 없다고 하면서 그냥 돌아갔다.<ref>임철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120647&cid=50223&categoryId=51051 김응서],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 국립민속박물관</html>.</ref>
  
 
====특징====
 
====특징====

2017년 11월 8일 (수) 10:41 판

김응서(金應瑞)
대표명칭 김응서
한자표기 金應瑞
생몰년 1564년(명종 19)-1624년(인조 2)
본관 김해(金海)
이칭 김경서(金景瑞)
시호 양의(襄毅)
성보(聖甫)
출생지 평안남도 용강
시대 조선
대표직함 전라도병마절도사, 정주목사, 평안도병마절도사
김인룡(金仁龍)
성격 무신
유형 인물



정의

조선시대의 무신

내용

출생

김응서(金應瑞, 1564-1624)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성보(聖甫), 용강에서 살았다.[1] 김응서는 그의 초명이고, 장성해서는 김경서(金景瑞)를 이름으로 사용했다. 1588년(선조 21) 감찰(監察)이 되었으나, 집안이 미천한 탓으로 파직되었다. [2]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었다. 그 해 8월 조방장(助防將)으로 평양 공략에 나섰으며, 싸움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워 평안도방어사에 승진되었다. 1593년 1월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원군과 함께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운 뒤,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도원수 권율(權慄)의 지시로 남원 등지에서 날뛰는 토적을 소탕하였다. 1595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을 때, 선조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이틀 만에 동래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송상현(宋象賢)의 관을 적진에서 찾아오라고 하자 그 집 사람을 시켜 일을 성사시켰다. 또한, 이홍발(李弘發)을 부산에 잠입시켜 적의 정황을 살피게 하고, 일본 간첩 요시라(要時羅)를 매수해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1597년 도원수 권율로부터 의령의 남산성(南山城)을 수비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불복해 강등되었다.[3]

1603년 충청도병마절도사로 군졸을 학대하고 녹훈(祿勳)에 부정이 있어 파직되었다가, 1604년 전공을 인정받아 포도대장 겸 도정(捕盜大將兼都正)이 되었다. 1609년(광해군 1) 정주목사를 지내고, 이어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와 북로방어사(北路防禦使)를 역임하고, 1615년 길주목사, 1616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 2년 뒤에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4]

명나라의 원군 요청

명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하여 원병요청을 하자,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서 원수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출전하여, 이듬해 심하(深河)에서 크게 이겼으나 부차(富車)에서 패하였다. 강홍립이 전군을 이끌고 금나라 군대에 항복하여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비밀리에 적정을 기록하여 고국에 보내려 하였으나, 강홍립의 고발로 처형되었다.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우의정이 추증되었다.[5] 시호는 양의(襄毅)이다.[6]

김응서설화

역사

김응서는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다. 광해군 때 명(明)의 요구로 강홍립과 함께 출전했으나, 강홍립이 투항하는 바람에 투옥되었다. 끝까지 굴하지 않고 적정을 탐지하여 보고하였으나 강홍립의 고변으로 처형되었다. <김응서설화>의 핵심인 왜장 살해 이야기는 평양성 탈환 전투 때 있었던 사건을 내용으로 한다.[7]

줄거리

왜장의 수청을 들던 계월향이 김응서에게 왜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 주면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 김응서가 응하자 계월향은 김응서를 오빠로 속여 인사시킨 다음, 왜장의 용력과 습성을 일러주었다. 김응서가 왜장의 방으로 들어가자, 두 눈을 부릅뜬 채 쌍검을 쥐고 앉아서 자고 있었다. 목을 치자 목이 없는 왜장이 칼을 휘두르는데, 하나는 벽에 꽂히고 또 하나는 기둥에 박혔다. 김응서가 왜장의 목을 가지고 나오려 하자 계월향이 따라 나섰다.[8]

김응서는 둘 다 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계월향을 죽이고 돌아왔다. 구비설화에는 문헌설화에 없는 다양한 이야기가 전승된다. 김응서가 뱃속에 있을 때 일본에서 영웅이 태어날 것을 알고 국록을 먹여 키운 호랑이를 보냈다. 중으로 변신하여 김응서 모친을 죽이러 갔으나, 팔문금사진이 쳐 있어 그냥 돌아갔다. 김응서가 태어나자 이번에는 평수길이 죽이러 왔다. 김응서가 자고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베개를 빼 보았으나 움직임이 없었다. 죽은 영혼은 잡을 수 없다고 하면서 그냥 돌아갔다.[9]

특징

왜장 살해 이야기는 하나의 사건이 전승 집단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인식될 수 있는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예이다. 문헌설화에는 지배집단의 역사 의식이 반영되어 있고, 구비설화에는 민중의 역사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김응서 전설에는 민중과 여성 중심의 역사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기생의 어머니는 자기 딸이 나라와 김응서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 죽음을 자처했기에 충효열을 겸비한 여자임을 강조한다.[10]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응서 임진왜란 A는 B에 참가하였다
김응서 권율 A는 B와 관련이 있다
김응서 송상현 A는 B와 관련이 있다
김응서 이홍발 A는 B와 관련이 있다
김응서 요시라 A는 B와 관련이 있다
김응서 강홍립 A는 B와 관련이 있다
김응서 김응하 A는 B와 관련이 있다
김응서 이계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김응서 평양전투 A는 B에 참가하였다
김응서 계월향 A는 B와 관련이 있다
김응서 명나라 원병파견 A는 B에 참가하였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이장희, "김경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경서",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이장희, "김경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이장희, "김경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김경서",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6. 이장희, "김경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임철호, "김응서,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국립민속박물관.
  8. 임철호, "김응서,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국립민속박물관.
  9. 임철호, "김응서,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국립민속박물관.
  10. 임철호, "김응서,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국립민속박물관.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더 읽을 거리

  • 강창규, 「김응서(金應瑞)를 기억하는 방식과 그 문학적 형상화」, 『용봉인문논총』 40, 전남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2, 105-129쪽.
  • 이장희, "김경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임유경, 「〈김장군유사〉와 〈김응서실기〉의 서술방식 연구」, 『인문과학연구』 18, 대구카톨릭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2, 143-1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