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표준영정"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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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렸고(작가), 언제 그려졌으며(제작 시기), 어디서 보관하고 있고(소장 사항), 어떻게 그려졌으며 어떻게 전승되어 왔고(제작 맥락과 전승 내력), 현 시점에서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훼손이나 보존처리 상태와 문화재로서의 가치 및 원본/이모본 여부) | 누가 그렸고(작가), 언제 그려졌으며(제작 시기), 어디서 보관하고 있고(소장 사항), 어떻게 그려졌으며 어떻게 전승되어 왔고(제작 맥락과 전승 내력), 현 시점에서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훼손이나 보존처리 상태와 문화재로서의 가치 및 원본/이모본 여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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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유신 영정>(도 67) 역시 장우성이 1976년에 제작하였는데 충북 길상사 정화작업과 관련 영정 제작이 추진되었으며 김유신이 탄생지인 충북 진천 길상사 홍무전에 봉안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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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영정에 묘사된 김유신의 모습=== | ===표준영정에 묘사된 김유신의 모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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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북도 진천군(김유신이 태어난 만노군이 바로 오늘날의 진천군이다.)의 김유신 사당인 길상사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 역시 장우성 화백 작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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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유신 영정은 전신 입상으로서 얼굴은 우안 7분면이며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갑주와 투구를 착용하고 왼손에 칼을 잡고 서 있다. 갑주의 하반신은 허리 양 옆에 댄 상상갑의 모양과 대퇴부에 댄 네모난 하상갑 그리고 좌우 하상갑 사이 앞쪽에 위치한 전상갑 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에 반해 상반신은 양쪽으로 뿔이 달린 투구와 갑주의 비늘 등의 모습이 김경승의 <김유신 동상>과 비슷하다.<ref>이영미, 「한국표준영정연구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117쪽.</ref><br/> | ||
+ | [[김유신]]의 얼굴의 경우, 반백의 수염에 이마와 볼에 주름살이 그려져 있으며, 약간 아래로 내려온 눈에 꾹 다문 입술을 하고 있어 용맹스럽다기 보다는 온화하며 노년의 평온함을 가진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삼국통일이라는 성업을 완수한 직후인 60대의 모습으로 그리고자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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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영정을 그릴 때 김해 김씨 남성 50여 명의 얼굴을 보고 이를 기준으로 그렸다고 한다. https://namu.wiki/w/%EA%B9%80%EC%9C%A0%EC%8B%A0#fn-1 | ||
김유신 장군의 影幀(영정)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사연이 있습니다. 이 영정을 그릴 당시 김유신 장군의 원래 모습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손들의 생긴 모습 중 특징 부분을 합성해서 그렸다고 합니다. 1972년에 그린 작품입니다.http://chogabje.com/board/view.asp?C_IDX=12102&C_CC=BJ | 김유신 장군의 影幀(영정)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사연이 있습니다. 이 영정을 그릴 당시 김유신 장군의 원래 모습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손들의 생긴 모습 중 특징 부분을 합성해서 그렸다고 합니다. 1972년에 그린 작품입니다.http://chogabje.com/board/view.asp?C_IDX=12102&C_CC=BJ | ||
+ | 표준 영정은 김해김씨 50명의 얼굴을 인터넷으로 집자하듯이 그려서 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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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준영정제도가 제정된 이래 70년대와 80년대 초까지 이순신, 강감찬, 을지문덕, 김유신 등 무인들이 다수 제작되었음에도 무구에 대한 고증은 작가에 일임되었다. 이 때문에 고증이 쉽지 않았다. 1986년 11월에는 영정동상심의위원으로 무구전문가를 추가하여 장군 등의 동상이나 영정을 제작할 때 무구에 대한 고증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짧은 제작 기간에 인문학적 지식이 부족한 작가가 전적으로 고증을 했기 때문에 표준영정 및 동상에 고증 논란이 늘 뒤따랐으며 이중 무구, 갑옷 등에 논란이 많았다.<ref>이영미, 「한국표준영정연구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44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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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우성은 충북 길상사 외에 1976년에 경주 통일전에 <김유신 영정>(도 112)을 제작했다. 경주 통일전의 <김유신 영정>은무열왕, 문무왕과 함께 삼국통일을 기리는 경주 통일전 봉안을 위해 제작되었다. <김유신 영정>은 푸른색 비단 방석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으로 은 제관과 은제띠를 착용하고 홍포를 입은 채 공수자세를 하고 있다. 얼굴은 충북 길상사의 영정과 비슷하나 경주 통일전의 김유신의 모습이 눈매가 약간 올라가 있으며 입가와 눈가의 주름이 충북 길상사의 것보다 다소 젊어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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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유신 영정>은 월전미술관에 초본이 남아 있어 제작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초본(도 110)은 작은 종이에 얼굴을 그린 후 다시 큰 종이에 옮겨 붙여 몸을 완성했다. 얼굴과 갑옷 등 전체적인 모습을 연필로 그린 | ||
+ | 후 얼굴을 제외한 갑주부분은 먹을 사용하여 다시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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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 =='''지식 관계망'''== |
2017년 8월 14일 (월) 15:16 판
형태 : 초상화_인물명_유형명_하위구분명(지정 or 제작연도, 소장처, 작가 등).jpg 예1 : 초상화_강감찬_표준영정_1974.jpg 예2 : 초상화_고종_어진_국립중앙박물관.jpg 예3 : 초상화_지눌_진영_송광사.jpg 사진 크기 : 세로 기준 최소 500픽셀 이상
김유신 표준영정 | |
한자명칭 | 金庾信 標準影幀 |
---|---|
작가 | 장우성 |
제작시기 | 1976년 |
소장처 | 진천 길상사 |
유형 | 표준영정 |
크기(세로×가로) | 187×98㎝ |
목차
정의
고려의 명장 강감찬(姜邯贊, 948-1031년)의 모습을 그린 국가표준영정.
내용
김유신 표준영정
누가 그렸고(작가), 언제 그려졌으며(제작 시기), 어디서 보관하고 있고(소장 사항), 어떻게 그려졌으며 어떻게 전승되어 왔고(제작 맥락과 전승 내력), 현 시점에서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훼손이나 보존처리 상태와 문화재로서의 가치 및 원본/이모본 여부)
<김유신 영정>(도 67) 역시 장우성이 1976년에 제작하였는데 충북 길상사 정화작업과 관련 영정 제작이 추진되었으며 김유신이 탄생지인 충북 진천 길상사 홍무전에 봉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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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강감찬 표준영정은 서울 관악구 낙성대(落星垈)에 있는 안국사(安國祠)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현재 모셔져 있는 영정은 1974년 월전 장우성 화백에 의해 그려진 작품이 아니라 금광복 화가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1998년 낙성대에서 소장하고 있던 장우성 화백의 표준영정을 도난당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와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의 한겨레신문 기사 내용을 참고할 수 있다.
관악구청쪽은 영정을 도둑맞은 뒤 1974년 낙성대 준공에 맞춰 이 영정을 그린 한국화가 월전 장우성 화백에게 부탁해 다시 그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장 화백이 "나이가 들어 힘이 부친다"며 사양하자 다른 화가에게 부탁해 새로 영정을 그려 모셔 놓았다. 도둑맞은 영정은 높이 212cm, 너비 121cm 크기로, 이를 그린 장 화백이 서울대 미대 초대학장과 국전심사위원장을 지낸 대표적인 한국화가여서 상당히 값이 나가리라 미술계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충남 현충사의 이순신 장군과 독립기념관 유관순 열사의 영정도 장 화백의 작품이다.[1]
장군 영정을 도둑 맞은 때는 1998년 1월 11일 밤과 12일 새벽 사이로, 누군가 사당에 침입해 면도칼로 영정을 도려내 훔쳐간 것을 숙직을 끝낸 관리직원이 발견했다. 구청쪽은 곧바로 장 화백에게 영정을 다시 그려 달라고 요청했으나 나이를 이유로 거절하자, 화가 금광복(40, 관악구 신림동)씨에게 160만원과 함께 영정 사진을 건네주며 그대로 그려 달라고 부탁해 새 영정을 마련했다. 금씨는 "그림을 다 그리고 표구점에 맡겼더니 구청쪽에서 나도 몰래 영정을 찾아갔다"며 "새로 영정을 모실 때에는 제(祭)로 예를 갖춰야 하는데도 지난 3월 그냥 걸어 놓았다"고 말했다. 주영근 관악구청 공원녹지과장은 "장 화백의 영정은 장군을 모시는 무속인이 훔쳐갔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는 또 "해마다 음력 8월에 인헌제(仁憲祭)를 하는데 두 번씩이나 경비를 지출할 필요가 없어 제를 지내지 않았다"고 해명했다.[2]
관악경찰서는 "도난당한 영정이 월전 선생 작품이라는 말을 듣지 못해 무명 화가가 그린 것으로 알았다"며 "그때 작품 가치가 없다고 보고 수사를 종결했다"고 말했다.[3]
http://chogabje.com/board/view.asp?C_IDX=12102&C_CC=BJ 우리 대한민국에 김유신 장군을 모신 주요 사당이 열두 군데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진천에 있는 영정을 표준 영정이라고 해서 김유신 장군 영정을 그릴 때 여기 것을 기준으로 해서 그린다고 합니다. 영정은 1972년 월전 장우성 화백께서 그리셨는데 1976년도에 사적 정리사업을 하면서 이쪽으로 모셨습니다. 당시 300만원 정도의 사업비를 들였다고 하는데 지금 가치로는 약 3억 원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여기 사당의 위치는 네 번째 옮기면서 자리한 곳입니다. 당초에는 김유신 장군 탄생지인 상계리 뒷산인 길상산에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관리가 안돼 옮기고 옮기다가 이쪽으로 옮긴 것은 1926년입니다. 한 50년 후인 1976년, 사적지 정리사업을 함으로써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께서 태어나신 곳은 사적으로 지적된 곳입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곳에서 김유신 장군의 탄생지에 대해서는 아주 정확하게 기록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분이 왜 잘못 알려졌느냐 하면 지금 남아있는 고전 중에서 三國史記 列傳 제일 앞 부분에 써있는 글 때문입니다. 거기에 뭐라고 써 있느냐 하면 ‘김유신은 경주 사람이다’라고 기록돼 있기 때문에 잘못 알려지게 된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김유신 장군께서 경주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김유신 장군께서는 사후 160년 후 흥덕왕 10년(835년)에 흥무대왕으로 追贈(추증)되셨습니다. 김유신 장군처럼 죽어서 왕으로 追贈된 신하는 세계적으로도 사례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에서 왕은 神과 같은 존재로 백성하고 신은 분류됐기 때문에 추증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死後 160년 후에 追贈되신 겁니다.
김유신의 외모에 대한 기록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평왕 17년에 칠요(七曜, 태양·달·수성·화성·목성·금성·토성)의 정기를 품고 태어났기 때문에 등에 칠성(七星)의 무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4]
또한, 『화랑세기』에는 서기 540년부터 681년까지 재임한 역대 풍월주 32명 중 15명의 외모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제15대 풍월주인 김유신의 외모에 대해서는 "태양과 같았다"고 묘사되어 있다.[5]
표준영정에 묘사된 김유신의 모습
충청북도 진천군(김유신이 태어난 만노군이 바로 오늘날의 진천군이다.)의 김유신 사당인 길상사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 역시 장우성 화백 작품.
김유신 영정은 전신 입상으로서 얼굴은 우안 7분면이며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갑주와 투구를 착용하고 왼손에 칼을 잡고 서 있다. 갑주의 하반신은 허리 양 옆에 댄 상상갑의 모양과 대퇴부에 댄 네모난 하상갑 그리고 좌우 하상갑 사이 앞쪽에 위치한 전상갑 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에 반해 상반신은 양쪽으로 뿔이 달린 투구와 갑주의 비늘 등의 모습이 김경승의 <김유신 동상>과 비슷하다.[6]
김유신의 얼굴의 경우, 반백의 수염에 이마와 볼에 주름살이 그려져 있으며, 약간 아래로 내려온 눈에 꾹 다문 입술을 하고 있어 용맹스럽다기 보다는 온화하며 노년의 평온함을 가진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삼국통일이라는 성업을 완수한 직후인 60대의 모습으로 그리고자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영정을 그릴 때 김해 김씨 남성 50여 명의 얼굴을 보고 이를 기준으로 그렸다고 한다. https://namu.wiki/w/%EA%B9%80%EC%9C%A0%EC%8B%A0#fn-1
김유신 장군의 影幀(영정)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사연이 있습니다. 이 영정을 그릴 당시 김유신 장군의 원래 모습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손들의 생긴 모습 중 특징 부분을 합성해서 그렸다고 합니다. 1972년에 그린 작품입니다.http://chogabje.com/board/view.asp?C_IDX=12102&C_CC=BJ
표준 영정은 김해김씨 50명의 얼굴을 인터넷으로 집자하듯이 그려서 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표준영정제도가 제정된 이래 70년대와 80년대 초까지 이순신, 강감찬, 을지문덕, 김유신 등 무인들이 다수 제작되었음에도 무구에 대한 고증은 작가에 일임되었다. 이 때문에 고증이 쉽지 않았다. 1986년 11월에는 영정동상심의위원으로 무구전문가를 추가하여 장군 등의 동상이나 영정을 제작할 때 무구에 대한 고증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짧은 제작 기간에 인문학적 지식이 부족한 작가가 전적으로 고증을 했기 때문에 표준영정 및 동상에 고증 논란이 늘 뒤따랐으며 이중 무구, 갑옷 등에 논란이 많았다.[7]
장우성은 충북 길상사 외에 1976년에 경주 통일전에 <김유신 영정>(도 112)을 제작했다. 경주 통일전의 <김유신 영정>은무열왕, 문무왕과 함께 삼국통일을 기리는 경주 통일전 봉안을 위해 제작되었다. <김유신 영정>은 푸른색 비단 방석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으로 은 제관과 은제띠를 착용하고 홍포를 입은 채 공수자세를 하고 있다. 얼굴은 충북 길상사의 영정과 비슷하나 경주 통일전의 김유신의 모습이 눈매가 약간 올라가 있으며 입가와 눈가의 주름이 충북 길상사의 것보다 다소 젊어보인다.
<<<118
탈이데올로기 시대라 할 수 있는 최근까지 무인의 영정이 갑주를 착용한 모습으로 제작되고 있다는 것은 무인들도 관복을 입고 그려졌던 조선시대 초상화 전통과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점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것은 김은호의 <충무공 영정>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갑주를 착용한 무신상의 전통은 왕이나 사대부의 무덤 앞에 서 있는 석인상에서도 볼 수 있다.212)(도 108) 이들 영정에서 갑주와 투구 등은 주로 고구려 벽화나 출토유물을 토대로 제작되었다.[8]
<김유신 영정>은 월전미술관에 초본이 남아 있어 제작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초본(도 110)은 작은 종이에 얼굴을 그린 후 다시 큰 종이에 옮겨 붙여 몸을 완성했다. 얼굴과 갑옷 등 전체적인 모습을 연필로 그린
후 얼굴을 제외한 갑주부분은 먹을 사용하여 다시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초본에는 흉부에 방울이 세 개 달려있으나, 실제 표준영정에는 없어 영정심의과정에서 제거된 것을 알 수 있다. <<<117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김유신 표준영정 | 표준영정 | A는 B에 해당한다 | |
김유신 표준영정 | 김유신 | A는 B를 묘사하였다 | |
김유신 표준영정 | 진천 길상사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
김유신 표준영정 | 장우성 | A는 B에 의해 그려졌다 | 1972년 |
김유신 표준영정 | [[ ]] | A는 B에 의해 모작되었다 | |
김유신 표준영정 | [[ ]]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977년 | 김유신 표준영정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
시각자료
주석
- ↑ 김태경, "장우성 화백의 강감찬 장군 영정 도난 모작 대체하고 '시치미'", 『한겨레신문』, 1998년 07월 20일.
- ↑ 김태경, "장우성 화백의 강감찬 장군 영정 도난 모작 대체하고 '시치미'", 『한겨레신문』, 1998년 07월 20일.
- ↑ 김태경, "장우성 화백의 강감찬 장군 영정 도난 모작 대체하고 '시치미'", 『한겨레신문』, 1998년 07월 20일.
- ↑ 『삼국유사』권1, 「기이」, 김유신 0595년. 온라인 참조: '김서현의 아들 유신이 칠요의 정기를 품고 태어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종성, "신라 최고의 꽃미남 화랑은?", 『문화유산채널』, 작성일: 2010년 11월 11일.
- ↑ 이영미, 「한국표준영정연구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117쪽.
- ↑ 이영미, 「한국표준영정연구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44쪽.
- ↑ 이영미, 「한국표준영정연구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116쪽.
참고문헌
유용한 정보
- "강감찬 표준영정",
『한민족정보마당』online , 한국문화정보원. - "강감찬장군표준영정지정(문화공보부공고제226호)-관보제6785호(1974년6월26일)",
『관보』online , 국가기록원.
더 읽을거리
- 전시도록
- 문화체육부, 『표준영정도록-역사를 빛낸 선현』, 문화체육부, 1993.
- 문화체육부, 『표준영정도록-역사를 빛낸 선현』, 문화체육부, 1999.
-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월전의 붓끝, 한국화 100년의 역사』, 이천시립월전미술관, 2012.
- 단행본
- 장우성, 『월전회고록-화단풍상칠십년』, 미술문화, 2003.
- 논문
- 조인수, 「월전 장우성의 초상화」, 『제2회 월전학술포럼』발표자료집, 월전학술포럼, 2014, 1-12쪽.
임금 어진의 경우, 기사 제목에 어진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반영
고승 진영의 경우, 기사 제목에 진영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반영
공신 초상의 경우, 기사 제목에 도상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반영
현대에 제작된 표준영정의 경우, 기사 제목에 표준영정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반영
기타 사항의 경우, 기사 제목에 초상이라는 명칭을