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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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3일 (일) 03:15 판

도선(道詵)
대표명칭 도선
영문명칭 Doseon
한자 道詵
생몰년 827(흥덕왕 2)-898(효공왕 2)
시호 요공선사(了空禪師), 선각국사(先覺國師)
연기(烟起)
도선(道詵)
탑호 징성혜등(澄聖慧燈)
옥룡자(玉龍子), 옥룡(玉龍)
성씨 김씨(金氏), 최씨(崔氏)
출신지 영암(靈巖)
승탑비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비



정의

신라 말기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도선(道詵)은 827년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내력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태종 무열왕의 서얼손(庶孼孫)이라는 전승으로 보아 진골 귀족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1]

Quote-left.png 스님의 휘는 도선(道詵)이요, 속성은 김씨이며, 신라국 영암 출신이다. 그의 세계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史事는 유실하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태종대왕의 서얼손 이라고도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2쪽.


탄생설화

도선의 출생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수미선사비문(靈巖 道岬寺 道詵國師·守眉禪師碑文)'에 따르면, 도선의 어머니는 최씨(崔氏)로 강가에 떠내려오는 오이를 먹고 임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비(光陽 玉龍寺 先覺國師碑)'에 따르면, 도선의 어머니는 강씨(姜氏)로, 꿈에 어떤 사람이 광채나는 구슬 한 개를 주면서 삼키라고 하였는데 그 후 태기가 있었고, 만삭이 되도록 오직 독경과 염불에만 뜻을 두었다고 한다.[2]

Quote-left.png 어머니는 崔氏니 ...(중략)... 어머니가 겨울철 강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떠내려오는 오이를 건져 먹고 임신하여 俊秀한 아들을 낳았으니, 마치 后稷의 어머니 姜嫄이 巨人의 발자취를 밟고 感心하여 임신한 후 태어난 것과 같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21-422쪽.


Quote-left.png 어머니는 姜氏니, 어느 날 밤 꿈에 어떤 사람이 明珠 한 개를 건네 주면서 삼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임신하여 만삭이 되도록 오신채(五辛菜)와 누린내 나는 육류(肉類)는 일체 먹지 아니하고 오직 독경과 염불로써 佛事에 지극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2쪽.


출가수행

도선의 출가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수미선사비문(靈巖 道岬寺 道詵國師·守眉禪師碑文)'에 따르면, 도선은 월남사(月南寺)로 출가하여 불경을 배웠다. 그러나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비(光陽 玉龍寺 先覺國師碑)'에 따르면, 도선은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승려가 되었다.[3]

Quote-left.png 일찍이 月南寺로 가서 佛經(貝葉)을 배웠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23쪽.


Quote-left.png 려서 희희(嬉戱)하거나, 우는 때에도 그의 뜻은 부처님을 경외함이 두터웠다. 그리하여 부모가 그는 반드시 불법을 담을 만한 그릇임을 알고, 마음으로 출가를 허락하기로 하였다. 15살이 되었을 때, 이미 영오(穎悟)하고 숙성할 뿐 아니라, 기술과 예술에까지 겸비하였다. 드디어 머리를 깎고 월유산 화엄사에 나아가서 大經을 독습하여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미 大義를 통달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2-433쪽.


도선은 20세가 되던 846년(문성왕 8)에 교법을 떠나 스스로 선정 수행을 하려 하였는데, 마침 혜철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현재의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대안사(大安寺)에서 가르침을 편다는 이야기를 듣고 혜철의 문하에 가서 수학하였다. 23세가 되던 849년(문성왕 11)에는 혜철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4]

Quote-left.png 문성왕 8년 20살 때에 이르러 홀연히 스스로 생각한 나머지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교법을 여의고 스스로 靜慮하여야 할 것이어늘 어찌 능히 움직이지 않고 올올(兀兀)하게 문자에만 고수하고 있겠는가." 이때 혜철대사가 密印을 서당지장(西堂智藏) 禪師로부터 전해받고, 귀국하여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대안사에서 開堂하여 연설하고 있었으므로 법을 구하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스님도 선문에 구의(摳衣)하여 제자가 되려고 청하였다. 혜철대사가 그의 총명함을 가상하게 여겨 알뜰히 지도하였다. 무릇 이른바 말이 없는 말과 法이 없는 法을허중(虛中)에서 주고 받아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23살 때 혜철대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이미 一乘了義를 통달하고, 參學하여 일정한 곳이 없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3-434쪽.


활동

도선은 운봉산(雲峯山)에 굴을 파고 수도하기도 하였으며, 태백산(太白山)에 움막을 치고 여름 한철을 보내기도 하였다.[5]

Quote-left.png 노을을 밟고 천석(泉石)을 완상하면서 유수(幽邃)한 곳과 명승지를 찾아 선지식을 친견하고 問法하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때로는 운봉산밑 동굴에서 참선하기도 하고, 혹은 태백과 같은 큰 바위 앞에 초막을 맺고 좌선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의 명칭이 널리 퍼져서 온 천하 사람들이 그의 도덕을 尊仰하였다. 신비한 기적이 많았으나, 그러나 별로 중요하지 아니한 것은 기록하지 않았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4쪽.


도선은 863년(헌안왕 4) 37세의 나이로 희양현(曦陽縣: 현 전라남도 광양시) 백계산 옥룡사에 주석하여 35년간 머물면서 제자를 양성하였다. 또한 헌강왕(憲康王)의 초빙으로 궁궐에서 설법하였지만 수도의 번잡함을 싫어하여 얼마 후에 다시 옥룡사로 돌아왔다.[6]

Quote-left.png 희양현 백계산에 옛 절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 옥룡사였다. 스님께서 遊歷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그 경치가 幽勝함을 좋아하여 堂宇를 개수하고, 시원하게 여겨 이곳에서 정진하다가 임종할 곳으로 뜻을 굳히고, 연좌(宴坐)하여 망언하기를 무려 35년 동안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의 도덕을 흠모하여 마치 양고기가 있는 곳에 개미가 모여들 듯, 학인들이 사방으로부터 구름처럼 운집하였다. 세수할 때에는 수건과 양치질할 물을 수발하며, 출입할 적에는 錫杖과 신발을 준비하는 등 정성껏 시봉하였다. 문하에 제자가 항상 수백명을 넘었다. 차별적인 모든 根機들에게 一雨로 널리 윤택하였으며, 목격(目擊) 현장에서 신비하게 密授하여 빈손으로 나아가서 가득히 채워서 돌아갔다. 헌강왕이 그의 높은 덕을 공경하여 사신을 보내 禁中으로 맞이하고 처음 보는 초면에 크게 기꺼워하여 禁中에 머물게 하고, 수시로 玄言과 妙道로써 임금의 마음을 開發토록 조언하였다. 얼마 후 시끄러운 경주가 싫어서 本寺로 돌아가도록 간청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4-436쪽.


입적

도선은 옥룡사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입적을 예언한 후 898년(효공왕 2) 3월 10일에 향년 72세로 입적하였다.[7]

Quote-left.png 어느 날 홀연히 제자들을 불러놓고 이르기를, "나는 곧 이 세상을 떠나갈 것이다. 대저 인연을 따라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따라가는 것은 진리의 상도이니, 어찌 오래도록 이 세상에 거할 수 있겠는가"하고 엄연히 입적하였으니, 때는 대당(大唐) 광화 원년(光化 元年) 3월 10일이었다. 향년은 72세이다. 사부대중들이 슬피 통곡하니 마치 사모하는 듯, 또는 넋이 빠진 바보와도 같았다. 드디어 神座를 옮겨 탑을 절 북쪽 언덕에 세웠으니, 유명을 준수한 것이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6쪽.


탑비의 건립

도선이 세상을 떠난 후에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옥룡사에 세워진 그의 탑을 '증성혜등(澄聖慧燈)'으로 명명(命名)하였다. 또한 박인범(朴仁範)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하였으나 돌에 새기지는 못했다.[8]

Quote-left.png 효공왕이 소식을 듣고 도탄(悼歎)하면서 특히 시호를 요공선사(了空禪師), 탑명(塔名)을 증성혜등(證聖慧燈)이라 추증하였다. 문인 홍적 등이 先師의 빛나는 행적이 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눈물을 머금고, 表狀을 올려 누구를 시켜 비문을 짓도록 하여달라고 간청하였다. 임금께서 이에 서서학사(瑞書學士) 박인범에 명하여 비문을 지었으나, 마침내 돌에 새기지 못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6쪽.


이후 고려 현종대선사(大禪師), 숙종왕사(王師)로 추증하였고,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1150년(의종 4)에는 왕명으로 최유청(崔惟淸)이 글을 짓고 정서(鄭叙)가 글씨를 쓴 비석을 개경(開京) 국청사(國淸寺)에 세웠다. 1172년(명종 2)에 옥룡사의 주지 지문(志文)이 비석을 옥룡사로 옮겼다.[9]

Quote-left.png 현종이 大禪師라는 법계를 追贈하였으며, 숙조(肅祖)는 王師로 추봉하고, 우리 聖考이신 효공대왕조에 이르러 열성조에 대한 위업을 크게 선양하였다. 따라서 스님에게 건국공로에 대한 은혜를 보답하는 뜻으로, 드디어 선각국사로 책봉하고 사신을 本寺의 影堂에 보내 국사 추대의 고례행사(告禮行事)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의종 임금께서는 또 그 사적을 비에 새기도록 명하여 오래도록 전하게 하였으니, 장하신지라, 왕조의 존경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중략)...

비문을 이미 비석에 새간 다음 해에 臣과 鄭叙와 함께 참소를 당하여 혹은 유배를 가거나, 혹은 공직에서 쫓겨났다. 朝士들이 모두 규탄하였으며, 臣들도 百喙으로 공격하여 반드시 死地에 놓여 원수의 배를 채워 주고자 하였다. 비록 도선국사의 사적이 臣의 賢과 不肖에 얽매이지 아니 하였으므로 한 마디도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비석이 마땅히 세워져야 할 것이나, 그 돌이 드디어 국청사의 문무(門廡)의 밑에서 20여년간 방치되어 먼지에 덮혀 쌓이고 흙이 묻어 부식되어 거의 비상한 功烈로 하여금 민멸(泯滅)하여 후세에 傳聞할 수 없게 되었다.

...(중략)....

국사의 법손인 운암사 주지 중대사 지문이 그 事訴로써 대사씨에 접수하여 드디어 교지를 받았다. 光陽縣貢을 불러 그 비석의 원석을 배에 실어 옥룡사로 보냈다. 임금께서 내시 양온(良醞) 서승(署承) 박봉균 등을 보내 공사를 감독케 하고, 대사 설호정 이양정에게 터를 정하도록 하였다. 석공은 화엄사 대중을 불렀고, 역부는 광양과 구례 두 현에서 징발하였으며, 군인 감무원(軍人 監務員) 장사랑 위위주부( 將仕郞 衛尉主簿) 한언방과 장사랑 위위주부 강립서등이 그 역사를 감독하였다. 그러나 실지 총감독은 주지 지문스님이 맡아 얼마 되지 않아 낙성하니, 三間의 비각이었다. 대정 12년 임진년 10월 19일에 수비(竪碑) 공사가 끝났는데, 구부가 산정(峻整)하고 계기(階基)가 견고하여 실로 천년·만년이 지나가도 전혀 기울어지지 않을 것이다. 탑비를 보호할 塔殿인 堂直은 절 동북쪽 약 2백보 지점에 세웠으니, 참으로 상개(爽塏)한 위치이다. 지문이 또 임금께 고하여 이르기를 원하옵건대, 本朝 王의 국사 비문도 구식에 의하여 석배(石背)에 법손과 제자 중에 대덕 이상의 직명을 실어, 미래에 영원히 垂示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다. 계사년 5월 29일 주청하여 臣에게 음기를 짓도록 명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9-446쪽.


또한 1653년(효종 4)에는 도선이 머물렀다고 전하는 영암 도갑사에 도선의 비가 건립되었다.[10]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는 1636년(인조 14) 4월에 건립을 시작하여 17년 후인 1653년(효종 4) 4월에 완료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본래 이곳에 도선의 고비(古碑)가 있었는데 비바람으로 글자가 마멸되고 귀부의 머리가 결락되는 등 훼손이 심하여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도갑사를 중창한 옥습대사(玉習大師)가 3년에 걸쳐 각 사찰에 다니면서 찬조를 구하는 한편, 신도들로부터 모금하고 한양까지 가서 비문을 청탁하였다. 비석에 사용된 돌은 전라도 관찰사의 도움으로 부역을 통해 여산(礪山)에서 운반해 왔으며, 돌이 도착한 이후 7개월 만에 공사가 완료되었다고 한다.[11]

Quote-left.png 오래전부터 이미 스님의 법의 비가 雲霧에 휩싸였으나, 道岬寺는 龍宮과 같이 우뚝 솟아 있다. 도선국사의 古碑에 이끼가 끼어 드디어 거북의 머리는 결락되었다. 이를 보는 스님들마다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푸른 山은 내려다 보고 슬퍼하였다. 비록 태양과 같이 빛나는 偉大한 업적이 있더라도, 만약 그것을 傳해 주는 行蹟碑가 破缺되면어찌 後人들에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마치 새의 날개가 자라서 멀리 날아가듯이일찍이 老宿(妙覺和尙 등)들이 建物을 보수하였으나, 상당 기간 동안 스님의 碑를 다시 세우지 못하였는데, 鸞새와 鳳새가 날아가듯 舊碑를 치우고 新碑를 세우기로 하였다. 이 때 그의 徒弟인 玉習大師가 각 사찰로 다니면서 贊助를 구하는 한편, 信徒들로부터 募金하여 무려 3년이 지나는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다시 京都로 나를 찾아와 碑文을 재촉함이 더욱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비록 “黃絹幼婦外孫虀臼”의 碑文을 지을만한 文章力이 부족하지만, 玉習上人의 간곡한 청탁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27-428쪽.


풍수지리사상

도선은 선승이었지만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도선이 풍수지리설을 수학한 배경에 대해 『고려사』와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에서는 중국에 유학하여 밀교 승려인 일행(一行)에게서 지리법(地理法, 풍수설)을 배워왔다고 하였으나, 일행은 도선 보다 백여 년 전에 활동하였던 인물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 반면,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비'에서는 지리산 구령(甌嶺)에서 수행할 때 이인(異人)을 만나 구례현 경계 지점의 남해변에서 풍수설을 전수받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후 도선은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인식과 풍수지리설을 결부하여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과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을 주장하였는데, 고려 시대에는 도선의 풍수 사상이 국가적으로 널리 수용되었다.[12]

Quote-left.png 舞象하는 나이가 되기 전에 使臣을 따라 중국으로 가서 胡渭가 지은 禹貢의 山川說에 따라 두루 살펴보고 唐家의 文物을 익혔다. 唐나라 皇帝가 宮內의 延英殿에서 스님을 영접하고 간곡히 부탁하기를 朕의 꿈에 金人이 나타나 돌아가신 大行 皇帝의 新陵의 터를 스님을 초청하여 占卜토록 하라는 現夢을 받았으니, 스님은 사양하지 말고 가장 좋은 明堂 터를 잡아 달라고 청하였다. 道詵은 피할 수가 없어 竈王神이 지신한대로 황제가 타고 다니는 御馬가운데 병든 白色 말 한 마리를 내려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가장 吉한 터를 잡아 바쳤는데, 보는 사람마다 칭찬하기를 天賦的으로 타고난 地理에 대해 特異한 眼目을 가졌다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어찌 地術에 대한 능력뿐이겠는가! 天子도 國師로 책봉하여 존경하였으며, 一行禪師도 이 땅의 사람이 아니고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찬탄하였다. 그리고 국사는 金箱과 玉笈을 두루 연구하여 꿰뚫었으며, 赤縣의 黃圖를 탐구하여 깊이 통달하였다. 그 후 동쪽으로 돌아가 연마한 地術을 振作하는 한편, 北學한 金箱,玉笈,黃圖의 내용으로써 時局을 구제하겠다면서 황제에게 귀국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우리 나라에 귀국한 후 地形을 살펴보니 行舟形局이었다.그러므로 배의 首尾를 鎭壓하기 위해서 절을 짓고 塔을 設立하게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23-425쪽.



Quote-left.png 처음 스님께서 옥룡사에 자리잡지 아니하고, 지리산 구령에 암자를 짓고 주석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떤 이상한 사람이 찾아와 座下에서 스님께 여쭈어 이르기를, "弟子는 物外에서 깊이 숨어서 살아온 지가 벌써 수백년에 가깝습니다. 조그마한 기술이 있어 높은 스님에게 받들어 올리려 하오니, 만약 천술(賤術)이라 하여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면 다른 날 남해의 바닷가에서 마땅히 알려 드리겠사오니, 이것 또한 대보살이 세상을 구제하며, 중생을 제도하는 법이옵니다"라 하고,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스님께서 기이하게 여겨 약속했던 곳으로 찾아가서 과연 그 사람을 만났다. 그는 곧 모래를 끌어모아 산천에 대한 順逆의 형세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돌아다 보니 그 사람은 이미 없었다. 그곳이 현재의 구례현 경계 지점이니, 그 지방 사람들이 사도촌이라고 일컫는다. 이로 말미암아 스님은 스스로 홀연히 깨닫고, 더욱 음양오행의 술을 연구하였다. 비록 금단 과 옥급 등 유수한 비결들을 모두 흉중에 담았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6-437쪽.


고려 태조와의 관계

고려 시대에 도선은 고려의 건국을 예언한 인물로서 널리 숭상되었다. 송악에서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인 왕용건(王龍建)을 만나 왕자(王者)가 출생할 터를 잡아 주고 "2년 후에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며, 왕건이 17세가 되던 해에 왕건에게 지리(地利), 천시(天時)를 알려 주어 후삼국 통일을 이룰 수 있게 하였다는 일화가 널리 유포되었다.[13]

Quote-left.png 멀고 가까운 곳을 두루 둘러보고 王建의 아버지에게 白雪이 퍼붓는 때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 곳(明堂)에 집터를 잡아주어 王이 될 아들을 낳게하였을 뿐 아니라 半千年間 王業을 누릴 수 있는 松嶽에 王都를 정해 주었다. 요청하였다. 우리 나라에 귀국한 후 地形을 살펴보니 行舟形局이었다.그러므로 배의 首尾를 鎭壓하기 위해서 절을 짓고 塔을 設立하게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25-426쪽.


Quote-left.png 신라의 政敎가 침쇠(寢衰)하여 국가 위망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장차 성인이 천명을 받아 特起할 사람이 있을 줄 알고, 그 길로 송악군으로 갔더니, 그 때 우리 세조께서 郡方에서 거택을 짓고 있었다. 스님께서는 그의 문전을 지나면서 이르기를, "아! 이곳은 마땅히 王者가 출생할 곳이언만 다만 經始하는(살고 있는 사람) 자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 했다. 그 때 마침 靑衣童子가 이 말을 듣고 집 안으로 들어가서 이 사실을 세조에게 전하였다. 세조는 급히 나와 스님을 집 안으로 迎入하여 그 謀策과 改營에 대해서 자문하였다. 스님께서 대답하되, "2년 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대답하고, 이어 책 1권을 지어 겹겹으로 封하여 세조에게 주면서, "이 책은 아직 출생하지 아니한 군왕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 장실(壯室)에 이른 후에 전해 주라"고 당부하였다. 바로 이 해에 신라 헌강왕이 즉위하였는데, 唐나라 건부 2년에 해당된다. 4년에 이르러 태조 왕건이 과연 前第에서 탄생하였다. 그 후 장년에 이르러 스님이 전해 준 책을 받아 보고서야 천명이 자신에게 내려진 줄 알고, 드디어 구포(寇暴)한 무리를 제거하고 비로소 區宇에 나아갔으나, 공손히 신성의 뜻을 받든 것이지, 어찌 천하를 소유할 욕심이 있었겠는가?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37-438쪽.


또한 태조는 도선에 영향을 받아, '훈요십조(訓要十條)' 제2조에서 도선이 정한 곳 외에 함부로 사찰을 짓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14]

Quote-left.png 둘째, 여러 사원은 모두 도선(道詵)이 산수(山水)의 순역(順逆)을 미루어 점쳐서 개창한 것으로, 도선이 이르기를, ‘내가 점을 쳐 정한 곳 외에 함부로 덧붙여 창건하면 지덕(地德)이 줄어들고 엷어져 조업(祚業)이 길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후세의 국왕이나 공후(公侯)·후비(后妃)·조신(朝臣)이 각각 원당(願堂)이라 일컬으며 혹시 더 만들까봐 크게 근심스럽다. 신라(新羅) 말에 다투어 사원[浮屠]을 짓다가 지덕이 쇠하고 손상되어 결국 망하는 데 이르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Quote-right.png
출처: 『고려사』 세가 태조 26년 4월 계묘.[15]


묘소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비(光陽 玉龍寺 先覺國師碑)'에 따르면, 도선이 옥룡사에서 입적한 후 효공왕(孝恭王)으로부터 '증성혜등(證聖慧燈)'이라는 탑명(塔名)이 내려졌다고 한 것을 근거로 도선의 부도가 옥룡사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1997년에 순천 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실시된 옥룡사 발굴 조사에서 부도전 최하층에서 통일 신라 때의 와편들이 출토된 것을 들어 이 유구를 도선의 부도로 추정한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16]

저술

도선의 저서로는 『도선비기(道詵秘記)』,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이 있다고 한다.[17]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도선 A는 B를 위한 비이다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비 도선 A는 B를 위한 비이다
신라 태종무열왕 도선 A는 B와 관련이 있다
도선 구례 화엄사 A는 B에서 출가하였다
도선 강진 월남사 A는 B에서 출가하였다
혜철 도선 A는 B의 스승이다
도선 혜철 A는 B로부터 계를 받았다
도선 곡성 태안사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도선 광양 옥룡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도선 신라 헌강왕 A는 B와 관련이 있다
도선 광양 옥룡사 A는 B에서 입적하였다
도선 신라 효공왕 A는 B와 관련이 있다
도선 고려 인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도선 고려 의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도선 일행 A는 B와 관련이 있다
도선 왕용건 A는 B와 관련이 있다
도선 고려 태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도선비기 도선 A는 B가 저술하였다
송악명당기 도선 A는 B가 저술하였다
도선답산가 도선 A는 B가 저술하였다
삼각산명당기 도선 A는 B가 저술하였다
도갑사도선국사진영 도선 A는 B의 초상화이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827년 도선 출생.
846년 도선곡성 태안사로 가서 혜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849년 도선혜철로 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863년 도선광양 옥룡사에 주석하였다.
898년 도선광양 옥룡사에서 입적하였다.
1150년 도선의 비가 개성 국청사에 세워졌다.
1172년 광양 옥룡사의 주지 지문도선의 비를 광양 옥룡사로 옮겼다.
1653년 영암 도갑사도선의 비가 건립되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홍기승, "도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영숙, 「영암 도갑사 도선·수미비의 조성배경에 대한 고찰」, 『문화사학』32, 한국문화사학회, 2009, 178쪽.
  3. 배종호, "도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배종호, "도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홍기승, "도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9. 홍기승, "도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0.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1. 최연식,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2.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3.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4. 홍기승, "도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5. "왕이 훈요10조를 내리다", 고려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16.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7. 홍기승, "도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00-455쪽.
  • 이지관,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22-448쪽.
  • "도갑사도선수미양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옥룡사선각국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배종호, "도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도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홍기승, "도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최연식, "도선",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최연식,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영숙, 「영암 도갑사 도선·수미비의 조성배경에 대한 고찰」, 『문화사학』32, 한국문화사학회, 2009, 173-1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